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 본문  누가복음 1:1-4 >

 

우리는 지난 한 해 사도행전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의사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보다 먼저 보낸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을 먼저 보내고 이후에 사도행전을 써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해 사도행전의 말씀을 나누었는데, 올해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가 같은 인물인 데오빌로에게 보낸 글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이어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교회력에 따라 성경을 읽도록 권고하는 성서정과라는 것이 있는데, 올해 성서정과에 포함된 복음서의 말씀이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서정과에는 구약과 시편, 서신서와 복음서 이렇게 넷으로 구분되어 각각 매주 네 개의 본문을 읽고 말씀을 나누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올해 복음서의 주된 내용이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하고 있기에, 그 성서정과에 따라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처럼 본문을 순서대로 읽지는 않겠습니다. 성서정과가 교회력에 따라 구성된 것처럼, 종려주일이나 부활주일과 같이 특별한 절기에는 그 절기에 맞게 본문을 정하고 나머지는 누가복음의 순서를 따라 본본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올 일 년 동안 누가복음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가 함께 은혜를 나누고, 예수님께서 꿈꾸시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데 우리 모두가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의사 누가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누가복음서의 서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왜 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나 있을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릅니다. 예수님의 행적이나 말씀 가운데 어떤 복음서에는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도 있고, 심지어 같은 사건 같은데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통합하면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읽을 수 있을텐데, 왜 성경에는 서로 다른 복음서를 네 권이나 포함시켜 놓은 것일까요?

  각각의 복음서는 기록된 목적이 다릅니다. 목적이 다르니까 기록하는 방법이 다르고, 수많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 가운데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뺄 것인지 그 목적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본문 1-2)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이 많다고 말합니다. 여러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누가가 굳이 또 다시 이 글을 쓴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본문 4) 아마도 이 글을 받는 데오빌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알려주고자 누가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오빌로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누구이기에 누가는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것일까요?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사도행전도 그를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비록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두 권이지만, 그 분량으로 본다면 신약성경의 약 25%나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양입니다. 누가는 오직 그 데오빌로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많은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럼 데오빌로가 과연 누구일까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언급되어 있을 뿐, 성경 다른 어떤 곳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누가가 상당히 정성을 들일 정도로 존귀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는 그 데오빌로를 가리켜 각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하라는 말은 가장 탁월한’ ‘가장 강한’ ‘가장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로마의 총독인 벨릭스나 베스도를 부를 때 사용한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보아 데오빌로는 아마도 로마의 귀족이거나 고위 관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 한 사람 데오빌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누가복음이라는 긴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가가 힘들게 누가복음서를 쓴 것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해서 생각한다면 데오빌로가 고위 관리이거나 귀족이기 때문에 누가가 그 긴 글을 쓴 것은 분명 아닙니다.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바로 믿어 구원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강한 희망을 가지고 누가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이도 있습니다. 또 연설을 할 때에도 수많은 무리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연설을 하기도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이 대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장황한 연설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대중을 위한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의 영혼을 터치하는 것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설교는 많은 사람 앞에서 하지만, 그 목적은 한 사람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사람 가운데 예수를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불분명한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깨달아지도록 설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예배드리는 분 가운데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길 워해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사람이 바로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게 깨달음이 올 때 그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통해 내게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될 때 그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고 능력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내가 아니면 그 말씀은 네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내게 들려진 말씀, 그게 바로 레마입니다.

