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선한 사마리아 인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본문 누가복음 10:28-37
이 시간 함께 살펴보려는 말씀은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알고 계신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참으로 큰 영향을 미쳐서 곳곳에서 선행을 베푼 사람이나 기관에 대하여“선한 사마리아(Good Samaritan)”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음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십계명의 모든 교훈들은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는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어느 누구나 듣기는 좋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은 조금 불편한 교훈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두 가지 질문(25-29)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율법 교사라는 사람은 오늘날 변호사와 같은 법률가입니다. 그는 당시 율법에 대하여 박식한 사람입니다. 어떤 번역본에는 서기관(scriber)이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율법사의 첫 번째 질문은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떠 보려는 의도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질문인 듯싶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있는가라는 반문에 쉽게 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답한 것은 쉐마(Shema)입니다.
*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의 대답은 100점짜리 입니다. 주님은 칭찬하시며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칭찬을 들은 이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저자 누가는 그의 의도를 간파하였습니다. 기록하기를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의 잘남을 과시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재차 질문합니다.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런데 이 질문은 이 사람이 정말로 몰랐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볼 때, 그의 주변에는 이웃을 사랑할 만한 부류의 사람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만나는 사람과 만나고 사귀는 부류의 사람과 사귀니까 정작 도울 수 있는 이웃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율법 교사를 향하여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사에게 재차 묻습니다.
* 눅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하여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교훈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여 순종하기가 쉽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주님께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율법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1) 내용 / 이 비유에서 여섯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 강도들, 제사장, 레위, 사마리아 인, 그리고 주막 주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강탈한 후 심하게 구타하여 거의 죽은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지만, 착한 사마리아 인이 이 강도만난 사람을 구해서 주막으로 가서 충분한 비용을 지불하여 고침 받도록 조치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설명 드리고 자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상황 설정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해발 2700feet(약 823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는 해수면 보다 820feet(약 250m) 낮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차이가 3500feet(1,067m) 정도 됩니다. 큰 도시에서 지방의 작은 도시로 가는 것도 내려간다고 하겠지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예부터 종려나무가 많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의 도시(the City of Palms)라고 불렸습니다(신 34:7; 삿 1:16; 대하 28:15).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대하여 고대 유대인 역사학자 Josephus는 기록하기를, 이 길은 아무 외지고 바위가 많은 길(desolate and rocky)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외지고 바위가 많은 길에서 강도들이 쉽게 숨어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여겨집니다. 산적들이 출몰하기 쉬운 길인 셈입니다. 아마도 당시 여리고로 가다가 이런 불한당들의 습격을 받는 사건들이 종종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 해석
첫째, 고전적 해석/ 이 비유를 초대교회 성도들은 흥미로운 해석을 들으며 교훈을 받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Origen(c. 185-254 AD)과 St. Augustine(354-430 AD)은 다음과 같은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諷諭的 解釋)을 했습니다.
* 강도 맞은 자 – Adam: 타락했기에, * 예루살렘-천국(heaven); 하나님의 통치권이 있는 곳이기에
* 여리고-세상; 죄악이 관영한 곳이기에, * 강도들-어두움의 세력들: 악을 행하는 세력들이기에
* 제사장-율법, * 레위인-선지자, * 선한 사마리아인-예수, * 포도주-예수님의 피, * 기름-성령,
* 주막-교회, * 두 동전-구약과 신약, *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시 옴- 예수님의 재림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에 대하여서나 교회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 비유는 율법 교사가 질문한 “내 이웃이 누구냐?”에 관한 답변으로 이는 사랑에 관한 것이지 율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유에서 주님이 참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둘째, 바른 해석/ 어떤 사람이 내려가다가 강도들은 만나 강탈당하고 폭력에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해서 “거의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반쯤 죽은(hemithane, half death)” 것을 뜻합니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가능성은 심하게 맞아 거의 죽은 상태도 의식이 없는 정도이고 둘째 가능성은 심각한 상태이나 숨은 붙어있어서 의식이 있는 정도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둘째 경우라고 이해합니다. 즉 이 강도만난 사람은 아직 숨은 붙어있고 의식도 어느 정도 있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제사장과 레위의 지나감
