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기도하라 하십니다
< 본문 – 에스겔 36:37-38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40년 동안 애굽의 왕궁에서 자란 모세가 자기 백성들이 노역하는 현장을 찾았다가 애굽의 한 감독관이 히브리 백성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그를 죽이고 모래 속에 감추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탄로가 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애굽의 왕이 바뀌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강제노역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너무나도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약속하신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세기 15:13-14)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마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 땅에서 이끌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400년의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애굽의 바로 왕에게 보내시기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모세를 부르시고 보내신 것입니다. 왜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가 되셔서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를 보내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탄식하며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를 미루신 것처럼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일까요?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요엘 선지자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엘 1: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다 불에 탔음이니이다.” 물을 마실 시내가 다 마르고, 먹이가 될 풀이 다 불에 타버렸다면 들짐승들이 헐떡거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그것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린다’고 표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갈증과 갈급함은 곧 영적인 갈증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들짐승들도 그렇게 육체적인 갈증 때문에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헐떡거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 바로 앞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요엘 1:14)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고 있는 백성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서 건지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을 고난의 풀무에서 건져내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과 고통에 매몰되어 불탄 섶과 같이 사라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구원하길 원하시기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손길을 내민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처럼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그 땅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래도’라는 말씀에 주의해 보십시다. 왜 ‘그래도’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래도’라는 말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은 이렇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제2차 바벨론 침공 때인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끌려간 지 5년 후쯤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 때는 조국 남유다가 멸망당하기 전입니다. 에스겔은 자신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예레미야 선지자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빨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선지자들의 외침에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그 땅에 머무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 29:10)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70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욕이요 고통일까요?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일까요?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재앙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70년의 포로생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최상의 프로젝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1)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멋진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미래에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왜요? 그 70년의 포로생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거룩한 나라, 제사장의 나라다운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0년 회복의 기간을 마치면 그들을 고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70년 회복의 기간이 차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것일까? 그냥 시간이 지나도록 기다리고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까?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포로생활을 끝낼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그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아무 방법도 없기 때문에 그냥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말씀입니다. 에스겔 32장까지는 남 유다가 멸망당하기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33장부터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후 회복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것처럼 비록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는 멸망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에스겔 36:10) 남 유다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면서 그 땅에는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금 사람이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에스겔 36:34)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땅은 버려진 것처럼 황폐해졌습니다. 농사를 지을 사람도 없어 황폐화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땅에 거주할 사람도 있을 뿐만 아니라, 땅을 경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에스겔 36:35) 성읍들이 무너져 황량하고 적막하던 곳들에 성벽이 다시 세워지고 주민들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스스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에스겔 36:2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름,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에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친히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무너진 성읍들을 건축하게 하시고, 황폐화된 땅에 농작물을 심어 에덴동산과 같이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본문 37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다 해 주실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게 하시고, 황폐한 땅에 곡식을 심어 에덴동산과 같이 기름지고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십시다. 그런데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분명 이루어주실 것인데도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신 첫 번째 이유는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때로 참 고약합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아 누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늘 겸손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회복을 약속하신 70년이 지나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기도하지 않았다면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해서 우리가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페르시아를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우리를 고국 땅에 돌아오게 하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냥 우연히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만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 하신 두 번째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더욱 가까워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더럽힌 당신의 거룩한 이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히려 이방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간구하는 것에 마음에 끌리십니다. 더구나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가까이하는 자녀가 간구할 때,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서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자주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큰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큰 업적을 세우는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 말씀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신 세 번째 이유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더욱 풍성히 주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녀들에게만 때를 따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햇볕을 비춰주심으로 추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시는 것입니다.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브루스 윌킨슨(Bruce H. Wilkinson)이 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존이라는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천국문 입구에서 베드로의 안내를 받으며 천국을 구경하던 중에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을 하나 보게 됩니다. 존이 그 안을 보고 싶다고 하자 베드로는 ‘안 보는 게 나을 거’라며 보여주기를 꺼려한 듯합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감추려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것처럼, 베드로가 그럴수록 존은 더 보고 싶었습니다. 천국의 안내를 다 받은 후에 존이 다시 베드로에게 ‘그 건물 안을 보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마지못해 베드로가 존을 그 건물 안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 건물 안에는 바닥부터 천정에 이르기까지 선반들이 있고, 그곳에는 빨간색 리본에 이름이 쓰여진 상자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존이 ‘자신의 것도 있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있다고 말하며, ‘나 같으면 열어보지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존은 기어이 자신의 이름표가 붙여진 상자를 찾았고, 그 상자를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말처럼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수많은 복들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복을 준비해놓으셨는데, 자신이 기도하지 않아서 받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천국 창고에 쌓여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을 풍성히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 복을 간구하지 않고, 누구나 받아 누리는 것만 받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의 포로기간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때 엄청난 것들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 예만 보겠습니다. 에스라 6장의 기록입니다.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에스라 6:9) 포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에, 고레스 왕이 그렇게 명령한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함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라고 말입니다. 고레스는 바벨론 왕이 아닙니다.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데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시대에 빼앗아왔던 성전 기명들을 다 가져가게 하고, 뿐만 아니라 매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준 것만도 엄청나게 선심을 베푼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성전건축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대로 다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다 얻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신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할 때 필요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단 우리가 그렇게 이루어 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