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잘 지켜야 합니다. (Ⅱ)
 (약 3:3-12)



옛 어른들이 어린 시절 많이 읽었던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명심보감 언어(言語) 편에 ‘구설자 화환지문 멸신지부야’(口舌者 禍患之門 滅身之斧也)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사람의 입과 혀는 화와 근심의 문이고 몸을 망치게 하는 도끼이다’ 그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구절은 말이 인생의 내용을 결정해 줄 정도로 중요하니 말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인생에게 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나 ‘말로 사람을 잡는다’라는 말은, 말이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만 반면에 사람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의 속담이고 말입니다. 분명 말 한마디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살이에 있어서 입과 혀, 즉 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인생살이만이 아닌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정말 중요합니다. 신앙의 길도 바로 걷기 위해서는 혀를 잘 지키며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 혀를 잘 지키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절대 신앙인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오늘 읽은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가 진정 신앙인답게 살기 원한다면 혀를 잘 지켜야 하고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인생을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신앙의 길을 바로 걷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혀를 잘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혀를 잘 지켜야 합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그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혀에 인생을 결정해 줄만한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아무리 힘이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 입에 재갈을 물려놓으면 힘이 약한 사람도 그 말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혀는 재갈과 같이 온 몸을 통제할 수 있는 기관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진정한 기준이 되는 그 사람의 인격이 혀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혀에 재갈과 같은 기능이 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야보고가 재갈이 비록 큰 힘이 있는 말에 비해 약한 것이지만 그 말을 움직이게도 하고 멈추게도 할 수 있듯이, 세치 밖에 안 되고 그것도 뼈도 없는 약한 혀가 사람의 인격 수준을 결정해 주는 내용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엄청난 능력이 그 혀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혀를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사람은 신앙의 길을 바로 걸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정말 혀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살이에도 성공할 수 있고, 신앙생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혀에 인생을 결정해 줄만한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 혀를 잘 지킴으로 존경받는 인생을 살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2. 혀가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혀 역시 작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혀는 매우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그 작은 혀 가지고 많은 군중이나 전 세계를 바르게 인도할 수도 있고 나쁘게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악한 말은 싸움을 일으키고 우정을 파괴하며 가정을 무너뜨리고 국가간에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싸우던 사람들을 화해하게 하며, 낙심하여 넘어진 사람에게 용기를 주어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할 때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일을 감당하는지 모릅니다. 진정 싸움과 분열의 자리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하며 설득시키는 말 한마디와 낙심과 절망의 사람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는  말 한마디는 정금보다 귀합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혀, 즉 말은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 배의 키는 배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작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키가 그 큰 배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사람의 인생행로가 그렇습니다. 혀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배의 키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배의 키를 잘 조종하면 그 배가 목적지를 향해 평안하고 순조롭게 움직이게 되는 것처럼, 혀도 잘 조종하면 사람은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갈 수 있고 그 인생의 행로 역시 평안하고 형통합니다. 그러나 배의 키를 잘못 사용하면 그 배가 바다에서 표류하다 결국 파선하듯이, 혀도 잘못 사용하면 그 사람의 인생행로 역시 이리 저리 헤매다가 결국 파멸에 이릅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솔로몬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그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솔로몬에 이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르호보암에게 솔로몬에게 쫓겨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여로보암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북방 열 지파 백성들의 뜻을 모아 이제는 가혹한 통치를 완화시켜 달라고 건의합니다. 그런데 그런 여로보암의 건의에 르호보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부친은 채찍으로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징계하겠다!” 건설적인 건의에 폭언을 퍼부은 것입니다.
결국 르호보암의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다윗과 솔로몬 두 시대에 걸쳐 통일왕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던 이스라엘은 분열되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눠졌습니다. 혀는 작지만 이처럼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커다란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언서 17장 20절에 나오는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는 말씀을 늘 기억하며 혀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한 인생길을 걸을 수 있고 온전한 신앙인도 될 수 있습니다. 혀가 가지고 있는 큰 힘을 늘 인식하고 혀를 잘 지킴으로, 평안한 인생도 살고 건강한 신앙도 소유한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3. 혀의 세력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5절과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성냥불은 아주 미약한 것이지만 온 집과 온 마을과 온 산을 태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미약한 성냥불도 모든 것을 다 태워 재로 만드는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은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정말 위험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험한 불도 잘만 이용하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최대의 발견이 불 피우는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합니다.
혀가 바로 이 불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혀를 바르게 사용하면 우리는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에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혀를 우리가 잘못 사용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잠언서 16장 27절에서 혀를 잘못 사용할 때 나타나는 폐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혀로 꾀하는 악이 불을 잘못 사용할 때 나타나게 되는 폐해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럼 왜 혀로 꾀하는 악, 즉 잘못된 말이 불을 잘못 사용할 때 나타나게 되는 폐해와 같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잘못된 말이 끼치는 피해의 범위가 너무도 넓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가 산에 불을 내어 수많은 나무들을 태우듯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듭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어느새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집안과 사회와 나라 전체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매를 맞아 몸에 난 상처는 나을 수 있으나 말로 인해 마음에 받은 모욕의 상처는 평생 낫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로 인한 상처가 평생 간다고 했고,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어떤 분은 ‘총검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독설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하면서 악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했습니다. 이처럼 혀로 내뱉은 독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만큼, 그리고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될 만큼, 그리고 사회와 나라 전체를 소란스럽게 만들만큼 그 피해의 범위가 대단히 넓습니다.