이 환자가 신음하는 상황에서 마침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마침(kata sugkurian, by chance)”이란 말은 바로 그때란 말입니다. 그는 환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여기서 “보고”란 표현 역시 “그가 그를 보았을 때(when he saw him)”입니다. 그는 제사장으로 말로 중얼 거리며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레위인도 그 환자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들 제사장과 레위 인들이 누굽니까? 그리고 그들은 중얼거리며 왜 피하여 지나갔을까요? 이들은 율법적으로 착실하게,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주도적으로 주관하여 율법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자들입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가 잘 진행 되도록 제물들 즉 동물과 곡식 그리고 진설병을 차질 없이 준비하는 역시 거룩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환자를 보고도 그냥 피하여 지나간 것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 무서운 강도 떼거리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 사람과 같이 상해를 입지 않기 위해 얼른 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입니다. 제사를 수종 듦에 있어서 매우 훈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피했을까요? 율법에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 레 21: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이 레위기의 말씀은 제사장들이 죽은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의 죽음에서 조차 만질 수가 없도록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레위인 들에게는 다음 말씀이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민 5: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 민 19:11-13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결국 이러한 율법의 조항으로 인하여 제사장과 레위인들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것이고 만약 그 시체를 만졌다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거룩한 사역을 수행하지 못할 상황이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가 신중하고 사려 깊고 자신의 임무를 잘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 강도 만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의식이 있어서 분명하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들어 줄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환자는 너무 심하게 상처를 입어 도움을 제대로 요청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2) 사마리아 인의 선행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알 수 있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으로부터 심한 인종차별을 받는 사람입니다. 북조 이스라엘의 10 지파 사람들이 나라가 앗시리아로부터 멸망했을 때 주변 국가 인종과 섞여 혼혈족이 되었기 때문에 유다지파로부터 심한 차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앞선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 사람인 제사장과 레위인과 달리 이 사마리아 인이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선행(three rules of good)을 했습니다.
첫째, 긍휼의 마음을 가짐 : “불쌍히 여겨”
둘째, 즉시 도움을 실천함 :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고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줌.
셋째, 끝까지 돌보아 줌 : 하룻밤을 같이 자고, 충분한 돈을 주어 끝까지 치료해 줌
여기서 이 사마리아 인이 가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aplagchnon으로 이는 신적 긍휼(divine compassion)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마 18:27에 나오는 왕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시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 사마리아 인이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한 것은 당시 사회에 있어서 아주 흔한 치료 방법이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상처를 깨끗하게 하고 세균을 소독하는 기능이 있고 기름은 상처 난 부위를 부드럽게 해서 빨리 아물도록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당시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이 이 두 가지 기름과 포도주 모두를 항시 지참하고 다녔을 거란 점입니다. 그 이유는 이 두 물질 모두 소제의 제사 드리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 레 23: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 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쓸 것이며
즉 제사장과 레위인은 얼마든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쓸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돕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긍휼의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인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진정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환자를 응급 치료한 후 자신이 타는 짐승에 실고, 주막으로 가서 정성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밤을 함께 지난 후 노동자 두 사람이 하루를 일한 대가만큼의 비용을 지물하며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잘 돌봐주고 혹시 경비가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서 비용을 다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정도의 돈이면 한 두 주간 동안 숙박료와 음식 그리고 치료할 경비로써 충분할 것이라고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이 착한 사마리아 인은 충분한 돈을 주어 그 환자를 살리려 한 것입니다.
3. 과연 나의 이웃을 누구인가?
주님은 비유를 마친 후 율법 교사에게 질문하셨습니다.
*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우리는 율법 교사의 답변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3절)”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이 유다 인에게 사마리아 인에 대한 증오감이 깊이 마음속에 담겨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눅 10:34b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과연 내 이웃은 누구인가? 또 누가 나의 이웃은 아닌가? 그리고 과연 나는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자의 이웃인가?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갈등과 반목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입니다. 곳곳에 인종, 성별, 빈부, 지방색, 종교 등등의 차별 등등 숫한 차별과 그로 인하여 야기되는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러한 각종 차별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심한 차별 속에서 이웃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지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고 깊이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이웃이 누군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이웃이 되어 자신을 드려 그들을 최대한 돕고 섬기고 베풀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한 긍휼 사역에는 시간과 물질 그리고 마음이 모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이러한 사역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실천하시며 급기야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 불쌍한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죽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나의 참된 이웃이 되셔서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시며 모범을 보여 주시고 이 길을 함께 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주님께 받은 그 긍휼하심과 사랑을 기억하고 배워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 인과 같이 사랑을 실천하십시다.
*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