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사무엘상 6:1-21

<題目> 언약궤의 반환


 

<序言>

  언약궤는 법궤 혹은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직후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한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제작하여 (출31:6-7, 37:1) 광야를 통과할 때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에 의해 운반되어 가나안 땅 벧엘로 옮겨졌다가 (삿20:26-27) 후에 실로의 회막에 안치되었으나 (수18:1, 삼상1:3) 블레셋과의 전투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기도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였던 언약궤를 이방 나라 블레셋에 빼앗긴 것입니다 (4장). 언약궤가 블레셋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블레셋 지경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다곤 신상을 훼파하고 사람들을 독종으로 죽게 하고 농작물을 쥐로 피해주게 했습니다 (5장). 그래서 6장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안전하게 이스라엘로 돌려 보낼 것을 강구하고 수레에 실려서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려 보냅니다. 1-9절은 언약궤 반환을 의논하는 블레셋 사람들, 10-18절은 이스라엘로 돌아온 언약궤, 19-21절은 징계 받는 벧세메스 사람들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언약궤 반환을 의논하는 블레셋 사람들 (1-9절)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블레셋에 있은지 7개월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다곤 신상을 훼파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으로 죽게 하고 농작물에 쥐들로 해치게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옮겨 가는 곳 마다 재앙이 일어나자 그 재앙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로 인한 일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백들이 언약궤를 본처(本處)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돌려 보내야 할지 몰라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그 방법을 물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사장(祭司長)들과 복술자(卜術者)들은 다곤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전담하는 자들입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①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속건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금으로 독종 형상 5개와 쥐 형상 5개를 만들어 속건제를 드려 이스라엘 신 여호와께 영화를 돌리라고 했습니다. 속건제(贖愆祭)는 타인의 권리나 소유에 손해를 주었을 경우 하나님께 용서를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배상이 강조된 제사입니다. 그들이 금 독종과 금 쥐를 속건제물로 드리려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잘못에 대한 배상을 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금 형상을 5개씩 만들라고 한 것은 재앙이 온 방백과 온 백성에게 함께 임했기 때문에 백성의 대표인 방백들이 대표로 속건제물을 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금 형상의 수는 방백의 수이기도 하고 도시와 성읍의 수이기도 합니다 (17-18절).

 

  ② 언약궤를 젖 나는 소 둘이 끄는 새 수레에 실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그 수레에 언약궤와 금 보물을 넣은 상자를 싣고 한번도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그 소로 끌고 가도록 하게 했습니다. 새 수레를  사용하게 한 것은 최고의 공을 드린 것이고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소 2마리로 끌게 한 것은 재앙이 우연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소는 스스로 목적지로 가기 힘들고 더욱이 2마리가 같이 가기는 더 힘듭니다. 또 뒤에 한번도 멍에를 메어 보지 않았고 송아지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가기 힘듭니다. 그래도 목적지인 이스라엘의 벧세메스까지 간다면 하나님의 역사로 알고 지금까지 내린 재앙도 그로 인하여 내린 것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제시한 방법은 내용은 성경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한대로라면 속전제물은 생명이 있는 짐승의 피로 드려야 하고 (레5:14~6:7, 히9:22), 언약궤는 반드시 레위 지파에 속하는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했습니다 (출25:13-15, 민4:15).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재앙의 주체인 하나님께 배상 예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과 언약궤를 다른 세속적인 목적에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옮겨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모르기는 하나 자기들 방법대로 최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려고 한 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행동입니다 (5절). 그것은 다곤을 섬기는 제사장과 술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굴복하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바로왕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내려 하지 않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역사를 기억하고 블레셋도 마음을 강퍅케 하여 언약궤를 돌려 보내지 않다가는 아주 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6절).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이 최고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이스라엘로 돌아온 언약궤 (10-18절)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내리므로 언약궤를 본곳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의 재앙이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이 내린 것인지 좀더 확실히 확인해 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젖 나는 암소 2마리를 택하여 송아지를 떼어 놓고 언약궤 실은 수레를 끌고 가게 했습니다. 결국 두 암소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 벧세메스에 도착하게 됩니다. '벧세메스'는 예루살렘 서쪽 22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이스라엘 성읍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그 곳으로 보내려 했던 것은 블레셋에서 언약궤로 인해 재앙을 당한 맨 마지막 도시가 에그론인데 에그론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성읍이 벧세메스였기 때문이고, 벧세메스는  제사장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파의 땅으로서 언약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수21:13-16).   