둘째, 잘못된 말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피해가 걷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이 한번 붙게 되면, 그리고 그 불이 활활 타면서 힘을 갖게 되면, 그 불은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변으로 계속 번져 많은 피해를 줍니다. 혀가 그렇습니다. 혀를 잘못 사용할 때 발생하게 되는 피해도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갑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즉 피해의 범위가 넓고 그 피해를 걷잡을 수 없는 까닭에 잠언서 기자가 불량한 자의 악을 꾀하는 입술은 불과 같이 맹렬하다, 즉 잘못된 말에는 맹렬한 불이 끼치는 폐해처럼 엄청난 폐해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행할 것들 가운데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셋이 있습니다. 그것은 ‘쏜 화살’과 ‘놓쳐버린 기회’와 ‘내 뱉은 말’ 입니다. 분명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다시 거둬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한 후 입 밖으로 말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번 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혀가 불과 같다는 교훈을 기억하여 언제나 혀를 잘 지킴으로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도 되고, 향기나는 신앙의 열매도 맺으며 사는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4. 혀가 이웃에게 쉬지 않는 악이 될 수 있고 죽이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절과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 말씀에서 야고보는 혀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의 혀를 사람에 비해 한낱 미물이라 할 수 있는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과 같은 것들과 비교하면서, 사람의 혀는 길들일 수 없으나 그런 것들은 길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들여진 까닭에 그런 것들은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길들여진 원숭이, 사자, 호랑이, 뱀, 강구벌레, 돌고래와 같은 것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말을 잘 따릅니까? 그러나 혀, 이것은 정말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야고보는 그냥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즉 자기를 포함한 그 어떤 사람도 자기나 다른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없다 그 말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길들이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다마조(δαμάζω)입니다. 그런데 이 다마조라는 단어는 ‘길들이다’라는 의미 보다는 ‘복종시키다’, 그리고 ‘제어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사실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는, 그리고 사람이 제어하지 못하는 맹수는 언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는 언제라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쉬지 않는 악이고 죽일 수 있는 독입니다.
혀가 그렇습니다. 분명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언제라도 자신과 이웃과 사회를 해칠 수 있는 쉬지 않는 악이고 죽일 수 있는 독입니다. 그러기에 혀를 잘 길들여야 합니다. 진정 잘 길들여진 혀는 자신과 이웃과 사회를 행복하게 해 주는 시원한 얼음냉수이고, 자신과 이웃과 사회를 살리는 명약입니다.

그럼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한 혀를 우리가 어떻게 잘 길들일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저는 혀를 잘 길들이기 위해 묵언수행하는 분들도 보았고, 심지어는 식사시간을 제외한 다른 시간에는 입에 돌을 물고 생활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효과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방법은 온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은 한계가 있는 인간적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계가 없는 신앙적 방법을 우리는 사용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여 혀를 잘 길들일 수 있고,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모든 일에 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하지만, 특히 혀를 잘 지키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 인간의 본성만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신앙생활을 하려하는 사람은 그 길들여지지 않은 혀 까닭에 언제 이웃을 해치고 교회를 해치는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늘 간구하여 순간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받음으로 혀를 잘 길들이고 복종시켜 이웃도 살리고 교회도 살리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5. 혀에 이중성과 변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9절부터 마지막 12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했던 경험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했었음에도 얼마 후 같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했던 경험들이 우리에게 있다 그 말입니다. 야고보는 방금 읽은 말씀에서 신앙인인 우리의 그런 모습을 지적하면서, 신앙인의 한 입가지고 합니다. 두말하는 실재적 예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입으로 형제를 저주하는 모습을 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혀는 한 입으로 서로 다른 두 말을 하게 하는 이중성과 변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혀에 있는 이중성과 변덕성, 이런 혀의 성질은 정말 사람에게 특히 신앙인에게 합당치 못한 성질입니다. 야고보의 말처럼 한 우물에서 어찌 단 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있겠으며, 뿌리가 같은 한 나무가 어찌 다른 열매들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내는 말을 하며 그리고 뿌리가 같은 나무에서 서로 다른 열매를 맺는 말을 하며 우리가 살았던 때가 많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같은 사람도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입으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아내가 어느 주일 아침에 이불을 싸들고 교회 강단에 올라가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깜짝 놀라 왜 이러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당신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에는 천사의 말을 하는데, 집에만 오면 성질을 내고 화를 내고 그러니 나는 이 강단에서 천사의 말만 들으며 살고 싶어 그런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목사님이 분명 저는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정말 착한 남편입니다.
진정 교회 안에서 기도한 그대로 세상에서도 그 기도를 몸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찬송한 그대로 세상에서도 그 찬송을 얼굴로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웃사랑을 말한 그대로 세상에서도 이웃사랑을 손과 발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우물에서 단 물과 쓴 물을 함께 내는 것과 같은 잘못된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도구가 되어 하와를 넘어지게 했던 뱀의 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습니까? 뱀의 혀는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렇게 뱀의 혀는 죄를 짓게 하는 혀의 이중성과 변덕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어떻습니까?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의 혀가 이중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변덕성을 부려서도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와 찬송하는데 사용했던 혀를 저주와 비난의 말을 하는 악한 일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두 말할 필요없이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혀를 잘 지켜야 하고 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된다고 하면서, 이 ‘마알’을 ‘마음의 알갱이’란 뜻으로 풀이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억지풀이 같긴 했었지만 말이 ‘마음의 알갱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그 때 그 말을 사람 모두가 깊이 있게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이란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분명 말을 곱게 하는 사람 마음의 알갱이가 고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은 마음의 알갱이가 거친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혀를 잘 지키고 혀를 잘 다스림으로 인생길을 바로 걷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신앙의 길도 바로 걷는 좋은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