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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요3:16-18 사도신경에 나타난 믿음의 내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내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기독교의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믿음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교"라고 불러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종교를 "기독교," "예수교"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예수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하나님 형상의 파괴)되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알고 교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우리가 믿는 종교를 "기독교" 또는 "예수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를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연구할 주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첫 번째로 독생자의 의미, 두 번째로는 독생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 세 번째로는 독생자를 믿어야 할 중요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독생자의 의미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생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아들 낳는 재주도 없으시다. 어떻게 아들 하나만 낳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내는 누구냐?"라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를 비판할 때 이러한 방법으로 비판합니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교도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제우스와 그의 부인 헤라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한 다신론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생자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 "외아들"라는 말은 "하나의" 또는 "유일한"이라는 개념이 강하지만, 라틴어 원문은 "unicum"(여기에서 파생된 영어가 uniqued임)은 "독특한"이라는 뜻이 강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16에 나타나는 "독생자"를 번역할 때 여러 영어 번역 성경이 고심하였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모노게네이스(헬. ՌՏՍՏՃՅՍՇՒ)라는 말인데, 단순히 한명 뿐인 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NIV성경은 "his one and only son"이라고 번역하였고, NASB성경은 "His only begotten Son"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자인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도 "독특한"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란어 성경에 보면 "그에게서 독특하게 나오신 분"(Hij zijn eniggeboren Zoon)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흥미 있는 부분은 창세기 22:2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사용한 독자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을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이 LXX인역에 요한복음 3:16에 사용된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관사로 "한 아들"(ՔՏՍ ՕՉՏՍ)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라고 말하지 않고 "독생자"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낳았다," "태어났다" 또는 "생겨났다"는 의미로 "begotte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낳았다는 개념을 말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영어권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은 "bear"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앞의 "독특한"이라는 말과 결합하여 "독특한 방법으로 출생하셨다"는 말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라는 말은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독특한 방법으로 출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영광이라고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영광이라고 하는 용어를 생각할 때 하나님 편에서와 우리 인간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여러 가지 행동이나 표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구름으로 임재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출24:15-18).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임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본문에서 "그의 영광"이라고 하는 표현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난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이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의미는 독특한 방법으로 출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독특한 방법으로 출생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2. 독생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 예수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출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믿지 않고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3세기경의 유명한 교부 오리겐(Origen, c.185-c.254). )입니다. 이 사람은 헬라 철학에 능통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플라토(Plato) 철학을 가지고 이 부분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유출설"이라는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유출이라는 말 자체는 물통에 물을 부으면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러한 유출 개념을 하나님에게 적용하였는데 하나님이 충만해서 흘러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다음이 우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요 완전한 피조물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반신"(半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리에서 많이 벗어났습니다. 당시에 오리겐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큰 혼란이 일어나자 교회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때 결정된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본질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겐이 주장한 유출설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론에 따라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리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따라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문제없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었습니다. 이 후에 교회역사에서 유명한 이단자인 아리우스(Arius)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이 사람 역시 헬라철학자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은 한 분이든지, 예수님은 사람이든지 해야 한다." 아리우스는 본질이 같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 인간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아리우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는 아닙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이단적이며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유세비우스가 이단자 아리우스의 견해를 동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를 파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는 말 대신에 하나님과 본질이 비슷하다는 뜻인 호모이오스(homoios)라는 용어로 바꾸었습니다. 이후에 알렉선더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 유명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296-373)입니다. 그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반대하였습니다. 역시 알렉산더가 파면당한 것처럼 아타나시우스도 처음에는 파면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쫓기는 몸이 되었고, 숨어 다니면서 아리우스의 견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후에 다시 교회가 아리우스와 유세비우스의 견해가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교회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325년에 열렸던 유명한 니케아(Nicea) 공의회였습니다. 여기서 작성된 것이 "니케아 신경"입니다. 니케아 신경은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것인데, 여기에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중요하게 고백하고 있는 유명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에도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왔으나 지음을 받았거나 유래된 분이 아니다." 이미 이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에 교리 논쟁으로 인하여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형태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그래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던 분으로는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인 예수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역사상 실제 존재하신 분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시킨 인물일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이 최초로 창조한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하나님되심과 신성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를 전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출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간의 이성으로 믿어보려고 하는 시도에서 나타났습니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으로 믿어 보려고 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이성과는 관계없는 독단적인 교리에 따른 것입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은 그의 신앙명상록인 "팡세"(Pensees)에서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많이 설명하였습니다. 그 중에 이성으로만 알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성에 복종시킨다면 우리의 종교는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273) 이어서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신앙"(278)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독생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은 분명 이성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독특한 방법으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3. 독생자를 믿어야 할 중요성 우리가 독생자를 믿어야 할 중요성에 대하여서는 우리 교회사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요한복음 3:16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믿어야 할 대상을 독생자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우리 믿음생활의 목표입니다.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영생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여기에서 "안다"라고 하는 표현은 단순하게 말하는 지식적인 의미가 아니고 경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 사전이나 웹스터 사전에도 "안다"라고 하는 의미를 "깨닫다," "인식하다," "분별하다," "기억하다," "경험하다," "교제한다," "친숙하다"라는 의미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귀고 경험하는 체험적인 지식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가 종말론적이고 내세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거나 현재에는 영생을 경험할 수 없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 나라," "천국," "구원," "생명,"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참고. 마19:16-26).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언제 어디에서도 경험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영생"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생명을 수식하고 있는 "영원한"이라는 말에만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실제에 있어서는 "생명"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이라는 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의 특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경험될 수 있는 것이고, 마지막 날 영원히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개념입니다. 이러한 영생의 개념을 이해하신다면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믿으면 지금 현재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믿어야 할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믿음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을 때 주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우리 인간 편에서의 노력이나 지혜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산다고 해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믿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 모든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믿음은 믿는 자의 편에서 볼 때 개인적인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보트나 꼭두각시로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 즉 인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내가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의 책임적인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란필드(C. E. B. Cranfield)같은 분은 이 부분을 가리켜 "기독교 신학의 역설"(The paradox of Christian theology)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독생자를 믿으면 지금 현재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에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믿는 그때에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을 받았다"(ՊՅՊՑՉՔՁՉ, is condemned RSV)고 하는 말은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입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심판을 이해할 때 항상 미래적인 부분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에는 미래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히 구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적인 심판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의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already)와 장래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될 니래적인 하나님 나라(not yet)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생자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현재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지 아니한다면 이미 심판을 받아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나아가서 주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인간의 행위를 선악간에 심판하실 때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독특하신 방법으로 출생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할 중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독특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미 심판을 받아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마지막 날에는 최후의 심판을 받아 지옥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독특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으십시오. 여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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