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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주로 오실 그리스도 마25:31-46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완전한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들어가게 될 영광의 나라를 항상 사모하고 바라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얼마나 이 약속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진리 가운데 하나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 나타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교리인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을 하면서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반복하지만 이 날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관심 때문에 주님의 재림으로 있게될 최후 심판에 대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 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사도신경의 내용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고백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사도신경을 함께 연구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도신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가장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내용이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미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과 지금 하시고 있는 일, 그리고 장차 하실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령에 의해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 나신 것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게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지옥에 내려가시며, 하늘로 올라가신 일은 모두 과거시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신분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현재시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 보좌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지금 현재도 통치하신다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이 하늘 보좌에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신 것이라는 것은 미래시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에서 "저리로서"라는 말은 "주님이 지금 현재 통치하시는 하늘보좌로부터"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입니다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부분을 함께 연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재림은 역사 가운데 분명히 실현될 사건이라는 것에 대하여, 두 번째로는 재림의 때,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 인생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재림은 역사 가운데 실현될 사건 우리 시대에 종말에 대한 주제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종말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심판이 극히 비합리적이며 세상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되면 그 죽음을 자기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는 영영 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항상 현재만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현 세상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미래에 있게될 심판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흥미를 끄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세상의 종말은 있고 그때에 우리의 행한 일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과 역사의 종말과 심판을 부인해도 그것은 분명히 역사적인 현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구분하실 것입니다(마25:32). 그 때에 영광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는 대상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심판의 대상에 대하여서 "모든 민족"(마25:32)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도신경에는 "산 자와 죽은 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에 "산 자"는 마지막 날에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을 말하고, "죽은 자"는 마지막 날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모든 신자들까지 다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이나 "산 자와 죽은 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심판은 온 우주적인 것입니다. 이 날에 세상에서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거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날에 심판 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31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여기에 "보좌"라는 말은 왕이 앉는 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 의미는 헬라어 성경의 의미로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기록을 볼 때 예수님께서 만유의 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시며 그 행한 일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세계 역사의 종말에 있을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이 날에 양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부터 계속 약속해 온 그 나라를 상속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되었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주님이 심판 주로 재림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이후에 갑자기 나타난 어떤 개념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이기에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 홀버다(B. Holwerda)는 "성경은 많은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 곧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속사역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구원역사와 세계역사를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역사요 그 역사의 정점에 있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역사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역사관을 믿을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역사관을 받아들이는 참된 신자라면 이 목표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여기에 촛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날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이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2. 재림의 때 그러면 주님은 언제 심판 주로 재림하실까요? 초대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최대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재림의 때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언제 재림하시게 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행1:7)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때와 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말고 현재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되리라"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 존재됨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되리라"는 헬라어 성경에 에세스테(헬. ՅՓՅՓՈՅ, you shall be)라는 말은 미래 직설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전해야 할 책임을 말한다기 보다는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재림의 때에 대하여 물었는데, 그 때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시고 성령이 임하시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와 기한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날이 언제인지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사건들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시간표를 만들?綬?좋아하고 여기에 매력을 가지게 만듭니다. 지난 1992년에 우리 나라 교회를 종말론 홍역을 치르게 하였던 다미선교회의 휴거설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금도 서울역이나 대전역에 가면 여전히 종말과 666에 대한 쪽지들을 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쪽지를 보면 현대세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긴박성을 알리는 징조라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그러한 전단이나 뉴스를 한번씩 읽어본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럽이 통합되는 현상을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현상으로 해석한다든지 컴퓨터의 바(bar) 코드나 신용카드 등은 적그리스도의 인(seal)이라고 하는 해석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단을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면 그 설명들이 기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성도라면 그러한 설명들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놓여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긴박성은 오직 지금의 세계, 즉 20세기 말에만 적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주시는 메세지에 나타나는 긴박감들이 20세기 말에 나타나는 현상들에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방식대로 요한계시록은 당시에 많은 환란과 요한계시록은 핍박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주신 편지인데 그 때 그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특별한 사건들은 언제(when)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what)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언제 일어날지 지정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세상의 형편과 그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므로 세상에서 그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현재 우리 신자의 믿음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는지 알지 못하지만 현재에 하나님 앞에서 제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면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어떤 기준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시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날에 심판하시는 기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존 칼빈(John Calvin)이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성경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그의 행위에 의하여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오실 때에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재림하신 주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는지 마태복음 25:35-36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 말씀에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러한 일을 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행한 일과 동일시하면서 연관시키는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문맥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그리고 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터툴리안(Tertullian)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는 "너희가 너희 형제들을 볼 때 그것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예수님과 동일시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 때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두고 말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주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시면서 "마귀들과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 곳에 들어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입히지 아니 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지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마25:42-43)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지옥에 들어가기로 판정을 받았던 자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25:44)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여기서 "공양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네오(헬. ՄՉՁՊՏՍՅՙ)라는 말인데 "봉사한다," "섬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지옥에 들어간 이유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로 오시는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판단 기준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행위로 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의 내용에 관하여서는 이미 앞에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만 지극히 작은 자에게 봉사하는 행위, 즉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중요성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봉사생활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느냐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세상에서의 봉사생활로 심판의 기준을 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롭게 사는 봉사행위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봉사생활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인간의 선행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만 에베소서 2:8-9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마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편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된 봉사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5-21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나더로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야고보서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4-17)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천국에서 영생하는 축복을 누리는 조건으로 제시된 세상에서의 봉사생활은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봉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봉사가 있을 때 천국에서 영생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문제는 믿음 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 합당한 행실이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한가지 더 생각해야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도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25:44)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들도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봉사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45).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봉사생활은 주님을 섬기듯이 행한 봉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봉사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은 봉사행위 자체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이름이 알려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이익을 위한 봉사라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즉 주님을 섬기듯이 행한 행동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봉사생활은 자신의 이익과 보상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듯이 행하는 사랑의 봉사여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데 주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에서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을 섬기듯이 봉사하며 살아간다면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셔셔 심판하실 것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자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심판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 주로 오시는 날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앞에 서서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이
나라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 눈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겸손함으로 오셨지만, 재림시에는
위엄과 영광 중에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 심판 주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러한 삶이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을 믿는 신자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하는 생활을 산다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산다면 영원한 지옥 형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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