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Ⅱ)
『안타까운 인생』
(요나서 1:1-3)

요나서 강해 첫 번째 시간이었던 지난 주일설교시간에 저는 요나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의미는 첫째 인생의 복과 화를 가르는 갈림길이고, 둘째 신앙의 무게를 달아보는 저울이며, 셋째 신앙인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지난주일 본문 말씀이었던 1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말씀 안에 있는 어떤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인가라는 교훈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분명 인생에는 보기만 해도 흐뭇함을 주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안타까움을 주는 인생도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이웃에게 흐뭇함을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하고 안타까움을 주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이 안타깝게 여길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떤 내용의 인생을 살아야 하나님과 이웃에게 흐뭇함을 줄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안타까운 인생이 어떤 인생인가에 대한 내용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이름만 좋은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4년 전 저는 딸을 통해 외손녀를 얻은 후 아주 무거운 책임을 부여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부여받은 책임은 딸 부부가 제게 부탁한 손녀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몇 날을 고민하다가 풀과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도 열매를 맺어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귀한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풀과일 라(蓏)에 귀녀 빈(嬪), 라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제 손녀의 이름에만 의미가 있고 기대가 담겨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누구의 이름에도 다 의미가 있고, 그 사람을 향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이름 만큼만의 삶을 살면, 즉 사람이 자기 이름에 담긴 의미와 기대만큼만 살면, 그 사람은 보기에 참 아름답고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요나에게는 태어난 후 아마도 그의 아버지 아밋대가 지어 주었을 이름인, 그래서 집 안팎에서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 사용했던 요나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비둘기입니다. 비둘기는 평화와 유순함을 상징합니다. 분명 이웃과 싸우지 말고 평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집부리지 않는 유순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요나라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에게는 요나라는 이름 외에 두 개의 이름이 또 있습니다. 그 두 이름 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 아밋대와 관계해서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이름입니다. 아밋대라는 이름의 뜻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거룩과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아밋대의 아들로 불리워진 요나는 그 이름의 뜻 그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거룩하고 성결한 자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에게는 그런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이름과 함께 직분과 관계된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예언자라는 이름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가감 없이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사명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요나에게는 비둘기라는 의미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라는 뜻을 가진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이름, 그리고 예언자라는 하나님이 주신 직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이름을 요나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이름만 좋았지, 이름 그대로의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평화와 유순함의 상징인 비둘기와 같은 삶을 살지 못했고 분쟁을 원하고 분노를 나타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과 성결의 의미인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지 못했고 편협함과 고집의 모습만 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할 예언자의 사명을 순종을 통해 감당하는 삶을 살지 못했고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요나는 이름은 좋았지만 이름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요나의 모습에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셨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오늘 주변에서 우리를 불러주는 이름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분명 좋은 의미와 기대가 담겨있는 이름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의 아들이나 딸, 그리고 누구의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라는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목사로 불리워지는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 이름만큼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름에 먹칠하지 않고 여러분이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름이 주는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까? 진정 이름만 좋아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이름만큼의 삶은 살아야 하고, 아니 이름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이웃에게 흐뭇함을 주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과 이웃에게 흐뭇함을 주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 죄악이 상달되는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외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앗수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 나라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던 나라였고, 자신들을 최고라 여기는 교만 가운데 많은 죄악들을 저질렀던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앗수르 백성들을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라도 가정도 사회도 문화도 인생도 심판을 받아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악이 상달되는 인생을 안타까운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앗수르 사람들과는 다르게 거룩한 신앙의 모습과 내용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던 사람도  성경에는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고넬뇨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절 말씀입니다. “고넬뇨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뇨라는 사람은 이방인으로 로마군대의 장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식민지 백성이 믿는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대충 섬기지 아니했고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늘 기도에 힘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제에도 힘썼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신앙의 모습과 내용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시면서 그를 이방인 가운데서 맨 처음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넬뇨는 하나님 앞에 신앙의 모습과 내용이 상달되어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를 수도 있고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꽃같은 눈으로 머리털까지도 세시며 은밀한 마음의 생각과 남몰래 슬쩍 행한 행위까지도 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는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 앞에 여러분은 무엇이 상달되고 있습니까? 죄악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신앙의 모습과 내용입니까? 