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유언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수많은 독자들을 매혹시켰던 톨스토이는 아내와 가족들에게는 늘 소외당했는데 그는82세의 나이에 죽으면서 <나에게 아내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는 충격적인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노량대첩에서 전사하면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는 유언을 하며 명장답게 죽었습니다.
1883년 3.14일 세상을 떠난 칼 막스는 마지막 유언을 남겨 주시면 기록해 두겠 다는 하녀에게 <시끄러워 나가>라고 소리 지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양심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임종직전에 친구 아리스톤에게 <파우스 한테 닭한마리 빚진 것이 있으니 자네가 대신 갚아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최후까지 자기양심에 성실하기를 원했던 양심의 철인답게 죽었습니다.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는 임종의 순간에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일평생 신에 대한 지적인 반항으로 일관해 온 그의 삶이 절망으로 마무리 되는 임종의 순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익살스런 유언도 있습니다. 바눔이라는 부자는 죽으면서 <오늘은 얼마 벌었느냐>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돈이 이 사람의 가치관의 전부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장난기있는 어떤 장의사 주인은 임종하면서 <오늘 우리집 매상 내가 올릴 차례다> 그러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농담 이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상업적인 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사람 무디는 임종하는 순간에 <하늘나라가 열리고 있다>고 기뻐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남기셨을까요?
오늘부터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예루살렘성 밖 골고다라는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임종을 앞에 두고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입니다. 소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첫번째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로마의 사형수로 십자가 형을 받았던 죄수들은 모두가 극악무도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죽어 가면서도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끼어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그 분은 그 절대절명의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용서의 삶이셨습니 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계신 분들도 모두 이분에게 용서 받은 경험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A MEN !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마같은 사건은 4복음서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해 주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함게 읽겠습니다....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 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 여인은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 갔습니다.
4복음서에 소개 되고 있는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나와 사죄함을 받고 건강을 회복 하였습니다. (마9:1-8) 마 9:2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의 죄도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 다
주님은 역사상 가장 큰 오판을 내린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 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도 용서 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고, 그 사람이 회개만 한다면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말 합니다....
호 13:12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하면 불의가 봉함되고 죄는 저장됩니다. 그렇다면 중요 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용서하는 삶을 살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상칠언 첫 말씀에서 배워야 될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번째 교훈은...
1.기도하며 사는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의 말씀은 기도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요단강에서의 기도로 시작 되었습니다.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공생애의 막을 내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평소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던 대로 실천하고 계신 것 입니다. 산상설교에도 이런 교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은 일흔번씩 일곱번 이라도 용서해야 하지만 죄를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내게 죄를 범한 이웃과 친구들 / 하나님을 알지 못해 무지한 가운데 죄를 짓고 있는 폭력집단들 /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테러 집단들 / 내 마음에 미움과 배신의 상처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 / …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첫번째 일은 <용서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북한을 위해서도 이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용서를 위한 기도의 사역이 없이 북한 사역은 계속 될 수가 없습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은 원수 사랑을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용서를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상에 매달려 있었을 때 그분 앞에는 많은 사람들의 영상이 지나갔습니다. <자기를 은 30냥에 팔았던 배반자 가룟유다> 그를 보시면서 주께서는 기도 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가장 사랑하고 기대했던 제자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주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며 떠나갔던 제자 <베드로>의 영상이 지나갔습니다. 그때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 속에 가장 어리석은 오판의 역사를 남겼던 비겁한 <빌라도>의 얼굴도 지나갔을 것 입니다. 그를 보시며 주님은 기도 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환영하며 호산나 찬송을 부르던 사람들이 닷새도 못되어 /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절규하며 소리치던 변신했던 줏대 없는 군중들의 모습이 지나 갔을 것입니다. 그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기도 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이런 기도가 용서를 가능케 했습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도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충분히 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도 할 때도 우리 앞에 지나가는 영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용서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2.인간의 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무지와 어둠과 부패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도 사람들의 이런 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상에서 그들의 무지함을 용납하고 계시다거나 그들의 무지를 정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 다. 그러나 이해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무지와 부패와 타락에 대한 이해가 용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용서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인간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제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두발이 모두 마비되어 있으면 제 아무리 좋고 유명한 신발을 신는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과 같고, 만일 우리의 두눈이 멀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안경을 써도 소용이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한 급선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이것은 돈 버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 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 입니다. 예배보다도 우선입니다. 누구든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하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 나거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사화하고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용서처럼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용서만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중단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인생의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용서에 출구가 있습니다. 용서로 책임소재와 공평성의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의 새 출발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비은혜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자식마다 부모에게 원한을 품고 집안마다 불화를 대물림 한다면 그 집안은 얼마나 어둡겠습니까? 살아생전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감옥에 갇히게 되며 변화의 잠재력은 완전히 차단되고 맙니다. 성경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
용서는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용서로 치유 받는 최초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용서가 중요하고 절실하건만 사람들은 무지해서 용서의 시급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용서의 위력은 또한 가해자가 겪는 죄책감의 중압을 덜어줍니다. 대표적인 경우를 예로 든다면 빅터위고의 명작 라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에 나오는 장발장의 이야기 일 것 입니다. 평생 쫓겨 다니던 프랑스의 죄수 장발장이 끝내는 용서를 통해 새사람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라브리 마을의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이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을 부양하고 살면서 배고픔 끝에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장발장은 남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여 틈만 있으면 탈옥을 시도합니다.