  제가 부족한 설교이지만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설교문를 게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 때 설교문을 홈페이지에 올리다가 누가 내 설교문을 읽겠나?’하는 생각에 설교문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요청을 해왔습니다. 경기도 안양에 사시는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청각 장애인이어서 설교말씀을 들을 수 없어 눈으로 설교를 읽는데, 매주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며 은혜를 받고 있는데, 어느 순간 설교가 올라오지 않아 너무 아쉽다고, 설교문을 올려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면 그건 내 사명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매주 설교문을 올립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면, 한 사람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아간다면 그 설교는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자세히 알고 믿기를 바라며 누가복음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데오빌로 각하만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2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가가 데오빌로를 위해 쓴 이 복음서를 읽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사역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이지만, 결코 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서 사랑의 희생을 한다면 그 한 사람이 나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지만,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베푼 사랑이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한 사람은 숫자로 본다면 적지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가기에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1858년 에즈라 킴볼이라는 주일학교 교사가 구둣방에서 일하는 한 젊은이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젊은이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시대에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됩니다, 그가 바로 19세기 유명한 복음전도자였던 무디(D. L. Moody, 1837-1899)입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1년 뒤 무디가 영국 런던에서 말씀을 외쳤을 때 작은 교회의 목사였던 프레데릭 마이어(Frederick B. Meyer, 1847-1929)의 심령을 깨웠습니다. 이후 무디의 동역자가 된 마이어가 무디신학교에서 설교할 때 맨 뒷줄에 있던 한 청년이 말씀에 변화를 받았습니다. YMCA 직원이었던 존 윌버 채프먼(John Wilbur Chapman, 1859-1918)입니다. 그는 그 후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고, 채프먼이 복음사역의 동역자를 모집할 때 야구선수였던 빌리 선데이(William Ashley Sunday, 1862-1935)라는 사람이 그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복음전도자가 된 빌리 선데이는 한 집회에서 모르드개 함(Mordecai Ham, 1877-1961)를 초청해 말씀을 전하게 했는데, 3주 동안 계속된 집회에서 회심하고 돌아온 사람은 12살 먹은 한 아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복음을 전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yham, 1918-2018) 목사입니다.

  여러분, 에즈라 킴볼이라는 주일학교 교사 한 사람이 전한 복음이 이처럼 세계 열방을 향한 엄청난 복음 증거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읅 전하니까, 그 한 사람의 변화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하지 않은 잃은 양의 비유와 같은 말씀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귀하게 여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맞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건져낼 때 열방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 마리가 바로 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써 준 복음서의 말씀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쓴다고 말입니다. 누가가 들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말씀을 데오빌로에게 써 줄까?’ 아마도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들은 말씀들을 자세히 살펴서 무엇이 데오빌로에게 유익할까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부 다 기록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 가운데 엑기스만을 뽑아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어쩌면 누가가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는 거짓된 정보, 기록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누가는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 엄선해서 뺄 것은 빼고 복음서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갖고 살아갑니다. 누가처럼 먼저 복음을 듣고 알고, 그 복음 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듣고 믿은 그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요?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만을 전하면 됩니다. 내가 경험한 은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내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 내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말씀들, 나를 어루만지신 사랑의 손길만을 사실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전하려 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것처럼 말하려 하니 마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내가 믿지 못한 신앙을 알려주려 하니 이게 맞나?’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내가 경험하고, 내가 고백하는 대로만 전하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자세히 미루어 살핀 후에 말입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여 데오빌로에게 전했고, 이 글을 읽은 데오빌로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누가복음에 이어 기록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데오빌로여!”(사도행전 1:1)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깍듯하게 예우를 해 준 것과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그냥 이름만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데오빌로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가 정성을 들여 써 준 복음서가 데오빌로의 영혼을 흔들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주자 데오빌로가 변화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정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자비의 손길로 그를 어루만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25년 한 해, 우리도 누가처럼 한 사람을 지정하여 그에게 정성을 들여 보십시다. 그 한 사람이 남편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나 가까운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올 한 해 정성을 들여 보십시다. 물론 우리가 경험해 본 것처럼 한 사람의 영혼을 건져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가 데오빌로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복음서를 썼던 그 정성을 생각하며, 우리도 그런 정성을 들여 보십시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성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정성을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 때가 될 때에 당신의 능력으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정성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한 일들을 정성을 다해 전달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 정성을 들여 식사를 준비한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올해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마음에도 한 사람을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이 심겨지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과 멸시를 겪어내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나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우리의 심장에 이식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힘이나 능력,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사랑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싶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쉽게 낙심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이 심겨져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는 말씀처럼,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그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시는 그 한 영혼입니다. 그 한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오늘의 누가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