진정 하나님 앞에 죄악이 상달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거룩한 신앙의 모습과 내용이 상달되면 여러분의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악대신 거룩한 신앙의 모습과 내용이 상달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 말씀에 불순종하기로 작정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성경은 이런 요나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보겠다는 생각이고 행동이라고 말씀합니다. 3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이런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담이고 하와입니다. 아담과 화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는데, 그 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두려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깁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팔 자라는 지적을 받자 예수님의 얼굴을 피하고자 그 자리에서 나갑니다. 요나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얼굴을 피해 그 자리에서 나가면 자기의 죄가 감춰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바다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되었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가룟유다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 분, 즉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시고, 그 어느 곳이든지 손길이 닿지 아니한 곳은 한 곳도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곳은 한 곳도 없고,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곳도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어리석음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인생의 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그저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인생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용기와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는 것은 인생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는 인생에는 사탄이 주는 근심과 위축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인생은 당당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당당하게 대하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인생만큼 안타까운 인생이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4. 기회를 바로 분별할 줄 모르는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욥바에 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욥바에 와서 보니 자신의 다시스로 가려는 계획과 너무도 잘 맞게 다시스로 갈 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3절 중반절 말씀입니다.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에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욥바에서 자기가 가려했던 다시스로 갈 기회를 요나가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기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까? 아닙니다. 그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기회는 그가 더욱 불순종의 길을 걷게 할, 그래서 그에게 죄를 더 크게 짓게 할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을 타락시키려는 사탄의 계략 가운데 하나가 그런 기회를 신앙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탄은 예수님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에게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그리고 로마의 학정으로 배고픔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있던 예수님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지금이 기회이니 돌을 떡으로 만들어 예수님의 배고픔도 해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픔도 해결해주라고 유혹했습니다. 또 사탄은 나실인이었지만 이성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삼손에게 이방여인 들릴라와 사랑에 빠질 기회를 주며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탄은 여러 전쟁에서 연승을 이어가며 평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다윗에게 밧세바라는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육체의 만족을 얻을 기회를 주며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탄이 준 기회를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며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으나, 삼손과 다윗은  사탄이 준 기회를 거부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져 눈이 뽑히고 아들에게 쫓겨 다니는 부끄러움을 겪었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기회, 즉 돈을 많이 벌수 있는 기회나 출세할 수 있는 기회 등과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지 아니면 사탄이 주는 기회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면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분명 주어진 기회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바로 분별하지 못해 죄를 짓고 신앙을 잃는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는 열심도 필요하지만 그 열심 이전에 분별력이 더 필요합니다. 열심은 있었지만 분별력이 없음으로 이단에 빠져 사는 사람들, 얼마나 안타까운 사람들입니까?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좋아만 하지 말고 그 기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지, 아니면 사탄이 주는 기회인지를 기도와 말씀을 통해 바로 분별하여 신앙과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5. 불순종함으로 치르지 않아도 될 값을 치르는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에 온 요나에게 다시스로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배 삯을 치르고 배에 오릅니다. 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때 요나가 치른 배 삯은 그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갔다면 치를 필요가 없었던 배 삯입니다. 그렇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치르지 않아도 될 값을 치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순종에는 치르게 되는 불순종의 값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값으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삼손은 두 눈이 뽑혔으며,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 다니는 부끄러움을 겪었고, 가룟유다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순종에는 따라오는 순종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의 보상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모세는 민족을 해방시키는 영웅이 되었으며,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영광의 구원자가 되셨고, 베드로와 바울도 초대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난 인생에서 불순종하다가 치르지 않아도 될 값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아니 지금도 불순종하고 있는 까닭에 치르지 않아도 될 값을 치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하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순종이 인생의 진정한 지혜라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순종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진정 우리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흐뭇한 인생이 되어야 하고, 사람들 보기에도 귀하고 좋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인가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름만 좋은 인생, 하나님 앞에 죄악이 상달되는 인생,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인생, 기회를 바로 분별할 줄 모르는 인생, 그리고 불순종함으로 치르지 않아도 될 값을 치루는 인생이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축복하기는 들으신 말씀을 삶에 잘 적용하여 하나님 보시기에도 흐뭇한 인생을 사는, 그리고 사람들 보기에도 귀하고 좋은 인생을 사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