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위해 사는 법

본문: 디모데전서 6장 17절 – 19절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I. 주님을 위한 삶에 힘써라

 

아침에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어디까지 사랑하셨는가 이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모든 내용의 결과들을 바로 깨달은 사도 바울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 바울 사도를 끄는 힘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하게 끌고 역사함으로 그기에 끌림바 되는 것을 증거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시고 부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게 해 주신 이 지극히 크고 놀라운 사랑, 언뜻 잘못 보면 무거운 짐이 되어지는 것 같이 오해 하기 쉬우나 실은 우리 인류시조 아담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짐으로 우리는 일생 나를 위하여 성공하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완전 사망을 달성하는 것 외에는 없는 우리들인데 전지자 전능자 완전자시며 사랑이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신 내가 살아갈 내 법,

 

가장 내가 자유 할 수 있고 내가 주를 위하여 삶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지극히 적은 존재요 자본이라 할 수 있는 길어야 백년 내외, 모든 면에 너무 제한되고 유한된 나라는 자본을 가지고 이것 가지고 나 위해 삶으로 완전히 사망을 이루는 저와 우리들인데 이제는 사망법으로 살지 않고 주를 위하는 생명법으로 나를 사용함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와 그것들이 가진 모든 하나님 실력과 역사들은 나 하나를 위하여 모든 것이 역사 되어지도록 할 수 있는 생명 법으로 살 수 있는 우리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고, 이제는 우리는 나위해서 밖에는 살 수 없던 우리가 생명의 법으로 나 같은 존재가 주를 위해서 삶으로 나를 위하여 존재되며 역사 될 수 있도록 해 주신 이 놀라운 사랑, 지극히 큰 은혜를 바로 깨달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 도다.

 

이와 같이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들,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다. 나는 영생 법을 가졌다. 하나님이 주신 유한된 장소에서 유한된 기간에 살면, 영원 세계에서 무한의 공간에서 무한의 존재들의 사모의 대상이 되며 존경의 대상이 되며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존재들에게 주라 시인함을 받은 것 같이 이 사람으로 이 생애를 살아 갈 수 있는 우리도 이해하고 살아 갈 수 있는 이 깨달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 어는 공간에 가든지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주님이 죽어 주시고 부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는 연습을 하기 바랍니다.

 

어떤 입장에 세우든지, 낮고 높은 좋고 나쁜 다양한 현실이다. 이것은 벗어나야겠다. 60억 인구가 넘는 모든 사람들이 사는 형편이 각각이고, 지금껏 벗어나려고 하고 잡아 두려고 하는 수 많은 현실들이 있는데 근본을 바로 이해하고 보면 꼭 같은 가치가 더 있고 없는 것이 아니고 실패의 자리나 존영의 자리나 동일한 주를 위할 수 있는 주 위하는 데는 꼭 같은 현실이라는 것을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입장이든지, 우리 나라 서울은 부산 서만 갈 수 있어요 광주서만 갈수 있어요? 예컨데 꼭 이렇습니다. 다니엘 같이 존귀한 자리에서도 요셉이 종으로 팔리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입장에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로만 사랑의 주님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이 노선에서 입장에서 걸어가면 동일한 가치가 있지 더하거나 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닥치는 누구 위해서 살았습니까? 자기. 이것이 사망 법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구출 해 주셨습니다 주를 위해서 살 수 있는 자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II. 가치 있는 삶의 순서

 

i.  돈 위해 사는 것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 수 있는 돈 닥치면 무슨 사업을 하든지, 생산업, 운반업, 그기에서 어떤 사람은 돈 수입에서 돈 위해서 사는 사람 있습니다. 밤낮 돈, 돈, 어떤 사람은 돈 보다는 일을 바로 해 볼꼬, 어떻게 하면 내가 맡은 일을 옳고 바르고 참되게 해 볼꼬 하는 이 수준에서 내가 돈돈돈 한다고 다른 사람도 그기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보다 좀 나은 사람은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 생각하지 않고, 공해를 유발한다든지,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 가야지 하고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ii.  일과 사람 위해 사는 것

 

그러면, 돈, 돈 위해서 사는 사람이 큰 돈 벌고 많이 벌겠습니까? 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돈도 많이 벌고 장구하게 가겠습니까? 일을 위해 사는 사람은 당장은 좀 더뎌도 견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보다 사람을 아끼는 사람은 일도 잘하고 돈벌이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집니다.