   ① 두 암소는 목적지를 향해 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여호와의 언약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여호와의 언약궤를 싣고 금으로 독종모양 5개와 들쥐모양 5개를 만들어 상자에 넣어서 싣고 멍에를 한 번도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2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를 메워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들이 수레를 끌고 아스돗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사는 이스라엘 성읍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정말로 그 동안 있었던 재앙들이 모두 과연 여호와께서 내린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그 말대로 젖먹이는 소 2마리 암소를 끌러다가 송아지는 떼어 놓고 멍에를 씌워서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블레셋 방백들이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2마리의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는 길로 들어서서 대로로 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울면서 벧세메스까지 갔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표상이며 (출25:21-22, 삼상4:22), 속죄의 표상이며 (출25:20, 레16:14-17), 말씀 제공의 표상입니다 (출25:16, 신10:4-5, 왕상8:9, 대하5:10, 히9:4). 또 구원사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의 재료나 용도나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사53:2, 빌2:6, 출20:20-22, 삼상4:21-22, 대하35:5, 레16:14-17, 히9:6). 그리고 조금 알레고리적이기는 하지만 '두 암소'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직분을 맡은 성도들을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후3:9).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사명을 가진 교회를 잘 세워 나가려면 모든 성도들이 한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행1:14, 빌1:17, 4:2, 2:5). 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빌2:6-8, 마11:29). 서로 성격과 지위와 환경이 같지 않아도 모두 한가지 비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암3:3). 어떤 사람이 천국을 묘사하면서 천국은 팔이 굽혀 지지 않은 사람이 서로 먹여 주는 곳이고, 지옥은 팔이 굽혀지지 않지만 서로 자기만 먹으려고 애쓰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한가지 목적을 가지는 동시에 서로 낮아져서 협력해야 합니다. 5공화국 끝에 대선에서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단일 후보로 나오라는 국민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고 출마 했다가 노태우씨에게 패배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족해도 한가지 목적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② 두 암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언약궤 실은 수레를 끄는 두 암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뒤로 돌이키지도 않았습니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젖 나는 암소 2마리가 블레셋 아스돗 성읍에서 이스라엘 벧세메스 성읍까지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소는 한 번도 안 가본 낮선 곳을 갈 때는 두려워서 안절부절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안 가본 웅덩이에서 물을 먹이려 하면 물에 잘 다가서려 하지 않고 두려워 합니다. 목에 멍에를 처음 메거나 아니면 멍에를 메어 보았더라도 새로운 멍에를 메게 하면 몸이 아파서 쟁기나 수레를 잘 끌지 못합니다. 송아지를 낳았을 경우에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땐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송아지가 조금 자란 다음에 일을 시키게 되는데 그 때에도 송아지를 집에 떼어 두면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앞에서 끌어 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멍에를 한 번도 메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멘 멍에였기 때문에 멍에가 몸에 맞지 않아 몸이 아팠을 것입니다. 2마리를 같이 멍에를 메어 수레를 끌게 했기 때문에 보조를 맞추어 한 곳으로 가기가 치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아지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소였는데 송아지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모성애 때문에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울면서 치우치지 않고 대로로 곧장 벧세메스까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갔습니다.  '대로'(大路, 히.비메실라 아하트)는 '단 하나의 큰 길'입니다 (along one highway -RSV).여 호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울면서라도 가야 합니다. 당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표상이었습니다. 출애굽기25:22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했고, 사무엘상4:32에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언약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풍자적일 수는 있지만 2마리의 '암소'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성도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6:20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고, 고린도전서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소요리문답에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삶의 각 부분에서 우리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게 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울지 않을 수 없는 없는 상황이 항상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직장을 잃어서, 사업이 안되어서, 몸이 아파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해서, 신뢰하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악한 자들로부터 인격적 모욕과 비방을 받아서... 그래도 참고 견디면서 여전히 해야 할 일을 해야 우리에게 맡긴 가정을 유지하고 사업이 유지되고 교회가 세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가지신 목적을 위해 살다 보면 자연인들에 비해 더 많은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18세기 초에 독일에 벤쟈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 목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목사 수가 부족하여 여러 지역의 교회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과 함께 다른 지역에 심방을 갔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다 불타고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잿더미에 두 아들도 죽어 있었습니다. 그 황당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십시오." (찬송가 549장). 우리 주님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아무 죄가 없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로마 총독으로부터 부당한 판결을 받고, 로마 군병들로부터 침 뱉음 당함과 채찍질 당함과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한 강도로부터 저주를 받고, 십자가 아래서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고통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그런 고통의 암시를 느끼고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으로 간구했습니다. 히브리서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6:39).