그로 인해 형이 19년으로 늘었는데 13년만에 만기출옥 하여 사회로 나왔을 땐 이미 중년의 사내가 된 장발장은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면서도 적개심을 품은 사람 으로 변해가면서… 장발장은 점점 사나운 죄수가 되어 갔습니다. 주먹 싸움에서 그를 이길자가 없었습니다. 그의 의지를 꺽어 놓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출소의 날이 왔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미 그가 전과자라는 소문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음식과 잠자리 제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간 시골길을 헤메던 그에게 마침내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풀어 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날밤 더운 음식과 깨끗한 잠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사제가 잠든 사이에 장발장은 은접시를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다가 이튿날 아침 헌병 세명에게 끌려 신부 앞으로 옵니다. 이제 그들은 장발장을 평생 감옥에 넣을 기세였습니다. 그런데 밀리에르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 이었습니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소리로 말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것을 잊어버리신 모양이죠? 그것은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것입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군요?”
신부는 경찰들에게 장발장은 도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잔은 제가 선물로 준 것입니다.> 경찰이 떠나자 신부는 할말을 잃고 눈이 휘둥그려져서 떨고 있는 장발장에게 촛대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돈은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기로 저와 약속하신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런 인간의 복수본능을 넘어선 신부의 행동의 위력에 장발장의 삶은 완전히 달라 집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 촛대를 은혜의 소중한 상징물로 간직하고 그의 여생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바칩니다. 이런 신부의 관대한 용서는 가해자를 자유케 했고 그를 재창조했습니다. 이제 신부에게 장발장은 상처를 입힌자가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자로 보입니다. 신부를 밀쳐낸 자가 아니라 신부에게 속한 자 처럼 느껴지게 만들 었습니다. 이렇게 용서는 구속을 끊고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날려 보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호수가에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세번에 걸친 용서의식을 행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후로 베드로는 평생 하나님의 아들을 배반한 비겁하고도 야비한 자라는 죄책감을 품고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베드로를 통해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모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 출애급의 대역사를 진행 하셨고, 살인자요, 간음자였던 다윗을 변화시켜 이스라엘의 성웅을 만드셨습니다.
기독교 최고의 전도자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스데반을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 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죄인이요 살인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사용하십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도 주님처럼 인간의 무지함을 이해하면서 살아갈 때 용서하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야하고,인간의 무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마지막으로 ...
3. 용서는 의지적으로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용서는 주님께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 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잔을 받으시기 위하여 주님은 주님은 밤새워 기도 하셨으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 하셨습니다. 다른 길이 없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길 외에는 다른 용서의 길이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큰 방해요소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감정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떠나간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정적인 회복을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용서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연결되고 있는 앞 구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시작된 순간이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33절과 3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 새
그러니까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순간이라는 것을 아셨던 주님은 십자가의 잔인한 죽음의 순간 이었지만 이 길만이 용서의 길 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그분은 순종하고 계신 것 입니다. 이 십자가가 아버지의 뜻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희랍어에서는 <진행형 입니다 <몇 번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왼손에 못이 박힐 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분의 오른손이 못이 박힐 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분의 발목에 못이 박힐 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분의 창자가 뒤틀리고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그 고통과 아픔의 처절한 절정에서 그는 또 기도 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분은 지금 순종하고 계신 것입니다. 순종은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용서 할 때는 느낌과 감정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의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용서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남북관계도 해결되지 못합 니다. 일본과 한국의 문제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월남과 캄보디아의 관계도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나치독일의 문제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터키와 그리이스의 악순환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비극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분쟁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르완다 문제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종교분쟁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코소보 전쟁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과 대만의 문제 / 인도와 파키스탄의 문제 / 러시아와 체첸의 문제 / 영국과 아일랜드의 문제 / 아랍인과 유대인의 문제 / 한국과 일본, 남한과 북한 등… 이것이 시급합니다…
복수와 비용서의 논리는 끝이 없습니다. 터어키인들은 1389년 코소보 전쟁에서 복수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1940년에 복수했고, 세르비아인들은 이제는 우리 차례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만큼 갚아주고 싶어하는 불타는 복수심은 결코 끝이 없습니다. 민족분쟁은 수십년 / 수백년씩 / 거슬러 올라가는 분쟁입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경우는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디는 눈에는 눈으로 식의 정의를 따른다면 세상은 결국 다 눈멀고 말 것 이라고 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때 독일 군대가 벨기에 국민을 몹시 학대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국민들은 독일 국민들을 천하에 둘도 없는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언제든 독일 사람들의 원수를 기어히 갚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국민 전체가 가지고 있었습 니다.
