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질문에 답하신 이야기

 

마 11:2-6

 

   가장 우수한 민족이 어떤 민족이냐 라고 물으면 대체로 유대인을 꼽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0.2% 밖에 안 되지만 노벨상 수상자는 약 30%나 됩니다. 그리고 미국의 우수대학의 교수직과 연구직의 25%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같은 IT기업의 창업자와 CEO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도대체 유대인은 왜 이렇게 우수한 민족이 되었을까요? 전문가들은 대체로 그 답을 유대인의 특별한 교육방법에서 찾습니다. 바로 ‘하브루타’(חַבְרוּתָא; havruta)입니다. 이 교육방법의 핵심은 바로 질문입니다. 학생들에게 좋은 질문을 하는 법을 훈련시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질문을 중심을 답을 찾기 위해 서로 토론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깊어지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질문이 중요합니다. 질문을 해야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해야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해야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질문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알고 싶고 궁금한 것들이 생깁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 앞에 나와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고 깊고 넓은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질문하는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났고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귀를 기울이셨고, 필요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해하게 됐고 문제를 해결하게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에서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질문에 귀 기울이시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답을 주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줍니다.

 

세례요한의 질문 

 

   그러면 먼저 세례요한이 했던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3절은 이렇습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질문을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마 3장의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마 3:11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라고 가르쳐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 3:16-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이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을 감당해왔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 예수님께서 그 메시아가 맞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세례요한이 이렇게 질문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의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헤롯이 가만 둘 수 없어서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이목이 두려워 처형할 수 없어서 일단 감옥에 가둬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난 뒤 얼마 안 돼서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사역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선포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사역하시는 것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제자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세례요한은 나름대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 일을 하시고, 또 세상은 이렇게 변하게 될 것이다.’라고 나름대로의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어보니, 자기의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품게 됐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그분의 말씀과 사역을 보고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고, 그분의 사역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그저 옥에서 전해들은 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뿐입니다. 그래서 과연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영적인 지식의 부족해서 신앙적인 회의를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지 않은 채 어설픈 성경지식으로 생각하다가 신앙적 회의를 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계적인 영적 훈련을 받지 못한 채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는 고난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체포되었고, 요단 동편 마케루성의 토굴에 갇혀있었습니다. 1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오지 못하고, 끝내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의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사악한 권력에 박해를 받으며 큰 고난을 겪었던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세례요한의 마음이 많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의의 길을 걷다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부터 아무런 전갈이 없습니다. 메시아라면 자기를 이 고난에서 건져주실만한데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고난 중에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성도들의 믿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 해왔는데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원망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난을 겪고 있는데 돌봐주시지 않는지, 왜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에서 건져주시지 않는지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세례요한이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이럴 때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잘못 알았다면서 믿음에서 돌아섭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아시라면 이러실 수는 없다고 믿음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느냐고 실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질문을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맞으시냐고 물은 것입니다.

   한 잡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어느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위해 필기시험을 진행할 때였다. 면접관이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원고지에 간단한 회의소집 통지문을 작성하세요." 그리고는 백지 한 장과 펜을 나눠주었다.

  지원자들은 식은 죽 먹기라며 글을 써 내려갔고, 30분 뒤 종이를 제출했다. 너무 쉬운 문제라며 모두 합격의 꿈에 부풀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합격자가 나왔다. 면접관이 부른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지원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면접관이 말했다. "문제를 기억하십니까? 원고지에 회의 통지문을 작성하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에 쓰셨습니까? 제가 드린 백지에 썼습니다. 합격자가 단 한 명인 이유는, 그만이 원고지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질문을 하면 될 텐데 많은 경우 묻지 않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모르면 물어야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던 것처럼 물어야 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물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물었던 것처럼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 물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던 것처럼 물어야 합니다. 잘 묻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

 

   그러면 예수님의 답변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물은 질문에 답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을 통해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그 질문을 세심하게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곧바로 답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에 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신 뒤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요한이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습니까?”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라고 가르쳐왔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 대해서 실망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런 마음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질문하라는 암시입니다. 어떤 질문도 좋으니 잘 모르겠으면 질문하라는 암시 말입니다.

 

  오래 전 제가 방문교수(visiting scholor)로 미국 한 신학교에 머물렀던 일이 있습니다. 학교 상황을 살펴보다가 박사과정에 관심 있는 과목이 있어서 한 학기 허락을 받고 청강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참 많이 놀랐습니다. 학생들이 교수님 앞에서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껌을 씹어가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불편한 기색 없이 팔장을 끼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 한 질문의 수준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박사과정 학생들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학부 학생도 하지 않을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핀잔을 주기는커녕 친절하게 다 들어주고 또 자세하게 답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학생이 교수님 앞에서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한다면 당장 야단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사과정 학생이 수준 낮은 질문을 했다가는 창피를 당할 것입니다. “자네는 박사과정 학생이야 학부학생이 아니란 말이야”

  저는 미국 교육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보게 됐습니다.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 질문을 칭찬하고 친절하게 답을 해주는 교수들의 격려... 이런 것들이 학생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창의력을 끌어내 주고,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야단맞을 만한 질문인데도 다 들으시고 친절하게 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영적 깊이를 더해가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에 마음을 열고 계십니다. 그 어떤 질문도 다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을 해주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답을 살펴보겠습니다.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오시면 어떻게 사역하실 지를 예언해 놓은 몇몇 구절을 요약하시고 정리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이라면 대부분 잘 아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세례요한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을 그대로 수행하고 계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세례요한이 왜 이렇게 질문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메시아가 오셨다면 당장 불의한 헤롯과 같은 지배자와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는 로마의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하려 하셔야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의인이 고난당하고 있는 것을 살펴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대로, 다시 말하면 말씀대로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행하지 않고, 당시 상황에 따라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듣기 좋은 답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답을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말씀대로 답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답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나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들으려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주님께 질문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며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기도하며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길을 안내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질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답을 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