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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과 그리스도인의 삶 살전4:1-12 우리 믿음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도래하였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주님이 심판주로 다시 재림하실 때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지의 문제는 현재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의 문제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윤리적인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특별히 이 윤리적인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요?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 정도로
비추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음을 빛나게 하는 사람들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특별히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라든지, 정직과 성실로 사업에 임하는 일, 검소한 생활방식 등의 삶의 특징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인데, 마게도니아의 수도이며
항구도시에 위치해 있었습니다(행17:1-9). 유럽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곳은 빌립보였고, 데살로니가는 두 번째로 전파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헬라인들, 그 중에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에 머물면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고, 이 교회의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살전3:1-2, 5).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듣고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에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장차 있게 될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문제를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주제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이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이미 가르쳤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가르침에 따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도 행하고 있는 일이고, 계속 힘써야 할 부분이라고 하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살전4:3-8), 두 번째로는 서로 사랑하는 삶(살전4:9-10), 세 번째로는 근면하고 성실한 삶(살전4:11-12)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 순서에 따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룩하고 순결한 삶(살전4:3-8) 바울은 우선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3-8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거룩"이라는 용어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용어를 일반적으로
셈어족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용어가 셈족 기원을 가지고 있다면 "분리"나 "잘라냄"을 표현하는 어근으로부터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람이나 물건을 분리하는데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께 바쳐질만한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인격의
상태가 되는데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룩은 어떤 목적을 위해 분리되는 것과 거룩하신 분에게 바쳐지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의미가 윤리적으로 사용될 때는 세상과 구별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는 말씀의 뜻은 세상과 구별하여 도덕적으로 탁월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생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살전4:3-5)고 하였습니다. "음란함"은 모든 종류의 비합법적인 성관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명하는 방법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은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거나, 아내는
자기 남편이 아니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 결혼 전에 이성간의 관계를 가지는 것, 결혼이라는 테두리 외에 가지는 혼외정사 그리고 동성애
등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참된 신자는 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번역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말입니다. 우리 번역에 "아내"라고 번역된 헬라어 말은 "그릇"(skeuos)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 한글성경처럼 "아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몸"(body)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NIV성경은 이 말을 몸이라고 이해하고, "각각 자기의 몸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each one of you learn to control his own body)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맞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거룩함과
존귀한 방법으로 자기 몸을 잘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자기 몸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몸을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는 안되고 거룩함과 존귀한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살전4:5)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4:6)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경계를 넘어 형제를 나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NIV 성경은
"형제를 나쁘게 하거나 이용해서도 안된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방인과 같이 자신의 색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이용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쾌락의 수단으로 성을 상품화하는 경향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회에서도 이 일들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당시의 이방문화를 잘 이해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미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너희에게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신다"(살전4:6b)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말하고 증거한 것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색욕을 위하여 인간의 성을 상품화하고 윤락행위 하는 모든
것들을 보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행위를 보시고 그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 불신자들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지고 색욕을 이용하여 돈벌이가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종종 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7-8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gar)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덕적으로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언약의 백성들의 특별한 삶을 권면할 때도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함이 없다면 그는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져버리는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거하시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함과 순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2. 서로 사랑하는 삶(살전4:9-10) 바울은 두 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형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주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온 마게도니아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지만 더 많이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제사랑(philadelphia)은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형제 자매가 아니라 믿음으로 형제 자매가 된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롬12:10; 히13:1; 벧전1:22; 벧후1:7).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들은 서로를 믿음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요한1서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1서 3:17에서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형제가 궁핍함 가운데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실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의