  우리가 바른 길을 가다가 좌우로 치우치거나 돌이켜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9:6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롯의 처나 오르바나 데마처럼 치우치거나 돌이켜서는 안됩니다 (창19:26, 룻1:11-14, 딤후4:10). 아브라함과 룻과 동박박사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가야 합니다 (히11:8, 룻1:15-17, 마2:1-12).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해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고 그에게 받은 사명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가야 합니다 (빌3:13-14, 행20:22-24). 여호수아1:7-8에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③ 두 암소는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이스라엘 벧세메스에 도착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있는 곳에 멈추어 섰습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에 나오는 지도자 여호수아가 아닙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수레가 멈춘 것을 보고 금형상 담은 상자는 큰 돌 위에 두고 수레는 패서 불 태우는 재료로 쓰고 두 암소는 잡아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번제(燔祭)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에 성공을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하신 일인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자존심과 자랑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평생 하나님께 이용 당하고 마침내 전 생애와 환경 전체를 하나님께 드릴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 자신은 바침이 되어도 좋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롬12:1).


  바울은 빌립보서1:20-21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2:17-18에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14:7-8에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두 암소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까지 도착한 것을 보고, 또 마침내 번제물로 바쳐진 것을 보고,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16절).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3. 징계 받는 벧세메스 사람들 (19-21절)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로 인하여 재앙을 받자 언약궤를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려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역 중 벧세메스로 보낸 것은 우선 벧세메스는 언약궤를 모실 수 있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이 살고 있는 곳이고 (수21:16), 블레셋 에그론에서 가까운 지역이고, 블레셋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고 번제와 다른제(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약궤를 들여다 본 것이었습니다.   

 

   ①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 보다가 죽었습니다.

 

