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하게 된 씨

< 본문 마태복음 13:1-9 >

 

신명기 3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신명기 30:11) 그러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 율법은 구시대적이야!’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주신 말씀이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우리들이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여러분, 혹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또 간혹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말씀은 참 은혜스러운데 왜 말씀대로 살려면 잘 안 되는 것일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런 생각 해보신 것은 없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준 명령(말씀)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야. 어디 먼 곳에 있어서 멀리 가서 찾아와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이해되지 않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어서 충분히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때로 말씀을 지키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요?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몇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의 마음에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데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내 안에 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데 굳이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갑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말씀에 대한 갈급함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아도, 말씀을 읽지 않아도,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말씀 없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으로는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말씀을 지키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거나 들었을 때에는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막상 말씀을 따라 살려 하다 보니 걱정이 생깁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알겠는데, 오늘 우리 시대에 그 말씀대로 하면 손해 볼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 수 없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을 읽었을 때 오늘날에는 그렇게 살면 바보 취급을 당할 거야!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은 놈이라고 놀릴 거야!’ 라고 생각하고는 아예 그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내 삶에 주도권을 잃어버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할 수 없을 것같은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때로 말씀을 따라 살려 해보지만 내가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듣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니까 말씀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때로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순종하는 것처럼 사니까 말씀이 주는 능력과 기쁨,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 때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는 시인의 고백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편 19:10)라는 다윗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능력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옭아매는 족쇄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내 신앙의 모습이 혹 이렇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한다 하면서도 신앙에 기준이요 힘이 되는 말씀에 관심조차 갖지 않고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말씀을 기쁨으로 듣긴 듣지만 말씀대로 살 자신도 없고, 현실적으로 그 말씀대로 살다가는 손해만 볼 것 같은 생각에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살아오진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씀이 주는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오진 않으셨습니까?

  분명한 것은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았던 사람들은 죄악이 만연된 세상을 살더라도 승리하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신앙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때로는 그 말씀대로 살다가 오히려 손해만 보고 남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것 같은데 말씀대로 살았더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신명기 30:11)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고상해서 우리같은 인간이 결코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보니 말씀이 나를 이끌어 그 말씀에 맞추어 살도록 나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편 19:10)라는 고백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네 주째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는데, 이것은 말씀을 듣긴 들었는데 깨닫지 못하거나 그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이 전혀 없을 때에는 마귀가 와서 그 복음의 씨앗을 빼앗아가버린 경우입니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오는 것 같더니만 해가 돋을 때에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받을 때에는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 신앙인지라, 그 말씀대로 살려다 보니 어려움이 생겨나고 말씀으로 인해 손해가 될 것 같은 때에는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이 찾아올 때에는 거기에 넘어지고 맙니다.

  오늘은 네 번째 좋은 땅에 떨어진 씨, 그래서 100, 60, 30배 결실한 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좋은 땅이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좋은 땅이란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농사에 가장 적합한 땅을 말합니다. 그곳에 씨가 떨어졌으니 열매를 맺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땅은 원래부터 열매 맺기에 적합한 땅이었겠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렇거니와 특별히 이스라엘 지역에는 그런 땅이 결코 많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 서쪽의 해안 평야지대는 그래도 비교적 비옥한 땅이고 강우량도 많아 농사짓기에 적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리 지역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질이 주로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지하에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갈릴리 북부 지역에는 연간 강우량이 1,000mm 정도 되는데도 물을 모아 저장할 수가 없습니다. 물이 모아지지 않는 땅이기에 곡식이 자라기에 좋은 땅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땅은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토질과 환경이 좋지 않는 그 지역에 어떻게 좋은 땅이 가능할까요? 토질과 환경이 좋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땅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산을 개간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좋을 듯합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억척스러운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갈아엎으면서 땅속에 있는 돌을 제거해야 하고, 잡초나 가시떨기처럼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거름도 주고 때때로 물로 주면서 농사짓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세 종류의 땅, 길가나 흙이 얕은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울창한 밭이라 하더라도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 좋은 땅이 됩니다.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다니며 다져지고 다져져서 단단한 길바닥이 되어버린 땅이라 하더라도, 그 땅을 파고 뒤집어엎고 거기에 거름주기를 반복하면 몇 년 후에는 곡식이 잘 자라는 좋은 땅이 됩니다. 마찬가지도 흙이 얕은 돌밭도 돌을 제거하고 갚아 엎어 거름을 주면 언젠가 곡식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됩니다. 가시떨기가 숲을 이루는 곳이라 하더라도 가시떨기를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내 갈아엎으면 그 땅도 좋은 땅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맺도록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그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우리 마음이 말씀이 심겨지지 않는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떨기가 무성한 황무지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처음부터 좋은 땅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죄에 종노릇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마음에 마귀가 심어놓은 가시나무들이 가득했고, 애굽의 바로 왕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져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강퍅한 마음이었습니다. 어쩌면 길가보다, 그리고 돌짝밭보다 더 강퍅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아무리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굳어진 마음의 밭을 갈아엎도록 나를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난의 풀무불에 던져 불순물을 제거하시든, 아니면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시든, 아니면 원망과 분노의 쓴뿌리를 뽑아내시든, 나를 어떻게 만드시든지 나를 변화시켜주시도록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의 밭에 있는 것들을 제거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있는 돌맹이가 제거되고 가시떨기가 뽑혀진다 해서 곧바로 좋은 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돌맹이가 제거되고 가시떨기가 다 뽑혀진 땅이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단비가 내려져야 합니다. 아무리 논과 밭을 갈아엎어 놓았다 하더라도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곡식을 심지도 못하고, 심어놓은 곡식이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밭에 심겨진 말씀의 씨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갈아엎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단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 단비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도 한 번 경험한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양질의 토양이 되기 위해서는 비가 내리고 또 내리는 일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 조금씩 좋은 토질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 마음의 밭이 좋은 땅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말씀이 심겨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주자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려야 합니다. 수시로 이슬이 내려야 하고, 때로는 샘이나 우물에서 물을 길어 그 땅에 뿌려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좋은 땅, 열매가 맺히는 좋은 땅이 됩니다.