태도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에서 요한은 이러한 삶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지 않는 사람으로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된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적절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함에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형제 사랑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3. 근면하고 성실한 삶(살전4:11-12) 바울은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세 번째로는 근면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11-12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데,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말씀도 번역하기도 어렵고 해석하기도 어려운 말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따라 번역한다면 "여러분의 야망을 조용한 생활에 두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망을 조용한 생활에 두어야 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러 화란의 벨드깜프 목사님은 이 말씀을 "정치적인 일에 몰두하지
말고 자기 일에 열심히 하라"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우리 번역은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자기 일에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는 자기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남의 일에 간섭하며 도리어 일만 만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11-12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문맥적으로 볼 때 말만하지 말고
조용히 자기 일에 충실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적으로 볼 때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일하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원래 자기 일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기 좋아하고 일만 만드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헬라 철학에 따라 육체 노동을 싫어하였습니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육체 노동은 자유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노예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육체 노동을 경멸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이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유교 문화에 영향을 받은 우리 나라는 당시의 헬라 세계보다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유익을 위한 수직윤리와 상하윤리를
중요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 나라는 땀흘려 일하는 것을 천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신분사회로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서열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더욱이 땀흘려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유교문화에
대한 비판이 요즘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김경일 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에서 이러한
유교를 가리켜 사회 전체를 병들게 만드는 "시커면 곰팡이"라고 하였고, "사람 잡는 유교"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자기 손으로 땀흘려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오늘날 사기, 공갈, 폭력, 권력 등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은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소리 내어 말만 하지 말고, 조용히 자기 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말로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를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원문의 의미를 애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따라 번역한다면 "외인에게 존경받아야 하고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NIV성경이 원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너희의 일상생활이 외인들의 존경을 받게 하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간혹 오늘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직업을 내 팽개치고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직장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교회 일에만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기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의 일에 성실하십시오. 우리 자신의 일에 부지런히 일하고 성실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신자의 생활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사상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찾을 수 없는 실업상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가 있지만 일을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우리
나라가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부터 우리 나라의 실업자가 180만명으로 늘었습니다. 이 중에 많은 사람은 일자리가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습니다만, 일자리가 있어도 육체적인 노동이 싫어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소위 3D(dirty, dangerous,
difficult)업종의 일은 사람들이 없어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등에서 사람들을 데려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자리를 얻기를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육체로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 사회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 하고, 국가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이 편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먼저 그의 삶이 거룩하고 순결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리고 근면하고 성실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특히 도덕적인 올바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얼마전 우리 나라의 통계청이 한 자료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여섯 개 광역시의 기독교
신자 인구 비율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서울의 경우 가장 높은 지역은 강남구로서 30.4%였고, 가장 낮은 지역은 성동구로서 21.5%였습니다.
인천은 옹진군이 35.5%로 가장 높았고, 동구는 22.8%로 가장 낮았습니다. 그리고 대전의 경우 유성구가 24.1%로 가장 높았고, 동구의
경우 18.0%로 가장 낮았습니다. 대구는 수성구가 14.1%로 가장 높았고, 서구 9.1%로 가장 낮았습니다. 부산은 수영구가 13.1%로
가장 높았고, 서구로 9.1%로 가장 낮았습니다. 광주는 남구가 23.4%로 가장 높았고, 동구가 20.8%로 가장 낮았습니다(국민일보
1999년 3월 23일자). 여기서 우리는 신자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더 도덕적인 수준이 높은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될 때는 대단히
회의적입니다. 서울의 강남구의 경우 우리 나라의 지도층 인사가 다 모여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다 모여 있으며, 술집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유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공동체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방식이 세상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재림을 준비하는 삶이며,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거룩하고 순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고, 직장에서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없다면 과연 그 안에 거룩케 하시는 성령님이 내주해 계시는지를 먼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의 삶은 올바른 윤리생활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생활로, 그리고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잠시 잠깐 어렵고 힘든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주님이 영광중에 재림하셔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주시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소망을 가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좇지 않게 하시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우리 몸을 통제하여 거룩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자들을 먼저 사랑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며, 그들이 굶주리거나 아파할 때 행동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이게 하옵소서. 말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러한 삶을 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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