 19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언약궤를 들여다 보가가 (오만)칠십 인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오만)칠십 인'은 주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오만)’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괄호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받은 전체의 수가 50,000이고 실제로 죽은 사람의 수가 70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0,00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벧세메스는 전 인구를 합쳐도 50,000명이 안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Keil, Smith, Fay).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는 '(오만)'이라는 말이 없고 '칠십'인만 있습니다. 혹 있는 사본은 숫자로 쓰인 히브리어 알파벳 70에 해당하는 아인’(ע) 50(+1,000)에 해당하는 ’(נ)으로 잘못 필사(筆寫)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Kennicott). 70인역(LXX)에도 '(오만)'이 없고 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칠십'인이 맞다고 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때에 언약궤는 성막의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1년에 1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핫 자손이 언약궤를 이동할 때도 대제사장 아론과과 두 아들 외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언약궤를 이동할 때 간 막는 장과 해달 가죽과 순청색 보자기로 덮은 후에 채로 이동시켰습니다 (민4:5-6,15,19-20). 그것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고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출25:21-22, 삼상4:22).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반하여 인간은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가까이 하게 되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인데 범죄한 인간이 가까이 하게 되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출19:12,22,24, 33:20). 그것은 마치 어두움이 빛을 보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 그 언약궤에 대한 권위를 생각지 않고 함부로 열어 보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당시 언약궤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블레셋 사람에게나 하나님의 현존(現存)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고 그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여화와가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 왔다고 하며 두려워 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취급하자 하나님은 자기 영광과 영예를 지키기 위해 블레셋 신 다곤과 블레셋 사람과 블레셋 농작물을 재앙으로 심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 굴복하고 언약궤를 돌려 보냈습니다. 곧 하나님은 이방 가운데서도 스스로 자기 영광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이스라엘에 도착하자 벧세메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언약궤 뚜껑(속죄판)을 열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마 언약궤 안에 있던 두 돌판(십계명)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위를 스스로 지켜 나가시는데 그 권위를 침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후에 다윗이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시려 했을 때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던 소가 뛰므로 언약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다가 즉사했습니다 (삼하6:1-9, 대상13:5-11). 웃사가 죽은 것은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원인은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했기 때문입니다 (삼하6:9, 대상13:11).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존재에서 뿐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스스로 그 권위를 지키십니다. 신약 사도행전5:1-11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은 거짓말을 한 죄라기 보다, 당시 교회의 태동과 부흥에 있어서 성령의 순수한 역사를 그들이 외식으로 가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4:31-37).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서도 순수한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이 죄성으로 가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 사역과 선교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하지만 우리가 주장하고 우리가 영광받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노력하면서도 하나님이 명하시고 지도하시고 열매 맺으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고 우리는 그저 순종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자기 힘으로 구원 운동을 하려 할 때는 실패하여 광야로 쫓겨 났지만,  하나님을 순종하려 할 때는 성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②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열어 보다가 적어도 70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었습니다 (19절).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일을 당하고 나서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사람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져다가 아비나답 집에 두게 됩니다 (7:1).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당시 성소가 있던 실로로 가져가지 않고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옮겨가게 한 것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벧세메스와 기럇여아림은 르바임 골짜기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벧세메스와 기럇여아림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력 하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후에 다윗이 르바임 골짜기를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회복시켰다는 언급이 증명합니다 (삼하5:8-25).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약궤는 당시 성소가 있던 실로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져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이나 방치되게 됩니다 (7:1-2).

 

  후에 다윗이 언약궤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다윗성으로 모시려 하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삼하6:1-9, 대상13:5-11). 그래서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두게 됩니다 사무엘하 6:11에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했고, 역대상 13:14에는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했습니다. 3개월 후에 다윗왕이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다는 말을 듣고 다윗성으로 모셔다가 안치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70명이 죽는 징계를 받았을 때 원인을 깊이 생각지 않고 당장 재앙을 피하기 위해 언약궤를 다른 성읍으로 보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로 인하여 재앙을 받을 때 그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언약궤를 돌려 보낸 것과 같은 생각인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언약궤를 잘 모시므로 받은 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신약에 예수님이 거라사에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낸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 2,000마리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사건 직후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지방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막5:1-17 눅8:26-37). 그것은 자기들 산업에 손해가 될 것을 두려워 해서입니다. 우리는 간혹 물질과 육신적인 손해로 인하여 영적인 원인을 생각지 않고  복된 것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가 떠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위엄을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앞장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結言>

  언약궤는 블레셋에서도 스스로 보존했고 이스라엘에서도 보존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 지켜 나가시고 자기 일을 해 나가십니다. 블레셋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하나님의 언약궤로 인하여 재앙을 받을 때 진정한 원인을 생각지 않고 재앙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원인을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