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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교제의 중요성

고전12:12-27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에 따라 처신하고 있 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솔직하게 회의적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인간적인 유대로 결속되어 일종의 이익공동체와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목적에 따라 기능하지 않고 순전히 교파주의나 제도화된 구조로서만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파주의나 제도화된 교회를 반대하고 완전히 비구조적인 형태의 체제로 나가는 집단들도 요즘 들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바이블 칼리지(Bible College)의 학장으로 있었던 마이클 그리피스(Michael Griffiths)는 그의 책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Cindereella with Amnesia)라는 책에서 현대교회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듯하다. 상당수의 교인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매 주일마다 그들은 독특한 건물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석하며 예로부터 지켜 오던 익숙한 예배 의식은 행하지만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잊어버린 데서 오는 한 결과인데, 오늘날 거의 보편화된 현상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에 짧지만 포괄적으로 교회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에 대한 고백이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연구한 "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의 중요성을 믿습니다"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나는 성도들이 교제하는 일의 중요성을 믿습니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우리 번역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따로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의 내용입니다. 두 가지가 다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앞부분이 교회의 특성과 역할에 관한 것이라면, 뒷부분은 교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뒷부분에 있는 성도들과 서로 교제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성도의 교제의 의미, 두 번째로는 교제의 기초, 세 번째로는 교제의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도의 교제의 의미

우리 사도신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나는 성도들의 교제의 중요성을 믿습니다"라고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교통이나 교제는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번역에 있는 것처럼 "서로"라는 말 때문에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로만 제한하여 생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문은 이 "서로"라는 말이 없습니다. 원문은 성도들 간의 교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어떤 것을 두고 말할까요? 인간적으로 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서로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는 사교모임이나 친목회 정도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부분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유대는 인간적인 끈이 끊어지면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100가지를 잘해주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한 두 가지를 들어주지 못하면 원수관계로 발전합니다. 결혼을 할 때까지 한 가족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형제들이 어쩌면 너무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들, 예를 들면 재산상의 문제나, 의견의 불일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문제들로 인하여 원수관계로 발전하는 사례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상에 속한 인간관계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순한 교우관계나, 함께 모여서 즐기는 친교모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제"라는 말은 오늘날 교회에서 아주 인?袖獵?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데, 코이 노니아(헬. ՊՏՉՍՙՍՉՁ)라는 말의 번 역입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처럼 다양하게 쓰이는 말은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鳧岵막?교제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고, 그 외에 나눈다, 사귄다, 참여한다, 협력한다는 말로도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구와 교제하며 나누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 점에 대하여 우리 교회역사에서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두 개의 중요한 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고,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5문에서 성도의 교제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첫 번째로는 믿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부유함과 은사들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다. 두 번째로는 각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신속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그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6장에서 아주 폭넓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1항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연합되어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의 은혜와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영광 안에서 그와 교제를 갖는다. 그리고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서로 연합되어 있는 까닭에 각자가 받은 은사와 은혜 안에서 교제한다. 또한 피차 덕을 세워 사람에게 안팍으로 유익하게 하는 의무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문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 이해한 것을 보면 1차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말하고, 또한 그 교제에서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종의 다이어그램(diagram)으로 그린다면 하나님과 나와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를 세 꼭지점으로 표현하고, 그 사이를 두 개의 화살표를 교차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모두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은 은혜들을 성도들과 관계하며 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성도의 교제의 기초

그러면 어떤 기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배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이 관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2-13에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과, 역시 다른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고 하는 말을 유의해 보십시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한 몸이지만 여러 지체들이 있고, 또한 여러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13절에서 설명하기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라는 말자체는 일반적으로 "씻는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담근다," "하나가 되게 한다"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은혜 교회"(Grace Community)의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 말을 "하나님의 성령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마신다"라는 말은 "흡수한다," "전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은 한 성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로마서 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은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었고, 또한 한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라는 말씀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인종적인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와 같은 사회적인 차별이 없이 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또한 다 같이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보편적 교회의 중요성에 대하여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인종이나 성별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에 따라 서로 선을 그어서 차별을 두기를 좋아하지만 성령은 이러한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어떤 인종이나, 어떤 사회적인 신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또한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울은 에베소서 4:3에서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거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성도의 교제라고 할 때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교제합니다. 왜냐하면 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고, 또한 동일한 한 성령이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들의 교제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교제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일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거나, 동일한 지식 정도나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나타나는 끼리끼리의 교제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고, 모두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가지는 것입니다.