 

이제 막 개간한 땅에서 첫해부터 좋은 열매가 맺혀지길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간척지들이 있습니다만, 그 간척지에서 좋은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여러 해를 걸쳐 물을 넣었다가 빼고, 또 벼 심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좋은 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큰 은혜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내 삶에 곧 많은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은혜를 수없이 경험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때로는 예배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은혜도 경험해야 하고, 사죄의 기도를 통해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시는 은혜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되는 기쁨도 맛보아야 하고, 찬양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도 맛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깨달음으로 감격하는 마음도 느껴보아야 하고, 설교를 듣는 중에 이 말씀이야 말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구나!’라고 들려지기도 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내 삶을 이끌어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느껴보아야 하고, 십자가를 묵상하다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내 심령에 강한 전율처럼 느끼지기도 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은혜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은혜들이 쌓이고 쌓이면 개간한 땅이 물과 거름을 통해서 좋은 땅으로 변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말씀의 씨가 심겨져 열매 맺는 좋은 땅으로 변해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길가와 같은 땅이 좋은 땅으로, 흙이 얕은 돌밭이 좋은 땅으로, 그리고 가시떨기가 무성한 땅이 좋은 땅으로 바꿔지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은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하더라도 그 땅에 심겨진 씨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야고보서 5:7-8절에서 말씀합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그렇습니다. 논에 모를 심어놓고 내일 당장 가서 수확하겠다고 생각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만일 그런 농부가 있다면 그는 분명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곡식을 심어도 기다려야 하고, 과수나무를 심어도 몇 년씩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맺혀집니다.

  그 과정에서 농부는 땀 흘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물이 더 필요할 때에는 물을 대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논으로 나갑니다. 때로는 가라지를 뽑아내기 위해서 뙤약볕에서 땀을 흘려야 합니다. 병충해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농약을 하거나 벌레를 잡는 수고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뿌려지고 심겨진 씨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도 그런 수고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마귀가 와서 심겨진 말씀의 씨를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박해가 찾아오더라고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이 우리 마음을 흔들지라도 결코 거기에 내 마음을 빼앗지기 않도록 날마다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인내와 수고의 과정을 거쳐야만 내 마음 밭에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석해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누가복음 8:15) 그렇습니다. 인내로 결실합니다. 인내하는 과정 없이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으니라.”(8)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반드시 풍성하게 열매를 맺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풍성히 맺혀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밭이 어떤가에 따라서 열매 맺는 양이 달라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좋은 땅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땅 중에서도 더 좋은 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땅이라고 모두 같은 땅은 아닌 것처럼, 좋은 땅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더 좋은 마음의 밭을 가졌기에 더 많이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깊이 갈아엎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거름을 주고 얼마나 충분한 물을 공급해 주느냐에 따라서 더 좋은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얼마만큼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자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지에 따라서 더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겨진 말씀을 통해 결실하기 위해서 얼마나 인내하며 기다리느냐, 얼마만큼 힘든 과정을 잘 견디어 오느냐에 따라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마음은 어떤 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이라고 하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혹 말씀을 듣긴 듣지만 곧 말씀을 잊어버리는 길가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혹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을 받긴 받지만 말씀으로 인해 찾아오는 환난이나 박해 때문에 신앙의 길을 포기해버리는 돌짝밭과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혹 말씀을 받고 잘 자라는 것같다가 세상의 염려나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열매 맺는 데까지 가지 못하는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지금 어떤 밭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길가와 같이 단단한 땅도 갈아엎으면 좋은 땅이 됩니다. 흙이 얕은 돌밭일지라도 돌을 제거하고 거름을 주고 가꾸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밭일지라도 가시떨기를 잘라내고 뿌리를 뽑아내면 좋은 땅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좋은 열매를 드리기 위해서 내 마음에 심겨진 씨앗을 잘 자라도록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꾸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린도전서 3:6) 그렇습니다. 심고 물주는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돌을 제거하고 가시떨기를 뽑아내고 물을 주어 좋은 밭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것만 준비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 열매는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말씀이 심겨져서 열매 맺혀지도록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십시다. 내 마음의 밭을 잘 준비하여 좋은 땅이 되도록 우리 마음의 밭을 개간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반드시 맺혀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