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의식과 풍요의식으로
(약 4:1)



초대교회는 참으로 사랑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는 사도행전 4장 32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런데 그랬던 초대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의 모습을 잃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사이에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 내용이 본문 말씀 상반절에 나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교회 안에 싸움이 있었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싸움이나 다툼에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만 개인적 욕심 때문에 하는 싸움이나 다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나 다툼이 교회 안에서 끝나지 않고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법정에 서로를 고소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런 성도들의 싸움과 다툼을 야고보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들이 싸움과 다툼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그 내용이 야고보서 4장의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도 보기가 흉합니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들 사이의 싸움과 다툼은 더욱 더 흉합니다. 정말 싸움이나 다툼은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있게 되는 싸움이나 다툼은 물론이려니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나 다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럼 왜 세상은 물론이려니와 교회에서까지 싸움이나 다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야고보는 그 싸움의 원인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본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움과 다툼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헤도네(ἡδονή)인데, 그 뜻은 이기적인 쾌락 즉 자기를 위한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1장 14절과 15절에서 ‘욕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욕이란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심, 자기만의 즐거움을 얻으려는 욕심”을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만을 주장하고 자기만을 위하며 삽니다. 사실 이런 정욕을 사람들은 크든 작든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만을 위하려는 욕심인 정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 정욕은 상대편의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위하려는 욕심과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사람이 자기주장이나 자기를 위하려는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싸움과 다툼은 인간 사회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산책하던 중 놀이터에서 아이 둘이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불러 세운 후, “사이좋게 나눠먹어라”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 있던 호두 세 알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 링컨의 선물에 아이들은 “감사합니다” 하면서 우선 호두를 한 알씩 사이좋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은 한 알의 호두였습니다. 두 아이는 남은 한 알을 누가 먹을까 하며 티격태격 하다가,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하면서 땅바닥에 뒹굴며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싸우는 모습을 링컨은 말리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보좌관이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질문에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보좌관! 저 아이들은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국제문제와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문제도 사실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다들 고상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싸우지만, 사실은  자기가 한 숟갈 더 먹겠다는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링컨의 말처럼 아이들 간의 싸움이든 국가 간의 싸움이든 싸움은 근본적으로 자기주장만을 관철시키려하고 자기만을 위하려하는 자기중심의 잘못된 정욕, 즉 욕심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쓸 때,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자기의 옛 성품인 정욕을 죽이려고 부단히 애를 쓰면서 교회 안의 다른 성도들과 사랑의 자세를 가지고 화목하게 지내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도들과는 달리 자기만을 주장하고 자기욕심을 내세우며 다른 성도와 싸우고 다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두 말할 필요없이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지만 아직도 옛 성품인 정욕이 그대로 살아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던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를 위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야고보서가 기록되었던 초대교회 때만 있었던 모습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는 되었어도 옛 성품인 정욕을 죽이지 못해, 오늘의 교회 안에도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들 사이에 싸움과 다툼의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 교회 안에는 옛 성품인 정욕을 죽이지 못한 까닭에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며 싸우려하는, 그리고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다투려하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되는 이 정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그 해결의 방법은 두 말할 것 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정욕을 이길 수 있고,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나오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스가랴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또 히브리서 9장 14절 말씀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또 로마서 8장 26절과 27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또 갈라디아서 5장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경의 말씀 그대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자기 안의 정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욕으로 인한 싸움과 다툼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정욕으로 인해 하게 되는 싸움과 다툼을 하지 않기 원한다면, 그래서 성도답게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교회 안에 싸움과 다툼이 있을 때, 성도가 그 싸움과 다툼에 휘말리지 않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성도가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도들 사이에 싸움과 다툼이 있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성도가 갖게 되는 두 가지 의식이 무엇입니까?