 

자기라는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대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 이상은 없습니다. 칭송 받을 만한 사람이요 성공할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iii.  주를 위해 사는 것

 

가.  각오와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는 못 살았다고 해도 지금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사는 자로 출발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하 사람을 위하여 사는 사람보다 더 탁월한 사람이요,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를 만들어 주신 이 은혜가 감사가 됩니까 이 사랑이 나를 끄는 힘이 생겨 이 사랑에게 끌려 가고픈 소원이 생겨 집니까 얼마나 복 있는 사람입니까 이제는 사람 다운 사람, 참 사람, 영생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참 사람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앞선 종들의 증거대로 영은 완성되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우리의 심신도 되었습니다마는 우리의 마음과 몸이 주를 위하는 마음과 몸이 되도록 연습해나가야 합니다.

 

결심만 한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운전하는 것도 기술 서적을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좋습니다. 몸으로 자기가 연습하지 않으면 자기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넘어져도 일어 설 수 있도록 체휼하시는 하나님께서 너는 한번 실수로 끝이다 했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일어서라 그러면 희망이 있다. 실수와 죄 짓는 것보다도 더 나쁜 것이 낙망하는 것, 낙심하는 것,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이 뭘해 하는 것입니다.

 

담대가 있어야 합니다. 실수 해도 또 해보자. 로마서 7장 21절에서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누구의 탄식입니까? 사도 바울 그 유명한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사도 바울의 탄식입니다. 가히 절망적입니다.

 

디모데 후서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 바울도 당장 우리가 존경하는 사모하는 이런 분 된 것 아닙니다. 그 분도 남이 모르는 가운데 우리 같은 나타난 외형의 실수는 없었다 해도 주님이 볼 때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지 이렇게 탄식하면서 그러나 이 싸움을 계속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로마서 7장도 디모데 후서의 기록도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 직전에 당면되 그 시간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연습하고 연습해서 나 위해서 사는 것, 선 한 싸움, 선은 하나님 중심, 일만 닥치는 이것을 부지런히 싸워서 주만 위하는 싸움의 승리자가 되었다. 우리도 이럴 수 있는 마지막 주님 앞에 설 임종의 때가 되면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 동일한 선상에 있다.

 

우리가 어떤 성공의 자리에서도 좀 쉬어 가자 할 것이 아니고 성공의 입장에서도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주님을 위할고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당하는 여기에서도 주를 위할 수 있으니 여기서도 주를 위하는 내가 되어야지 나를 위하느냐 주님을 위하느냐 하는 것을 계속하는 이제는 반 타작이나 하다가 50%, 또 탄식하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하여서, 이제는 60대 40, 90대 10. 99:1 이제는 마지막에는 무엇을 닥쳐도 익숙해서 능란해서, 아마추어가 있고 프로가 있습니다.

 

프로급 중에서도 또 다릅니다. 이와 같이 반복 반복해서 연습함으로 숨 들이시면 내어 시는 것은 본능적으로 되듯이 어데서든지 주님을 위하는 이 사람으로 자라 갈 수 있습니다. 있으니 희망자 아닙니까?

 

나.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함으로

 

주를 위해야지, 나는 주의 피로 말미암아 주위 할 수 있는 자로 되었으니 하는 것을 한 번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일어섭시다. 또 일어서면 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운동장에서 다 달아나도 상 얻는 자는 하나 뿐이라. 이등, 삼등상은 없어요. 내 앞에 내 앞서 상 얻는 사람은 하나뿐이라.

 

이제 사도 바울은 달려 갈 길을 다 달렸다. 우리는 달려갈 목표가 주님입니다. 주님 위하면 이 일이 요 일을 완성했다. 내가 갈 길을 다 달렸다.

