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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파하라 딤후4:1-5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리고 역시 적극적으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복음에 대한 정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4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이 특별히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이나 혈통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없이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여
세우시고 이들을 통하여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신 말씀처럼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함께 해 주셔서 믿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들 이후에
사도들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성령이 임하여
내주하시는 교회는 모두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성령께서 믿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요 복음전도자인 존 스토트 목사님은 「전도하지 않는 죄」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신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됨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고,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신자는
항상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두 번째로는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세 번째로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상황은 어떤가 하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하기 전에 먼저 이 명령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누가 이 명령을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1에서 명령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우리가 생각할 때 그냥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면 될 것같은데, 장황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명령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옮기면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엄히 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그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이루심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재림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사도 바울 개인의 명령이 아니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성격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가장 중요한 동기입니다. 2.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디모데후서 4:2에서 복음전파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와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 절에 복음전파와 관련하여 다섯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전파하라(ՊՇՑՕՎՏՍ, proclaim). 2. 항상
힘쓰라(ՅՐՉ-ՓՔՇՈՉ, stand by). 3. 경책하라(ՅՋՅՃՎՏՍ, convict), 4. 경계하라(ՅՐՉ-ՔՉՌՇՓՏՍ,
rebuke), 5. 권하라(ՐՁՑՁ-ՊՁՋՅՓՏՍ, encourage)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전파에 대한 명령을 이러한 다섯 개의 동사로
표현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지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개의 동사는 어떤 논리적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전파하라"는 동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하는 일반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동사 "항상 힘쓰라"고 하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부터 나오는 동사는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을 세우는 방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명하여 확신시키고, 이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도록 책망도 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항상 힘쓰라"는 동사는 헬라어 성경의 의미는 "곁에 서 있다," "대기하다," "준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절박성이나 긴급성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러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하였습니다. "복음을 맡은 우리 신자들은 사람들의 생사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절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새벽마다 엎드리고, 때로는 철야하면서
눈물로 호소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동사를 설명하고 있는 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고 하는 말을 유의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항상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전할까요? 이 본문에서는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경책하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엘렝코우(ՅՋՅՃՙ)라는 말인데, 충고하고 권한다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증명하고 확신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계하라"는 말은 책망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권하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데 헬라어 성경에
파라카레오(ՐՁՑՁ-ՊՁՋՅՙ)라는 말인데, "옆에서 위로하고 돕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우리가 믿는 복음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확신시키는 일과 함께 때로 책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이 일을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문제는 단순하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문제가 절박성을 띠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즉시 "결단"을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우리가 인내하면서 신실하게 복음을 전파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성령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오래 참고 기도하면서, 그리고 위로하고 도우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가르침"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디다케이(ՄՉՄՁՇ)라는 말인데 "교훈적이고 지성적인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경험에 호소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병이 나았다든지, 마음에 기쁨이 찾아온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지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3. 복음을 전파해야 할 상황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디모데후서 4:3-4에 나타나 있는데,
복음을 전파해야 할 상황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왜냐하면"(ՃՁՑ, For NIV)이라고 하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범사에 오래 참고 가르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지적해 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의 유익과 허탄한 이야기를 좇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기의 사욕을 추구하기 위하여 스승을 둔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교역자를 선택할 때 몇 몇 사람들의 선호와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고른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업도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교수들에게 돈을 주면서 언론에 글을 싣게 하려 여론을 만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상황은 계속 어렵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러한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듣고
싶은 것을 먼저 결정한 다음에 자신의 노선을 따를 선생들을 고른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성향을
합리화해 주고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교회를 찾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직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는지 두 가지를
디모데후서 4:5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서 두
가지는 첫 번째로는 근신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신하라"(ՍՇՖՅ)는 말은 원문은
"냉정하라"고 하는 뜻인데, 침착하게 사리를 잘 분별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NIV는 이 말을 "침착하라"(keep your head)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의미를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가치관에 입각한 세상의 풍조들과 세상의 사조들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이단들도 일어나고 있고, 진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근거를
둔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교회를 혼돈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기독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기 때문에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사람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우리 종교의 우월성을 극화하기 위한 신화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신학사조들을 이성적으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상황이 우리의 의식구조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자기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든지 바른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 항상 도전을 받았고, 고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존 위클리프나 얀 후스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안이숙 선생님 같은 분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전파한다는 이유로 형장으로 끌려가기도 하였고,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초대교회나 우리 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의 상황처럼 죽는 일은 없다고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불이익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통하여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부모님이나 목사님이나 친구들, 또는 직장이나 학교의 친구들이나
선후배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도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서부터
사도들과 그들로부터 들었던 신실한 증인들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일에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하여 로마서 10:13-14에서 아주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말씀을 바꾸어서 말하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으며,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 진리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부르시는 방법은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통해서입니다. 과거에 많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받기도 하였고, 심지어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전파의
역사는 순탄한 길만 걸은 것이 아니고 고난과 인내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 복음전파의 대열에 서 있습니다. 과거에 많은 성도들과
순교자들은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 시대에 복음전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어떤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그 책임이 면제될 수 없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범사에(모든 상황 가운데서)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우리 복음을 확신시키고, 때로는 책망하며, 때로는
권면하고 위로하고 돌보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신학사조가 교회 안에 들어와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고, 또한 사람들은 저마다
바른 교훈을 받기보다는 자기의 사욕을 좇아 자기의 거짓말과 위선을 합리화하고 변증해 줄 교사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복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허탄한 이야기를 찾아다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심지어 고난을
받을 각오까지 하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파할 때 때로는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 낙망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 하나님의 택한 자라면 성령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열매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짧은 생애를 불같이 살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 보면 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을 때 …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외적인 의무를 양심적으로
이행하였다. 술 마시는 일을 그리고 윤리적인 규범을 엄격하게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인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치거나 또한 불필요한 악습을 파헤쳐서 잘못을 지적해 준 것도 아니었다. 이곳 인디언들에게 설교할 때 역점을 두어 가르친 것은 … 은혜롭고
특이한 교리였다. 이 교리들은 피조물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특이한 교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말합니다. 이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달라지면 그 사람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의식구조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미국에서 발행되는 유명한 기독교 저널 Christianity Today의 객원편집장으로 있었던 필립 얀시 박사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은 도덕이 아니라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의 존재목적은 도덕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도덕은 무엇입니까? 도덕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의식이 달라지고, 그 결과 사회가 달라지며, 문화가
달라져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복음을 알게 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영광의 복음을 받은 자로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즐겁게 순종할 수 있게 하옵소서.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시대적인 상황이 자기의 사욕을 정당화하고 변호해 주는 스승을 찾거나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고 할지라도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확신시키고, 위로하고, 도울 수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이 달라져 가고, 우리 사회와 문화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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