이런 생각은 교회안에까지 들어 와서 교인들도 기어히 독일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가 있는데 그 기도를 드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 사람들의 죄를 용서 해 주지 아니하고 불타는 복수심을 가진 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기도를 드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벨기에 교회는 암담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벨기에 기독교 전국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어떤 목사가 일어서서 제안하기를 우리나라 교회가 복을 받고 성장하려면 독일 사람들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거리낌 없이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독일 사람들의 죄를 다 용서해 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것이 가한 줄로 알고 용서해 줄 것을 제안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일이 옳다고 생각되시면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모든 회중은 다 두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두 손을 든채로 독일 사람들의 죄를 다 용서해 주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홀연히 성령이 임하여 모든 무리가 다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벨기에 교회는 크게 부흥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절기마다 미국의 방송은 두 개의 영화를 거의 해마다 반복 방영합니다. 하나는 모차르트의 ‘아마데우스’이고 다른 하나는 ‘벤허’입니다. 아마데우스 테마곡은 ‘진혼곡’이고, ‘벤허’의 테마곡은 ‘사랑의 흐름’입니다. 모차르트의 천재 재능에 살리에르의 시기가 증오로, 증오가 살인으로 변해, 평생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진혼곡을 들으며 미친 폐인으로 지옥 같은 정신 병동에서 죽어가는 살리에르 그는 지옥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명화 ‘벤허’는 사랑의 실체이고, 생수의 원천인 청년 예수가 나타날 때마다 ‘사랑의 테마곡’이 향기처럼 흐릅니다. 벤허는 자기 어머니와 누이를 처벌한 친구 ‘맛셀라’를 죽여 원수를 갚아야 하는 증오로 불타 있었습니다. 그리고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당시 천병(天病)으로 알려진 문둥병에 걸려 격리된 동굴 속에서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경기에 이기고 원수 멧살라는 죽었지만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벤허였습니다. 그때 같은 나이의 젊은 청년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하옵니다”는 말이 벤허의 귀 에 박혔습니다. 벤허는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 평생의 원수 멧살라를 용서하겠다 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그 순간 문둥이가 되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의 몸이 깨끗해지면서 새 살이 났습니다. 새봄에 새순이 나오듯이…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마데우스의 죽음의 진혼곡을 들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벤허의 사랑의 테마를 들으며 살 것인가? 바로 용서의 삶에 이런 운명의 갈림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이시간 여러분을 갈보리 언덕으로 초대합니다.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겠습니다.
1.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박았네 녹슨 세개의 그못으로 망치소리 내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피로 내죄 씻었네
2.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귀중한 그 보배피 나를위해 흘렸네 그피로 내죄 씻었네
3.비웃는 저무리들 주의 옷 벗긴후에 주님 몸깊이 찌렀네 정결한 그 보배피 나를위해 흘렸네 그피로 내죄 씻었네
4.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피 한방울 나를위해 흘렸네 그피로 내죄 씻었네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 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드리셨던 그 기도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여,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광부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학교가는 길에 한 아이가 가슴을 푹 쥐어박습니다. 교실에 앉으면 한
아이가 등을 확 쥐어박습니다. 또 돌아오는 길이나 만날 때마다 가슴을 푹푹 쥐어 박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그래서 온몸에 다이나마이트를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옷을 벗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누구든지 나를 치면 이 다이나마이트 터진다. 그리고 너
죽고 나 죽자. 아무도 겁이 나서 그 아이 곁에 가질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아이 주변에는 아무도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친구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작 불안하고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은 이
아이였습니다.
미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이나마이트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불행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부자유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의 육체에 까지
영향을 주어서 우리의 건강을 해칩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당신의 마음에 뭔가 답답함이 있고, 좌절이 있고, 육체의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용서하지 못한 것이 원인 일수도 있습니다. 인생이 즐겁지 않고 / 삶이 짜증스럽고 / 마음에 고통이 있다면 / 그것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미움이나 원망 때문 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한 분들, 밤에 단잠을 들지 못하시는 분들,육체의 고통이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묵상하며 사랑과 평화를 회복하는 사순절 기간을 다시 한번 허락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가슴이 답답하고,삶에 대한 의욕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들, 미움과 배신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먼저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당하신 오해의 괴로움,억울한 아픔,배신의 깊은 상처를 경험하신 주님은 지금, 내 아픔과 내 고통도 이해 할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이시간 성령으로 찾아 오셔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주님의 관용을 허락해 주시고/ 주님의 순종을 배우게 하옵소서.
치료해주옵소서.자유함을 주옵소서.새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옵소서.용서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