 

어디서든지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바로 알아서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그 뜻대로 순종한 것이 믿음인데 우리도 이 소망을 가지고 세상살이를 살아 가봅시다. 이것이 참 가치 있는 것입니다. 유한된 시간을 가지고 영원을 마련할 수 있는 얼마나 수지 맞는 생활입니까?

 

나 하나라는 지극히 적은 존재 가지고 내가 주님 위할 때에 나를 사랑하거든 내가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해 다오 하는 주님 사랑함으로 모든 이웃을 위하는, 우리가 만나 봐야 얼마나 만나고 갑니까? 여러분들 소수의 사람을 만나도 주님이 원하는 대로 형제에게 한 것이라면 모든 인류에게 한 것과 동일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의 정성과 그의 인격이 사람을 사랑함으로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 우리 하나님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므로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불충성이라하지 않고 불의한 자는 한 것은, 충성이라는 것은 자기를 세운 자의 뜻대로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된 자는 그 충성은 주님에게 대함이니 내 있는 힘 다한 다고 충성이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다음 연결을 보니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듯을 바로 찾아 한 것이요, 불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생명 바쳐 해도 충성이 아니라.

 

적은 것에 네 마음대로 한 자는 큰 것에도 앞을 연결 시키면 불의가 되는 것이다. 불충이다 그말입니다.

 

세상 일은 거리에 미화원 우리 아버지 시청 다닌다. 세상에서는 미화원으로 청소 잘한다고 시장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안되요 안되 그런데 주님은 미화원 잘하면 시장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된다 말입니다. 자 그러면 많은 것 복잡한 것, 그러니까 여러분들 돈 적다고 걱정 할 필요 없어요 많은데서 합격한 것이나 적은 것에 합격한 것이나 같습니다.

 

적은데 충성된 자는 큰 것에 충성된 자로 됩니다. 목동 양치는 것은 적은 일 중에 적은 일이라. 목동에서 양치는 일을 잘하여 사도 행전 13장에 보니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다윗을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겠다. 우리 성도에게는 가능이 아니라 유일한 길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보편적이 일입니다.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III. 충성하는 법

 

i.  성령 음성 듣는 연습에 힘써라

 

그러면 충성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극히 적은 것에 불의하지 않는 자는 적은 것, 천한 것, 약한 것, 쉬운 것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주님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위하는 것입니다.

 

그 장소 그 입장 형편에서 세상 법칙에서 과학이나 논리나 통계를 따르지 아니하고 눈을 뜨든지 감든지 산 기도를 하든지 철야를 하든지 하나님이여 내게 이런 일이 닥쳤는데 내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밥 먹는 것 수 십년씩 해 왔습니다. 잘 먹는 것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이 밥을 나위해서 먹을 수 있고, 먹는 것이 소찬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어도 주님을 위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찾는 이 일을 위해서 고민하고 주님의 뜻을 찾아 이해관계를 불문하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해도 무조건 알려 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하려 하면 이해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미룹니다.

 

절기의 기름이 남았으면 경제성으로 보면 먹어야 경제성인데, 배고플 때 부지갱이 가지고 개 겁질타는 냄새만 나도 훨씬 낳습니다.

 

여러분들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되다 그기에서 하나님의 뜻 찾는 뜻 찾아서 순종해 나가는 이 연습이 되면 지도자가 누구지요, 가르치는 분이 누구지요 내가 지도 받는 상대 지도해 주는 분이 누구지요? 우리는 누구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며 살기를 노래 합니까 하나님 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은 전지자 입니다. 전능자입니다. 모든 것의 통치자 맞습니까?

 

우리 주님 전지자시고 전능자신 그분이 가르치는 대로 아는 연습을 하고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는 그 말씀을 듣는 귀를 만들어요, 중국 사람하고 나와 대화 하려면 중간에 통역자 없으면 중국말 들을 수 있는 귀를 만들면 됩니다. 영어 듣는 귀를 만들면 됩니다.

 

전지자 하나님에게 배우면 그분이 말씀하고 가르쳐 주는 음성만 만들어 놓으면 그 분은 얼마든지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공의 첩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별의 별 지식, 기능을 만들어야 하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만 복잡한 때에든지 평안할 때나 그분이 만들 수 있는 귀만 만들면 됩니다.

