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바에서 가이사랴로

< 본문 – 사도행전 10:1-48 >

 

이스라엘 땅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대해라고 불리는 지중해로 나가기 위한 항구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욥바이고 다른 하나는 가이사랴입니다.<사진 1>

  구약시대에는 욥바가 아주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욥바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항구도시입니다. 주전 18세기부터 존재해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욥바의 역사는 무려 4천 년에 가깝습니다. 이 욥바는 지금 이스라엘의 수도인 텔아비브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가진 욥바’(요피)라 불리는 것처럼, 굉장히 아름다운 해안도시입니다.

  이 욥바에서 북쪽으로 약 50km쯤 떨어진 곳에 가이사랴라는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이 가이사랴는 구약성경에는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이사랴는 주전 25년 경에 헤롯 대왕에 의해서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재가로 왕의 자리에 오른 헤롯은 자신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해 준 로마에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마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로마의 문화로 가득한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곤 그 이름을 로마 황제의 이름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가이사랴에는 유대와 수리아를 관할하던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고,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욥바가 오래된 유대적인 항구도시라고 한다면,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로마적인 신항구도시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두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가이사랴에 있는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를 가리켜 이달리아 부대의 백부장이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로마에는 여러 부류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주둔지에서 차출한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군대도 있었고, 식민지의 포로들이 중심이 된 군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고넬료가 소속된 이탈리아 군대는 로마에서 온 정예 부대를 말합니다. 그런 군대의 백부장이라면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주둔지에서 임무를 잘 마치고 로마로 귀대하면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 설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런 로마 군대의 장교라는 타이틀과는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2)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마치 고넬료가 유다와 수리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파견된 군인이라기보다는 경건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 파견되어 온 사람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 정도로 고넬료는 이방인이면서도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 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고넬료는 군인답게,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답게 왜 베드로를 불러와야 하느냐?’고 묻지 않고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에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는 시몬의 집 지붕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는데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가 내려오고, 그 안에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곤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본문 13) 베드로는 그것을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자란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본문 15) 베드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본문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베드로는 끝내 부정하다고 생각한 그것들을 잡아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사도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니 잡아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반면, 이방인 고넬료는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실 때 아무런 주저함 없이 베드로를 불러오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겨오고 부정한 것이라곤 먹어본 적이 없는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데, 이방인인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순종합니다.

  여러분, 그게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해왔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신앙의 오랜 관습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순종하지 못하는 베드로,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처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주저함 없이 순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앞뒤 재지도 않고,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따지지도 않고 일단 순종합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했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이것저것 많이 따집니다. 옛날에는 어땠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 자신의 머리로 계산부터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모르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 고민한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나 신앙전통을 깨뜨릴 수가 없어서 순종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의외로 우리에게 많은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본 환상이 무슨 의미인지, 부정한 것이기에 평생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시몬의 집 앞에 다다랐습니다.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분명하게 지시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보냈으니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명령, 성령의 음성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온 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고넬료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우리를 보냈고, 당신을 청하여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됩니다.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도착해 보니, 고넬료가 친척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까지 불러모아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들려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그 때서야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본문 34-35) 이제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가이사랴에서 온 사람들을 의심하지 말고 따라가라고 말씀하셨는지 가이사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할례받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임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신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 다르게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자, 이것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 복음을 전함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유대인이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함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를 베풀고 난 후 베드로는 고넬료의 요청에 의해 그 집에 며칠을 더 머물게 됩니다. 고넬료의 집에 며칠을 더 머물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사도행전 11장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머문 일로 인해서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사도행전 11:3)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았던 온갖 불결한 것들을 잡아먹으라 말씀하실 때, 그는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은 먹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처럼 할례자들이라고 표현되는 유대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음식문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결예법에 어긋나지 않은 음식, 부정한 것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만 먹습니다. 그것을 코셔’(kosher)라고 합니다. 먹어도 되는 정결한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먹은 것은 정결예법에 맞게 인증된 코셔가 아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는 욥바에서의 베드로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은 유대교의 전통을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세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유대교는 철저하게 성전 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나타났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믿음의 사람들은 성전주의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이 임하신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이었습니다. 평범한 집, 아니 이방인의 집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전주의와 같은 신앙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성전이라 부르는 예배당에서 행하는 것만이 참된 신앙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가정이나 일터나 세상 속 삶의 자리에서 드려지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하고,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예배의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배자여야 합니다.

 

둘째, 가이사랴의 베드로 모습에서 특이한 것은 고넬료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것은 할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사도행전 15:1) 이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 안에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할례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고넬료와 그 집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으니 세례를 주어도 된다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유대교의 할례가 기독교의 세례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유대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유대교의 전통을 뛰어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신앙의 전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전통은 전통일 뿐입니다. 전통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복음만이 불변일 뿐, 그 외에는 바뀌고 폐지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그것입니다. 전통을 신앙의 본질인 양 그것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전통이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이사랴의 베드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의 정결예법을 뛰어넘었습니다. 욥바에서는 여전히 부정한 것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가이사랴에서는 이방인 고넬료가 차려준 음식을 거부하지 않고 먹었습니다.

  욥바에서의 베드로, 그는 아직도 유대교의 전통에 얽매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는 유대교의 전통을 극복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복음이 전세계로 전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이사랴는 아주 로마적인 도시입니다. 어쩌면 그 로마적인 도시 가이사랴는 곧 복음이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선포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전세계로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 장벽을 뛰어넘는 곳이 바로 가이사랴였습니다.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려준 것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문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일들은 복음이 세계로 확장되어가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능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욥바에 머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다는 것도 큰일을 이룬 것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지나온 모든 전통과 장벽들이 무너져 참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욥바에서 벗어나 가이사랴로 가야 합니다. 욥바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가이사랴의 새로운 경험이 우리를 참된 신앙인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 주저하지 말고 순종하십시다. 꺼림직하고 내 생각과 맞지 않는 자리로 가라 하실지라도 순종하여 가십시다. 그 자리가 나를 새롭게 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내가 해 보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가라 하실 때에도 순종하고 가십시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전통이나 관습 속에 남아 있는 거대한 장벽을 깨뜨리라 말씀하실 때 힘들더라도 순종하십시다. 그것을 깨뜨리고 뛰어넘을 때 우리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