3. 성도의 교제의 방법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다른 사람과도 교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제할 수 있을까요? 방법적인 문제에 대하여서는 성도들 간의 교제에 제한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열 각도에서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을 비교하지 말라

우리가 받은 은사들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특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8-10에 묘사된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을 분별함, 각종 방언 등이 있습니다. 로마서 12:6-8에서는 모두 일곱 가지의 은사들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하는 일, 구제,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이러한 은사들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나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은사들을 자기의 능력의 결과로 알고 자랑하고 교만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개 믿음생활을 잘한다고 하면서 교회 성도간의 관계가 좋지 못한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신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대개 신자들이 다툼이 생기는 이유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도들 간의 비교의식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학식이나 여러 가지 받은 은사가 많으면 교만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상대적으로 열등감이 생겨서 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것을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12:3에 보면 성도 상호 간에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주된 이유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은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각 사람들에게 모두 그리스도 안에 연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다양성을 인식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이나 상대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말고,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모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사용하여야 할까요? 로마서 12:4-5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역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27까지 몸의 각 지체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사용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각 지체가 몸에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고전12:14-20). 두 번째 원리는 고유한 기능들이 다양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12:19-20). 세 번째 원리는 첫 번째 원리와 두 번째 원리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호 유익을 위하여 지체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같이 하여 서로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12:25)라는 말씀과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는 말씀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성도들이 같은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차이들은 몸의 연합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하여 서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은사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몸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며, 각각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제가 "눈이 중요합니까? 귀가 중요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2:17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라고 말합니다. 각 은사가 몸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때문에 서로 비교하여 시기나 질투해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대중의 눈에 드러나는 은사를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기능을 발휘하는 은사들이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고전12:22-23).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5-2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받는 은사들을 서로 비교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2) 받은 은사들을 서로를 위해 봉사하라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은사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 은사들은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하는 일, 구제,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돕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가서 누군가를 도와야 합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교회에서 어린이나 학생들, 또는 대학부를 가르쳐야 합니다. 전도의 은사를 사지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소위 드러나는 은사들을 가지지 못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시골의 어떤 교회에 있을 때 항상 교회를 청소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많이 배운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오랫동안 궁리하다가 청소하는 일을 하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이 아닙니다만 그 분은 참 즐겁게 그 일을 하였습니다. 또 부산에서 섬길 때 경험한 일입니다. 한 장로님은 나이가 들어 공직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들어 더 이상 다른 봉사를 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새벽기도회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교회가 성도들과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우리가 받은 은사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기도하고 노력하십시오. 존 맥아더 목사님도 주님의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구하라고 하였고,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나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분명히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참된 성도라면 교회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하려는 열망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하다 보면 분명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받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5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각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신속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6장에서 "…각자가 받은 은사와 은혜 안에서 교제한다. 또한 피차 덕을 세워 사람에게 안팍으로 유익하게 하는 의무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또 하나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한1서 4:11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자라고 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그는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을 서로를 위해 서로 봉사하십시오. 이것이 성도들이 교제하는 방법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은 이러한 현대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고독한 군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현대인에 대한 아주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살고 있지도 않고, 많은 무리들 가운데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고독하다는 표현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동정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같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고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오래 전에 한 신문을 보면서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한 말을 인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드골이 한 말은 "사람을 알게 될수록 더욱 개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드골의 말은 우리 나라의 개문화라는 것은 보신탕을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프랑스인의 개문화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를 이해하고 드골의 말을 음미해 보면 사람들을 알고 교제하면 실망하게 되지만 오히려 개들이 낫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사에서 점차적으로 끼리끼리, 이익집단끼리는 잘 어울리지만 서로를 돌아보고 봉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을 서로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의 중요성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 가족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생활방식 가운데 한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모두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서로에게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들과도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각자는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하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돌아보고 협력하고 봉사해야 할 관계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기뻐하고, 또 한 지체가 영광을 받고 기뻐하면 배가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한 한 가족공동체요 서로를 위해 봉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나누고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도 상호간의 교제를 통하여 주시는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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