 

요것만 만들면 그분이 쉬운데서 어디서든지 시키는대로 순종만하면 다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육의 아버지고 감당 못할 아들에게는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시킬까요

 

언제든지 못하려는 것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주님의 형상대로 닮아 가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요것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지 못해서, 이제 주님이 명령하는 것이면 순종하는 것만 연습해요, 처음부터 어려운 것 안 시킵니다.

 

요셉을 막바로 열 일곱살 때 애굽의 총리로 세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려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섰으면 행복이라요 불행이라요, 큰데서 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내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사울의 갑옷을 다윗에게는 안 맞아요, 하나님은 지혜롭습니다.

 

이러니 이제는 듣는 귀만 키워요. 주님이 말씀하는 그 말씀을 듣는 귀, 자기 아버지 소리는 아들 소리는 아무리 복잡해도 잘 드러내지요, 왜 아버지 음성을 듣는 귀가 연습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 다양한 소리가 있는 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기릅시다. 아버지 소리를 구별 못하는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얼마나 탄식이겠습니가?

 

이제 어디서든지 주님이 말씀하는 귀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나대로는 착한 양심, 선한 양심이 주를 향하여 찾아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별의 별 욕심을 가지고는 아무리 귀를 열어 들을려고 해도 안들립니다.

 

ii.  성경대로의 지식을 만들어라

 

성경대로 된 지식으로의 자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라는 사람을 선한 양심으로 만들어야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안 할 말 했다고 하면 안할 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기도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감감하게 멀어서 기도가 잘 안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티웁니까? 주님의 대속을 입히고 하는 가운데서 원 상태로 회복이 됩니다. 성경대로의 내 자세가 되어 집니다. 이러면 주님의 음성이 들려 집니다.

 

하늘나라에는 소리가 필요 없어요 말이 필요 없어요. 머리가 건지럽다는 것을 손아 긁어라 합니까? 말이 없어도 통해서 긁어 줍니다. 하늘나라는 한 생명, 지식으로 단일이 된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보다 더 완벽한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런 완전 단일의 나라입니다.

 

소리 없어도 주님이 내게 대해서 원하는 것도 들을 수 있고, 싫어하는 것도 들을 수 있고 그 음성 잘 듣는 사람이 주님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더 주님을 위하는 자는 무엇이 막아도 막히지 않는 순종이 되어지는, 마택복음 16장에 누가 가르쳐 주었어요 많은 제자들 중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그 음성을 듣는 귀를 가졌습니다. 들어 배웠습니다. 평소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인격의 귀가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서기관들이 예레미야라 한다. 선지자라고 한다. 내 마음에 알려 준 것은 착각 할 수도 있잖아 지금 시대에 알려 준 자들이 가르쳐 주는대로 해야지 하면 소용이 있어요 없어요. 그때는 말로 고백하는 것이 몸의 순종입니다. 이럴 때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천하에 어떤 누가 말하는 것보다 순종해 드리는 주님이 나에게 권위를 더 가져서 주님의 음성을 인정하는 저와 여러분들로 연습시켜 가시기 바랍니다. 막히지 않고 순종해 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창세기 39장 요셉에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고 있는 그것을 순종해서 모시고 있으므로 범사가 형통했습니다.

 

요셉이 전지자시오 전능자시오 사랑의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에게 가정에서의 종노릇을 주님이 말씀하ㅡ는 그 음성 듣는 연습, 요셉이 a,b,c,d 배웠겠어요, 그만 요셉은 주님이 말씀하고 듣고 순종하는 연습 했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 보디발 집의 시위대장이라면 경호실장, 그러면 권세가 막강하지 않습니까 그기서 ㄹ편하게 살게하지 않고 감옥에 가져도 둬도 그기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만 연습합니다. 그것이 연습이 되니 총리에 갔다 놓아도,

 

그 때 7년간을 나 두어도 안썩고 어떻게 보관을 잘했던지 씨종자는 씨종자대로 어떻게 했을 까요 하나님이 하라는대로 하니 만사 형통이라, 종노릇 잘하니 총리 자리 가져다 놓아도 일등 총리.

