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하지 마십시오.
(약 4:11-12)
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비방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비방의 문제」여러분! 비방이란 무엇입니까?
비방이란 말을 한글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헐뜯는 말’ 또는 ‘남을 해치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비방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인 ‘카타랄레오’(καταλαλἐω)라는 단어를 분해해 보면 이 비방이란 단어의 그 뜻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카타랄레오’는 ‘카타’(κατἀ)라는 단어와 ‘랄레오’(λαλἐω)하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인데 ‘카타’는 영어로 ‘against’ 즉 ‘반대’ 또는 ‘적대’라는 뜻이고, ‘랄레오’는 영어로‘speak’ 즉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합해서 해석하면 ‘카타랄레오’는 ‘반대하는 말, 적대적 언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비방이란 ‘어떤 사람을 반대하여 그 사람에 대해 하는 악한 말’ 또는 ‘상대를 적대하며 하는 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카타랄레오’를 영어로는 ‘backbit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backbiting’은 단어의 내용 그대로 누군가를 ‘back’, 뒤에서 ‘bitng’, 물어뜯는 것입니다. 즉 등 뒤에서 사람을 물어뜯는 것이 비방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카타랄레오’라는 단어를 바울서신에서는 ‘험담’으로 번역했고, 복음서에서는 ‘수군거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험담이란 남을 해치기 위해 하는 말이고, 수군거림이란 앞에서 당당하게 큰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닌 뒤에서 남에 대해 부정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여하튼 야고보는 이 비방을 오늘 읽은 본문 11절에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두 말할 필요 없이 그가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시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 서로 비방하는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Ⅱ
사실 그 때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도 비방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사람들이 비방을 하게 됩니까? 사람들이 누군가를 비방하는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방을 통해 자기를 우월한 존재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비방을 통해 상대방을 낮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유보다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람이 마귀의 시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별명 중에 하나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διἀβολος)입니다. 마귀를 뜻하는 영어의 ‘devil’이라는 단어가 이 ‘디아볼로스’라는 이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의 뜻이 바로 ‘비방자’, ‘참소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비방자이고 참소자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땅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누군가를 비방하게 하고 참소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 까닭에 마귀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이웃을 비방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 비방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웃과의 관계를 가장 악독하게 파괴하는 악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비방을 인간관계의 독침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독침이 무엇입니까? 맞으면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 독침입니다. 그런데 이 비방이라는 독침은 맞은 사람의 생명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쏜 사람의 생명까지도 죽입니다. 즉 비방의 대상자도 그 비방 때문에 죽게 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비방한 사람까지도 그 비방 때문에 죽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기도 그 비방이라는 독침 때문에 죽게 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남을 죽이기 위해 비방하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비방의 독침을 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열등감을 감추려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나름대로 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도 비방의 독침을 쏘면서 자기의 우월감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방과 비판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비판이란 옳고 그름을 따져 가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에는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방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우선 남을 해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방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정당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당한 비판의 소리를 듣게 될 때, 그 비판의 소리를 넓은 마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정당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비방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누군가를 비판해야 한다면, 그 때에는 정말 자신이 하려 하는 그 비판이 정당한 발전을 위한 비판인가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비판인가를 냉정히 살펴본 다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Ⅲ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비방은 정말 악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서도 이웃을 비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성도인 우리는 야고보의 권면대로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를 비방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성도가 왜 비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까?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 말씀 안에 성도가 비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몇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첫째, 비방하는 이웃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11절 상반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이 말씀 안에 형제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그렇게 야고보는 이 비방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면서, 먼저 우리가 비방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의 말 그대로 우리의 이웃은 모두 다 우리의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오늘도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우리가 정해서 그렇게 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 주시며 우리를 형제와 자매로 맺어주셨기에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로 서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와 자매라는 관계는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우리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모두다 우리의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거기에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게 하신 예수님과 바꿀 정도의 너무도 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의 이웃은, 그리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만큼 귀한 존재인 우리의 이웃을 함부로 평가하고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 우리는 이웃을 볼 때 그 사람의 외적인 모습이 어떠하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이웃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이웃을 비방하며 살지 않게 되는 성숙한 신앙인 입니다.
둘째,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1절의 두 번째 문장부터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이 말씀 안에 율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나오는 율법이 무엇입니까? 이 율법이 뜻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가장 타당한 견해는 예수님이 과거보다 더 강화시키신 도덕법으로 이 율법을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즉 구약에 나오는 사람이 지켜 행해야 할 도덕법 가운데 예수님이 더 강화시키신,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준행해야 할 도덕법이 이 말씀에 나오는 율법의 의미다 그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더 강화시키신 구약의 도덕법이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8절에서 예수님이 더 강화시키신 구약의 도덕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최고의 법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정해주신 최고의 도덕법, 최고의 율법입니다.
