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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라
히5:11-14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항상 세 가지 철학적 질문(세계나 인생에 대한 관점)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세
가지 철학적 질문이란 첫 번째로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존재였지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받은 존재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에는 "나는 구원받은 존재로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나는 나의 하나님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하늘나라로 간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질문을 하면서 살게 될 때 세상의
사람과는 분명 구별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우리 믿음생활에 큰 진보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철학적 질문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의했지만
우리가 믿는 믿음의 체계에 따라 분류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죄와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왜 오셨으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 회개와 믿음은 무엇인가, 성화와 선한 행위는 무엇이며, 교회는 무엇이며, 마지막에는 우리가 어떻게 되고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분이 참된 신자라면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들은 우리가 믿어야 할 근본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내용들을 구체적인 말로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연하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섬기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미있는 삶으로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신앙체계가
사변적인 이론에만 머물고 삶에는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믿음의 초보단계를 벗어나 장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단계까지 자라는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좀 더 분명하게 연구하기 위하여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구조에 따라 첫 번째로는 당시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두 번째로는 믿음이 자라지 않는 원인이 무엇이며, 세 번째로는 믿음이
자라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당시 교회의 영적 상태 당시 교회가 외부적으로 많은 환란과 핍박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자 사람들은 점차 기독교신앙에서 떠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히브리서 자자는 우리가 믿는 바를 확신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을 미혹하는 악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히브리서 전체 문맥 속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3:12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이나 여러 영어 성경에서도 문단을 구분하여 큰 주제를 뽑아 놓을 때 대개의 책들이 히브리서
5:11-6:20을 "배교에 대한 경고"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여러 가지 배교의 위험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확신시키고 위해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심으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다가 히브리서 5:11-12에서
믿음의 초보도 모른다고 이렇게 책망하였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그러다가 히브리서 저자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은 히브리서 6:4-8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은사에 참예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당시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고 싶지만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에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듣는 것이 둔하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해력과 깨달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설명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말씀이나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개념이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될까요? 청각장애자이기 때문에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태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암시를 받을 수 있는 구절이 히브리서 6:12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면 히브리인 성도들이 배우는 일에 태만하여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느 정도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지 세월이 많이 지나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할 연륜인데 여전히 말씀의 초보, 즉 ABC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NIV성경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인
진리"(the elementary truths of God's word)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서 6:1-2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초보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 믿는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지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쓸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교회는 이러한 지식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히브리인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믿음의 초보적인
진리, 믿음의 ABC도 몰랐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신앙형편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 믿음의 체계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세월이 흘러 마땅히 자신이 그 진리에 따라 살며, 그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할텐데 여전히 믿음의
초보도 몰라 누구에게 배워야 할 상태는 아닙니까? 이젠 진리의 말씀을 알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할 때인데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이 일은 그가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닌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는다면 당시 히브리인 성도들처럼 모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목사의 가정에서, 또는 장로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지라도 말씀의 초보를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의 초보를 모르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어떨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상태를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영적인 상태를 사람이 음식물을 섭취하는 단계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가만히 보면 젖을 먹는 상태는 어린아이들이라고 말하고,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린아이가 좋은 의미로 사용된 곳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어린아이들의 단순성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쁘게 사용된 데도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정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본문에서 사용하는
어린아이와 이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같이 분별력이 없고 무지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인 성도들의 신앙의
형편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같이 믿음의 초보도 몰랐습니다. 2. 믿음이 자라지 못한 원인 그러면 왜 이들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13절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gar)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지 못한 원인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험하지 못했다"(a-peiros)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여기에만 나타나는 단어인데 "훈련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이것은 당시의 히브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무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태만과 무관심으로 그 말씀에 따라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의 맛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당시 히브리인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지 못한 원인입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있어서 말씀을 경험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믿음의 간구는 역사하는 일이 많다는 말씀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말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말씀을 경험한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우리가 복잡한 인간관계나 사업상의
어려운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말씀과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읽고 묵상할 때 말씀의
맛을 느끼고 아주 신비로운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시편 19:1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인간 세상에서 예나 지금이나 금을 귀중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금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러한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맛에 대하여 말하기를 꿀, 그 가운데 송이꿀(벌집에서 뚝뚝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특별한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이 맛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체험이 없으면 항상 말씀을 배우나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히브리인 성도나 오늘날의 성도가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원인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자라는 방법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이 자라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그 방법을 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어린아이는 우유 맛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우유 외에 다른 맛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점차적으로 우유를 먹지
않고 단단한 음식을 먹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자라면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상태로 자라나기 시작하여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의 맛을 경험하고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자라게 할 수 있을까요? 이 본문에 보면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의 지각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각(aisthētērion)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의 의미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faculty)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지각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력과 지적인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잘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연단을 받다"는 이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김나조우(gymnazō)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체나 정신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독일어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김나지움(Gymnasium)이라는 말인데, 독일에서 김나지움라고 할 때 체력을 단련하는 체육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훈련을 할까요? 그것은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타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사용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아주 의미있는 단어인데, "몸에 배이게"(dia tēn
hexin, by habit)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이러한 단계들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알아야 하지만, 단순히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타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청교도 학자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장성한 신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읽으면 저절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저절로 이해된다면 구약시대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제사장이나 서기관,
선지자, 신약시대에는 목사와 교사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faculty)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해한 말씀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계속 반복하여 훈련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일에 지적인 훈련을 받는 일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역사하기만 하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탄적인 발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더 설명하고 싶지만 기본적인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더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자세히
검토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교리 내용을 생활 속에 습관적으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훈련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다른 사람을 섬기는 훈련,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훈련,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하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고 있는 제럴드 코리(Gerald
Corey) 박사가 쓴 「카운슬링과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Theory and Practice of
Counseling and Psychotherapy)라는 책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코리 박사는 우리에게 훈련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많은 임상결과를 통하여 밝혔습니다. 코리 박사는 이 책에서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진다고 하여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오랜 기간 훈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건전한 생각과 좋은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따라 훈련하지 않으면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 훈련이 얼마나 필요한 대목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성경에 관한 교리내용을 지적으로 아무리 잘 훈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실제 생활에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교리가 우리 몸에 배이도록 하기 위하여 반복하여 훈련해야 합니다. 이렇게 훈련할
때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있다고 하면서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면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교회에 다닌 연륜은 오래 되었어도 말씀의 초보적인 지식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까지 말씀의 맛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배우고, 그 말씀이 몸에 배이도록 잘 훈련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절대로
믿음의 진보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모르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맛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말씀의 맛을 알고, 감동을 느끼며, 그 말씀을 생활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진보를 보이기 위하여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몸에 배이도록 훈련하십시오. 이 일을 통하여
믿음생활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십시오. (우리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중요한 교리만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초보적인 진리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우리는 교회에 다닌 연륜은 오래 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어야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배워야 할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지각과 이해력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우리 몸에 배이도록 훈련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믿음의 초보단계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말씀을 연구하고 생활 속에 적용함으로 말씀의 맛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믿음의 분명한 진보가 있게 하옵소서. 우리 주변의 상황이나 미혹하는 자들에 의해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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