 

이제 우리도 어디서든지, 낙망할 필요 없습니다. 다윗은 목동에서 왕 되었습니다. 시편 27편에 부모도 다윗을 인정 안하고 버렸습니다. 왕으로 세워 놓아도 다윗 같이 왕의 권위나 훌륭한 왕이 없지요.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자, 이 마음이 새 사람의 마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살 수 있고, 자라면 우리는 종자가 하나님의 종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자라면 하나님의 아들로 자랍니다. 우리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주님의 음성 듣는 것, 순종하는 것, 음성을 들을려면 신구약 66권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무슨 지식대로 된 것을 선한 양심이라 합니까? 성경대로 된 것이 선한 양심이라. 아버지의 소원을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가르침 받으려면 66권 성경이 가르쳐 주는대로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든 독서량보다 많이 잃지 않는 것이 삐뚫어졌다.

 

이 지식이 가장 우리에게 생명 지식인데 근 본 지식을 머리로 가지지 않했으니 삐뚫어 졌다 그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세워 주신, 세상적으로 봐서 지극히 적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극히 적은 여기서 충성된 내 지식, 과학에 맞추려 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 나는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하는 어데서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 위하자 하는 이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그 다음 순서는 하나님이 인도를 해 주십니다.

 

IV.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라

 

디모데야 바울 사도가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모데에게 네가 목회하는 교인에게 명하라. 선배요 믿음의 아버지인 사도 바울이 아들인 제자에게 이렇게 하라 지도하라, 어떻게 하라 합니까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명령은 안들으면 벌이 있습니다. 교훈이나 지도나 차원 높은 것입니다.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아라. 우리 성도의 성공은 하나님과 나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자체와 모든 이력과 활동에 성패가 되는 것이지, 세상의 것으로 많이 가지고 질 좋은 것으로 성공의 표준으로 가지기 쉽다. 이것 아니니 이것을 가르쳐라.

 

물론 믿음 지킨 표시로 세상 것이 잘 되는 것 있습니다. 세상에 것으로 부요한 것으로 성공한 줄로 알 고 있는 이 마음을 두고 마음을 높인다고 하면 그 목회가 실패다

 

다음으로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라. 우리의 몸도 재물입니다. 육의 생명까지도 재물에 속합니다. 신령한 것 아닌 것은 다 재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정함이 없다. 자체적으로 정함이 없고 존재적으로 정함이 없는 것들이다. 이것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가지지 않고 이런 것 저런 것들을 소망으로 가지기 쉽습니다. 성공 같은데 완전히 실패의 걸음이다.

 

기독자들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망을 삼아라. 이 유무로 성공의 실패와 성공의 기준을 삼아라.

 

후히 주시고 성공은 했는데 누리지는 못하는 누가복음에 보면 그날 밤에 불러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세상도 후히 주신다. 많이 주시기도 하시고, 우리 성도는 하나님에게 세상 것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떠나서 밤 새도록 고기 잡아도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세상 성공도 없습니다.

 

이재 우리는 하나님에게 얻고 그분이 주시는 것으로 우리 부요를 삼아야 합니다. 그 분이 주는 것 외에는 받는 길이 없으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데 쓰라고 할 수 있는 대로는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것, 자식에게 줘야 하겠지만 자기가 선한 사업에 다 사용하고 가는 것 지혜 있는 자입니다. 자기의 세상 지능이든지 건강이든지 물질이든지 무엇이든지 주시는대로 선한 사업에 쓰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 하라하지요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세상 것도 더 많이 심을 수 있도록 다 방면으로 할 수 있도록 자본을 주십니다.

 

받은 소유 자본 적든지 많든지 그것 가지고 사용을 하면 그것이 많은 사업에 부요할 수 있는 자본으로 바꿔서 줍니다.

 

그리고도 다음은 너만 하지 말고 나눠 주는 사람이 되게 하라.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모든 사람이 네가 되고 네가 모든 사람이 하는 자가 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