비방은 개인 뿐 아니라 나라와 같은 큰 사회조직까지도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모든 악 가운데 가장 빠른 게 소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허무맹랑한 제멋대로의 비방도 무서운 속도로 번집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던 일도 이 사람 저 사람 입에 오르내리면 그 일을 사실처럼 믿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것임에도 비방은 그 비방의 대상자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멀쩡한 가정도 파괴하고, 좋았던 건강도 나쁘게 만들고, 튼튼했던 공동체도 흔들고, 평안했던 사회도 무너뜨리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비방은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하면서 어떻게 그 이웃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는 비방을 할 수 있겠고, 어떻게 그 이웃의 가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방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방은 바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떤 법이든지 그 법을 어기면 거기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율법도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분명 비방에는 반드시 율법에 따르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웃에 대해 비방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이제 그 비방을 멈추어야 하고, 그 동안 비방했던 것에 대해 하나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심판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하는 인생의 참 지혜입니다.
셋째, 비방하는 사람의 사정을 정확히 모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판단에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대해서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눈에 이웃의 잘못이 보일 때, 그 보이는 것만으로 그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 이웃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가 알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그 이웃에게 있었을 것이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과 함께 그 이웃의 사정을 최대한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웃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그 연약함을 보호해 주는 것을 비방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한 대학에서 젊은 어떤 교수가 강의 시간에 어떤 질문을 한 다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오른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모든 학생이 다 손을 들긴 들었는데 그런데 유독 교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한 학생만은 오른 손이 아닌 왼 손을 들었습니다. 분명 오른 손을 들라고 했는데 왼 손을 드는 그 학생을 보고, 교수는 그 학생이 나이가 어린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은 다음, 오른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학생은 여전히 왼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진 교수는 그 학생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왜 오른 손을 들라 했는데 왼 손을 드느냐고, 교수가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이냐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그 학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전쟁 중에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학생의 말에 젊은 교수는 너무도 미안하여 그 학생의 왼손을 붙잡고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 젊은 교수는 자기의 눈에 보이는 그 학생의 왼 손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국을 위해 생명을 걸고 전쟁터에 나갔던 그 학생의 애국심과 그 전쟁터에서 팔을 잃었던 그 학생의 아픔과 그럼에도 낙심치 않고 내일을 위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 학생의 건강한 의지는 보지 못하고, 그 보이는 것만 가지고 기분 나빠했던 것이고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부족한 존재이고, 아는 것이 한정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형제를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두 말할 필요 없이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정확히 판단할 완전한 지혜와 능력과 기준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정확히 판단하는 일도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바탕으로 아무런 조심도 없이 사람들도 비방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우리가 그런 판단과 비방을 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보호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코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라하지 않습니다.
11절 말씀에 ‘판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크리노’(κρίνω)라는 단어를 옮긴 것입니다. 이 ‘크리노’라는 단어의 뜻은 ‘결정하다, 간주하다, 규정하다’입니다. 영어로는 번역하면 ‘judge’입니다. 그러기에 11절에 나오는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재판관이 ‘당신은 이런 죄를 범했다. 그러기에 이렇게 선고한다’ 하면서 죄인의 형을 확정하듯이,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이웃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저 사람은 이래서 안 돼! 저 사람은 저래서 틀렸어”하는 식의 단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몹쓸 사람인지,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이 틀린 생각인지 맞는 생각인지, 우리가 정말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사실 서양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 자기의 판단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기가 분명하게 생각하는 것까지도 ‘I think’라는 말을 앞에 붙여 사용합니다. 즉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다른 사람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다’, 또는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만 모든 상황이나 모든 사람에게 내 생각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I think’라는 말을 먼저 하면서 듣는 사람에게 판단할 여지를 남겨 둔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할 때 단정적으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즉 ‘그 사람은 원래 그래. 그 사람은 항상 그래. 그 사람에 대해 다 그렇게 말해’ 이런 식의 표현을 너무 쉽게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사람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항상 그런 사람이었는지, 정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조사하고 하는 말입니까? 물론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의 판단에 객관성까지 부여하며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이웃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임을 인식하면서 이웃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Ⅳ
말씀을 정리합니다.
교회가 시험에 드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교회는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에게나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다른 성도들에게는 더 더욱 사랑의 말과 감싸주는 말과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절대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이웃을 판단하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단정하면서 비방하는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비방하는 순간 이미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오히려 존경하고 사랑하고, 봉사하고, 순종하라.” 이것이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신앙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에 덕을 끼칠 말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말’을 올바로 구사해야 합니다. 분명 사랑 안에서 말하고, 사랑 안에서 이해하고,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제정해 주신 최고의 법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웃에 대한 비방대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