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외침에 담긴 뜻

 

마 21:8-11

 

   오늘이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을 종합해서 당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구약 스가랴 9:9에 메시야가 오실 때 나귀를 타실 것이라고 예언된 그대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마침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평소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있었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폈습니다. 왕하 9: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백성들이 왕의 행차 때 충성을 다짐하는 뜻에서 길에 겉옷을 펴곤 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 하며 충성을 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계 7:9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이 말씀에서 보듯이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승리의 왕으로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환영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수많은 군중이 외치는 함성이었습니다. 마태는 본문 9절에서 당시 군중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한 마디로 호산나를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호산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원래 구약의 히브리어 ‘호시아-나’(הושיעה־נא)라는 말을 신약의 헬라어로 음역하여 ‘호산나’(ὡσαννά)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 호시아나라는 말은 구약 시 118:25에 나옵니다. “호시아-나”(הושיעה־נא)에서 “호시아”(הושיעה)라는 말은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나”(נא)라는 말은 “이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 호시아나를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이 호산나라는 말은 짧은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가 확대되어왔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기에 이스라엘은 알렉산더 이후 그리스의 지배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안티오크 4세가 통치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며 조롱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마카비 가문의 주도로 독립을 쟁취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 승리를 축하하고 찬양하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이 호산나는 환호요, 찬양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호산나의 외침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원이고, 다른 하나는 찬양입니다. 지금 길가에 늘어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유대인들의 호산나 외침에는 이 두 가지 뜻이 함께 내포되어있었습니다.

   이제 호산나 외침에 담긴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 자체로 짧은 기도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백성이 이 호산나 기도를 드린 것은 초막절 때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동안 인도하시고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며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백성은 번제단 남서쪽에 잘라온 버드나무를 세워두고 그 주위를 매일 한 바뀌씩 돌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을 ‘호산나랍바’라고 불렀는데, 이 날에는 대제사장을 따라 번제단 주변을 일곱 번 돌면서, 시 118:25 호산나 기도문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마치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백성이 여리고성을 돌 때처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유대인들이 호산나를 외친 것은 누군가 시작해서 즉흥적으로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이 아닙니다. 초막절 때마다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해왔던 일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 왔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자기들 앞에 나타나셨다고 믿기에 호산나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오랫동안 메시아가 오시길 고대하며 호산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더더욱 구원을 갈망하며 호산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호산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호산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교회가 종려주일을 중심으로 해서 호산나 기도를 드리기도 했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호산나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기도문의 한 예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시옵소서.

주님이 왕으로 오시는 길에 주님을 맞이하러 맨발로 나아갑니다.

꽃비를 맞으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걸음걸음마다

 나의 겉옷을 벗어 귀한 주님 오심을 환영합니다.

종려나무 흔들 듯 꽃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구하옵나니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옵소서.

이 땅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여주시옵소서

얽매여있는 우리의 삶에 자유를 허락하시옵소서.

이 땅 왕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합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여주시옵소서. 호산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종려주일을 맞아 호산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롬 7:24를 보면 바울이 이렇게 절규한 바가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을 따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호산나!”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우리 지인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호산나” 또한 믿음을 잃어버린 교우들, 주변에 세상으로 되돌아가버린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호산나” 나아가 이 민족과 저 불쌍한 북한 동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호산나”

 

찬양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호산나는 기도이면서 찬양입니다.

   본문의 호산나 외침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날 뿐 아니라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습니다.

   마 21:12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날 다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한 마디로 말하면 메시아의 권위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성전에서 장애인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어린이들이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 모습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화를 내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것을 찬양으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호산나는 기원임과 동시에 찬양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보고 찬양을 드리는 외침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것을 믿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외침입니다.

 

   미국의 힐송교회 찬양사역자 르우벤 모건이 작곡한 “약한 나로 강하게”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은혜와 위로 그리고 힘을 얻게 하는 귀한 찬양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르우벤 모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마 21:9 말씀의 호산나라는 외침을 묵상했다고 했습니다. 묵상 중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며 삶의 무게와 압박감에 휩싸여 살지만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감싸주시고 다시 일으켜주시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이런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고 간증했습니다.

   우리도 이미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해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주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저 천국에서 우리를 맞으시고 영생복락을 주실 주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호산나!”

반전

   이 호산나 외침은 안타깝게도 며칠을 가지 못했습니다. 이 호산나 외침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마 27:22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그 입으로, 찬양했던 그 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호산나를 외친 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때가 불과 5일 밖에 안 됬습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돌변하게 된 것일까요? 이 사람들은 왜 호산나를 외치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게 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가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의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자유와 열망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놀라운 능력과 탁월한 말씀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행하시는 모습은 자신들의 기대와는 무척이나 달랐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시고 유대사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시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위협을 느끼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명을 씌워서 고발했고, 로마 당국은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우선 군중들은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예수님께 대해 크게 실망했습니다.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가 체포하고 심문하는 과정에서 보인 예수님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으로 군중심리가 작동되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로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망이 분노로까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됐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마다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응답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충성스럽게 헌신할 때 보상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헌금도 많이 하고 교회 봉사도 오래 했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중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도 중단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회 출석까지 중단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후 12:7-9를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바울은 지병이 있었습니다. 이 병 때문에 주의 사역을 감당할 때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크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데 병에 걸려 이렇게 고생합니다. 이 병을 고쳐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병 낫기를 기도할 때 그렇게 잘 낫던 병이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는 낫지 않는 것입니다. 크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자기가 병에 걸려있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기 병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결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찬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서 일부러 병을 주신 것입니다. 기도해도 고쳐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고 약한 가운데 더욱 간절히 주님만 의지하도록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기 보다는 더 감사하고 더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대를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이 자식도 재산도 다 잃었지만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라고 찬송한 것처럼 변함없이 찬송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대대로 되어도 호산나, 기대에 어긋나도 호산나 찬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