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여호와께 감사하라!(시편 107편 1~9절)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할렐루야! 맥추 감사예배로 모이신 성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렇게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니 참으로 기쁩니다. 때때로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인해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 우리는 오랫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했었습니다. 태어나서 전염병으로 인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가운데 코로나와 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리는 환경이 조성되고, 그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이 새롭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절기상으로 맥추 감사이면서도 한해의 절반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작년에 코로나와 함께 몇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교회에 위기가 찾아왔었습니다. 그래서 올 초가 많이 염려됐었는데,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남은 반년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보내주시어 시시때때로 채워주시는 풍성함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감사”에 관련된 메시지입니다. 시편 107편 기자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1번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성도가 감사를 언급할 때 1번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선하심, 인자하심’을 감사하는 일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뉴스에서 독재국가의 지도자들이 사람들 앞에 설 때의 모습을 봅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서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지도자의 모습을 보기만 하여도 눈물을 흘리며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이단 교주들도 비슷합니다. 독재자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높이라고 부추깁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이제 좀 그런 문화에서 성숙함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지방자치단체 기관장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선출된 사람들의 행보를 보니, ‘어깨에 메는 가방(백 팩)을 매고 등장하는 도지사, 쪽방촌부터 방문해서 함께 식사하며 업무를 시작하는 시장.’ 어떤 도지사는 첫 출근에 도청 직원들이 늘어서서 손뼉을 쳤다는 이유만으로도 뭇매를 맞는 것도 보았습니다. 세상이 많이 바뀐 것입니다. //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선출되어 어떤 자리에 세워진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는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영광은 교회의 머리 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맥추절을 지키는 이유도, 직접적으로 보리를 추수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함입니다. 요즘은 수많은 교회가 맥추절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성도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마음은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한 번의 기회라도 더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합니다. 저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찬양하는 것과 같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운 교회를 인정하는 성도들은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우리 목은 교회 성도들이 그런 존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이어지는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직접적인 은혜를 기록합니다. 총 세 가지가 기록되는데, 그 첫째 이유가 “그들을 속량(贖良)”하셨다는 것입니다. 2절을 함께 봅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제가 지난 월·화요일에 종로에 있는 100주년 기념관에서 “지저스라이프 콘퍼런스(27회)”에 참석했었습니다. 이 모임은 결코 혼자서는 찾아갈 수 없는, 지인의 추천만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듣는 닫힌 공동체였습니다. 거기에서 다뤘던 제일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속량(贖良)”이었습니다. 마침 오늘의 설교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본래 속량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노예 시장입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종입니다. 주인과 계약관계를 맺은 머슴하고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종의 자녀도 종입니다. 그게 종이에요. 종의 모든 소유는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속량(贖良)은 종이 주인에게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구조입니다. 아니! 자기 소유가 없는 종이 무슨 수로 몸값을 지급할 수 있습니까? 이는 종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온 천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종으로 묶인 자를 대신해서 그 몸값을 지급하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 그런데 속량의 법에는 결정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속량의 기준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과정에서 머뭇거리면 불가능합니다. / 우리가 세상에서도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하는 사람들을 철새라고 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도 그렇게 하면, 나중에 공천 못 받습니다. 물론 그런 행위조차도 개인의 선택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어요. / 하지만, 속량은 돌이킬 수 없는 영역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마귀에게 소속을 두면, 마귀의 종이 되고, 하나님께 소속을 두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성도가 결단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로 다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우상의 종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결심합니다. 출애굽 백성들도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청산합니다. 유월절을 계기로 과감하게 이집트를 떠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같습니다.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결단할 때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 참된 자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거주할 성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넘어와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 다시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출애굽 백성들도 비슷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며 감격스럽게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들의 눈앞에는 미디안 광야가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좋은 기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광야의 뜨거운 기운을 만났으니,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요? / 누구든지 자유를 얻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출애굽 1세대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과감하게 출애굽을 했기에 그 자녀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합니다. 그 후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됩니다. / 출애굽의 과정에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은혜를 누립니다. 특히 오순절, 보리를 거두는 시기에 하나님은 추수할 수 없었던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허락하십니다. 더하여 약속에 땅에 들어가서 꼭! 맥추의 절기를 지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동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 우리에게 자유 함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집트의 노예로서의 삶을 끊고, 새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는 의미입니다.
이 맥추절이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성경에는 맥추절을 배경으로 한 이슈가 많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맥추절 즈음에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공식적으로 말씀을 주신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그리고 룻기의 주인공이 룻이 보아스를 만난 시점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추수 때에 가장자리에 흘린 것들을 줍지 않았다고 합니다. 약자들에게도 추수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룻도 그 기회를 계기로 보아스와 만나서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더하여 맥추절은 보리 이삭을 거둠과 동시에 가을에 거두는 식물들의 첫 싹이 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초실절이라고 부르며 지켰습니다. 무엇보다도 맥추절의 클라이맥스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몇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님이 임하실 것이다”라고 했던 시기가 바로 맥추절 기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들판에서 자라는 보리에 관심이 있을 때, 믿음의 선조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영혼을 추수하러 밖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첫날은 삼천 명이 회개하고, 그다음에는 오천 명이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맥추절이 성령님과 연결되면서 단순히 보리를 추수하는 개념을 넘어 영혼을 추수하는 시절로 격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공간에도 맥추의 기쁨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 만족을 주시는 분입니다.” 9절입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주시기를 원합니까? 혹시 아름다운 미모를 원하십니까? 재력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건강, 명예. 그 모든 것을 구하기에 앞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보셨습니까? 맥추 감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추절을 지키라!”라고 선포하실 때 이스라엘의 눈앞에는 보리 이삭은 고사하고, 황량한 사막만이 존재했습니다. 저들은 아무것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주워 먹던 시절에 하나님으로부터 “맥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당황스럽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은 약속의 땅을 밟고, 그곳에서 맥추의 절기를 지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광야에서 첫 이삭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첫 이삭이 자랄 때, 그것을 싹둑 잘라서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새로 차지한 땅에서 처음으로 난 그 귀한 싹을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것이 상식으로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께 먼저 예물을 올리라고 합니다. 그것이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를 배웁니다. 감사는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은 맥추 감사와 연결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라고 약속한 내용에는 맥추의 감사가 담겨있습니다. 한나가 믿음으로 처음 것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더 풍성함으로 채워주십니다. /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음성이 있기 전에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솔로몬이 먼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예물에 합당한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솔로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같은 은혜를 누립니다. 세상에 17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서 까무러칠 일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놀라운 일을 수락하였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먼저 자기 몸을 드리는 희생을 합니다. 이것도 맥추의 정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린 헌신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런 맥추의 정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번째 열매가 되십니다. 먼저 희생하시고, 부활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이 땅에 속한 수많은 영혼이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예수님을 따를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맥추의 정신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맥추 감사 주일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하나님. 고난 중에도 좋은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 사모하는 영혼에 만족함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힘써 맥추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사랑하는 우리 목은 교회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맥추의 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게 하시고, 삶을 살면서 감사의 꺼리들이 더 많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