첫째, 성도들에 대한 지체의식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게 되는 이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싸우고 다투는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지체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체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눈이나 코나 입이나 팔이나 다리 등과 같은 신체의 일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몸의 여러 지체들 중 다른 지체들이 건강하다 하여도 한 지체만 이상이 있으면 몸 전체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발가락이나 손가락에 종기가 생기면 온 몸이 함께 아픔을 느낍니다.
따라서 지체의식이란 함께 잘 살려는 의식, 함께 성공을 이루려는 의식, 함께 책임지려는 의식, 함께 아픔을 나누려는 의식을 말합니다. 두 말할 필요없이 이 지체의식으로 단결된 민족이 강한 민족이고, 이 지체의식으로 뭉쳐있는 가정이 힘있는 가정이며, 이 지체의식으로 하나를 이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본문 말씀에서 이 지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이 말씀은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라는 말입니다. 분명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는 이 지체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용서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다른 성도의 생각이나 행동이 자기와 다를 때, 그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 다름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그 다름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에 가면 많은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다 같습니까? 아닙니다. 품종도 모양도 크기도 제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것이 정상이고, 그렇게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산이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다 내 마음 같다면 그것은 실제 좋은 것이 아니라 크게 염려할 일입니다. 내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면, 누가 그 생각을 지적해 주겠습니까?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재능이 내 재능보다 뛰어날 때 그 사람의 재능이 내 수준 정도의 재능이나 그 이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은근히 가질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시기의 마음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재능의 수준이 비슷하면, 그리고 그 재능의 수준이 여러분 보다 떨어진다면, 교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도 중요하고, 내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도 중요하며,  내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재능도 중요합니다. 진정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고, 또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재능도 다 소중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같이 소중히 여기며 인정해 주는 의식이  바로 지체의식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지체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며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풍요의식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자기가 다른 성도보다 가진 것이 적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 것도 아닌 말임에도 그 말을 자기가 가진 것이 적다고 무시해서 하는 말로 들으면 싸우게 되고, 모임의 자리에서 자기를 구석에 앉게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적어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다투게 된다 그 말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쟁은 약 14,500회 정도 된다 합니다. 평균을 내보면 일 년에 약 2.6회 정도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났습니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자기 나라에 영토도 자원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적다는 의식 때문에 이 나라가 저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들며 전쟁을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 간의 싸움도 비슷합니다. 가진 것이 적다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며 그래서 다른 성도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면서 싸우고 다툽니다. 그런데 오늘을 성도로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사실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가진 것이 적다고,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큰 지위와 명예를 갖겠다고 하면서 다투고 싸움을 합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욕에서 벗어나지 못해 세상적 수준으로 싸우고 다투는 것입니다.

진정 성도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것들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없는 것 같으나 있는 자이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다.”(고후 6:9-10)
그렇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기를 소원하는 것들을 가지지 못할 수도, 그리고 가지고 있다 하여도 적게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세상 사람이 갖고 있지 못한 하늘 차원의 소중한 것들이 있고, 높은 차원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성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천국도 성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려하는 신앙적 자세도 성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인해 천국에서 받을 상급도 성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함께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인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성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천국 백성, 작은 예수 등 세상이 줄 수 없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세상적 기준으로는 그 가치를 절대 측정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이름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귀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셀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하고, 이 사실에 제대로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크리스챤 여행객이 요르단을 여행하던 중 광야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유목민들의 집인 천막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천막 안에는 달랑 옷 몇 벌과 그릇 몇 개와 양칠 때 쓰는 도구 몇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천막 주인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그 질문에 그 천막 주인은 “나에게는 이렇게 뜨거운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이 있고, 또 기르고 있는 양들과 그 양들을 먹일 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내가 풀밭에서 양떼에게 풀을 먹이면 다른 사람이 양떼를 몰고 왔다가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행복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그 천막 주인은 크리스챤이 아닌 모슬렘이었습니다만 바울과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행복의 비결을 터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그 여행객은 자신이 신앙인이고, 또 여행을 다닐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광야천막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는 그 사람만큼 풍요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가, 그리고 내 생애에서 영생의 복락까지도 이미 약속받은 우리가, 그런 풍요가 자신 안에 있음도 깨닫지 못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바보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진정 성도는 풍요로운 자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고, 또 얼마나 큰 은혜를 지금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풍성하고 복된 은혜를 약속 받았습니까? 이것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풍요의 마음을 가지고 없기에 싸운다는 사람들처럼 싸우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저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살아야 하며, 그저 주고 또 주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령은 성도의 의식을 바꿔주시는 변화의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성도는 신앙적 의식으로 의식이 변화되어 다른 성도들을 지체의식으로 대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한 풍요의식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성도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체의식과 풍요의식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