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증인이기에
< 본문 – 사도행전 26:1-32 >
‘세인트토마스 섬(Island of St. Thomas)의 성자’라고 불리는 에이브러햄 비닝거(Abraham Bininger, 1720-1811)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 출신인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 조지아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국으로 가던 도중 배에 심한 전염병이 돌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린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진 그는 힘든 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덴마크령인 카리브해에 있는 세인트토마스 섬의 흑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흑인들이 매우 비참하게 혹사를 당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1756년 비닝거는 아내와 네 자녀를 데리고 세인트토마스 섬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노예 외에는 아무도 노예에게 설교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농장주들이 무지와 맹종의 상태로 흑인들을 부려먹기 위해서 만든 식민주의자들의 비열한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닝거는 식민지 총독에게 ‘흑인 노예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노예가 되겠다.’는 탄원서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덴마크 왕에게 전달되었는데, 왕은 그의 열정에 감동하여 비닝거가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하고 설교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비닝거는 노예가 되진 않았지만, 세인트토마스 섬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닝거는 복음을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했습니다. 그것만이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라면,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가 되겠다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그런 용기를 내게 했던 것입니다. 마치 데미안 신부가 몰로카이 섬의 나병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쁘게 나병환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 청년 사울은 나름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집안의 배경이 좋았습니다. 어렸을 적 고향인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율법을 공부하러 올 정도로 율법에 열정적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 수하에서 수학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습니다. 어느 누구에 비해 결코 빠질 것이 없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난 사건이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삶만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온누리에 복음이 전해지길 원하셨고, 그런 하나님의 바람대로 사도 바울은 생명을 다해 세계 선교에 평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가이사랴에 2년 동안 감금되어 있던 사도 바울이 신임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무죄임을 변명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끈질기게 사도 바울을 고발하던 종교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서 드러난 죄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뿐만 아니라, 전임 총독이었던 벨릭스조차도 바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하게 선언한 것처럼,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그리고 왕비 버니게도 ‘이 사람(바울)은 사형이나 결발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본문 31절)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바울을 계속해서 고발했고,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암살단까지 조직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암살단을 만들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죄가 분명하다면 재판을 통해서 처리하면 되는데, 재판을 통해서 바울의 죄를 드러내지 못하니까 음모를 꾸며 암살하려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야기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기록은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한 것이고, 사도행전 22장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변증하며 한 연설에 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사도 바울 자신이 한 고백 속에서 다메섹 사건이 등장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난 이 다메섹 사건에 대한 세 번의 기록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이유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이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사도행전 9:5, 22:8, 26:15) 이 말은 지금 자신 앞에 나타나신 분은 자신이 생각했던 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사렛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단을 따르는 무리들을 다 잡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메섹까지 가서 체포해 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앞에 나타나신 주님은 이단의 괴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분이었습니다.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생애 그분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살기로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다메섹 체험을 기록한 세 개의 본문에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의 기록에서는 사울을 만나주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왜 주님께서 사울을 만나주셨는지를 설명하게 합니다.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9:15)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니.”(본문 16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를 주님께서 직접 사울에게 설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정확한 사실일까요? 아마도 앞선 두 개의 기록이 팩트일 것입니다. 팩트 체크를 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거짓일까요? 왜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신앙고백적 표현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신 말씀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그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오늘까지 살아왔고, 그게 자신의 인생을 이끄는 말씀이었기에 직접 주님께 들은 말씀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은 지금까지 복음전도자로 살아왔습니다. 유대인의 미움과 종교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이 길을 고집스럽게 살아왔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최고의 사명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아니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이유도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협박할지라도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을지라도, 그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기에 평생 터 잡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된다 하더라도, 증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이라는 청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니 어느 누구보다도 성공이 보장되고 출세가 보장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활의 주님께서 자신을 증인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실 때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증언’하도록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되게 살아왔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너는 나의 종이 되어야 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인으로 부르셨을 뿐인데, 사도 바울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종으로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마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은’이라는 말입니다. 표현은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을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고대 로마사회에서 ‘종’(ὑπηρετης)이라는 말은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었으나 형의 집행이 유예되어 배 밑창으로 끌려가 명령에 따라 노를 젓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스스로를 그런 노예, 종으로 부르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 일만을 감당하겠다는 자신의 의지와 신앙고백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서두에 말씀드린 세인트토마스 섬의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예이기를 자처했던 에이브러햄 비닝거처럼 말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기를 자처하고, 종과 증인으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들은 베스도가 이렇게 탄식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본문 24절)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 자기 스스로 종이 된다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종과 노예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인생 최대의 꿈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하니, 세상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히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본문 29절) 여러분, 이것만큼 당당한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들 모두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을 베스도 총독의 관점에서 듣는다면 ‘당신들도 나처럼 미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바꿔 말하면, ‘당신도 나처럼 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온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당신들도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고 있는데, 너도 나처럼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행복할 거야.’ 그렇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주님을 만난 이후, 종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삶이 평탄하고 부유하고 형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돌에 맞아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고,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숱하게 반대에 부딪히며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의 증인으로 살면서는 그런 모든 좋은 조건들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조금 다르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당당하게 ‘당신들도 모두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종, 누군가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노예로 산다는 것은 분명 힘든 삶입니다. 아무도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나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 어느 인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종이 되고 노예가 되려 할 때, 우리의 주인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종과 노예가 된다는 것은 비참한 삶이 아니라 최고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이고 싶으십니까? 스스로 종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십니까? 누구의 종이 되시렵니까? 현대인들 가운데 권력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얻어지는 작은 이익에 노예가 되어 자신의 손에 움켜쥔 것을 놓치 않으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쾌락에 노예가 되기도 하고, 돈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현대인들은 행복에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행복을 인생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행복의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 한다고 해서 행복이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빅터 프랭클은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 행복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우리가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 내려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군주나 주인들은 자신의 노예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려먹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남이 빼앗을 수 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당신들도 모두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의 종임을 고백하십니까? 고백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기쁨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