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성령님(행 9:17-22)
전라도의 명산인 지리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지리산은 정말로 아름다운 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리산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때 제 마음이 지리산을 그렇게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더 그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좋아지면 저절로 행복해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것이 맞는 말 같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반쪽짜리 진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이 달라져 본들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옛날보다 훨씬 더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행복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겉치장을 화려하게 해도 본질상 죄인에 불과합니다. 렘 17:9에 보시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우리 인간의 본질이 쉽게 바꾸어질 수가 없습니다. 렘 13:23에 보시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흑인의 까만 피부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표범의 반점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결심하고 노력하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되기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변하지 않는 내 자신의 모습이 정말로 미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으로는 가능할까요? 물론 조금은 변화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변화라기보다는 마치 겉포장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좀 더 교양 있게 보이고 세련되게 보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교육이나 지식으로도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뭐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고학력 시대입니다. 많이 배워서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땅에 범죄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문명지수가 높아질수록 범죄지수도 같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큰 범죄자가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든 법이나 공권력으로는 가능할까요? 일시적으로 악을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그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사람이 쉽게 변하던가요? 물론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교화가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더 악해지고 더 못된 것을 배워가지고 나오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우리 인간은 좋은 쪽으로는 잘 변화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세의 징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성의 타락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딤후 3:1-3에 보시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 돈을 사랑하며 / 자랑하며 / 교만하며 / 비방하며 / 부모를 거역하며 / 감사하지 아니하며 / 거룩하지 아니하며 / 무정하며 /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 모함하며 / 절제하지 못하며 / 사나우며 /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배신하며 / 조급하며 /자만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앞으로 우리 인간은 더 악해질 것이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점점 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양가사에도 보면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가고 온 거리마다 넘쳐나는 죄악의 물결]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고후 5:17에도 보시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죄인인 우리가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딛 3:5에도 보시면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 라는 말씀입니다.
슥 4:6에도 보시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즉 성령)으로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그런 비슷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울의 변화가 그렇습니다.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변했나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근본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변하면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 4:11 이하에 보시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됩니다. 내가 변하면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변화된 삶을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심은 회개와 같은 말인데,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변화되는 것을 회심(回心)이라고 말을 합니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사울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보고 다 놀랐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놀랐느냐 하면 21절에 보시면 "...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놀랐다]라는 단어는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충격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22절에도 보시면 "...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직후에 바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핍박자였던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고, 나중에는 순교자가 됩니다. AD 67년 네로 황제 때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바울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3절 이하에 보시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핍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난까지도 감수하면서 바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이 결국 로마를 변화시키고, 유럽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바꾸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 말고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바울일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런 극적인 변화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을 변화시킨 주체는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아나니아를 보내 바울에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에 그가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다른 것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먼저는, 바울의 영혼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눈이 치료됨과 동시에 영적인 눈이 뜨여진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리니까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 더 나아가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시면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답답하고 말씀을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예수님이 너무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어도 그의 영혼이 얼마나 곤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 3:6에 보시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은 부모님이 낳아주시지만 우리 영혼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로 죽었던 영혼이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람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권세도 부도 명예도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족함이 없었고, 결코 행복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품 안에 안기기 전까지는 내 영혼에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세와 명예를 추구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했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바울의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빌 3:7~9에 보시면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집착했던 것들을 이제는 아예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했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뭐가 생긴 것입니까? 꿈이 생기고 비전이 생긴 것입니다. 비전이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별것도 아닌 데 거기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처럼 영안이 열리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소꿉장난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런 일은 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유치한 행동을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뭐가 달라진 것입니까?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헨렌 켈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시각, 청각, 언어 3중고를 겪는 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신앙으로 변화되어 하버드 출신의 세계적인 교육가로 많은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비전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더 이상 먹고 마시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더 수고하고 땀을 흘리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한 인생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의 인격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원래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살기가 등등했던 바울이 아나니아 앞에서 마치 순한 양처럼 변해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온유해지고 겸손해졌는지 모릅니다.
이름이 바뀐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성령을 경험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 이름을 바꾼 것 같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인데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딤전 1:15에 보시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훨씬 나중에 했던 고백입니다. 갈수록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모습입니다.
한국 초대교회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 연동교회 초대 장로인 고찬익 장로님에 대한 일화입니다. 그분은 원래 노름꾼에 술꾼에 사기꾼이었습니다. 한번은 관가에 끌려가서 매를 실컷 두들겨 맞고 벙어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빚 독촉까지 받게 된 그는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독약을 먹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 연동교회에 시무하시던 게일 선교사님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담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전도지가 그에게 건네졌습니다. 그날 밤 꿈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대답도 못하고 [고... 고...] 하다가 나중에는 떨리는 음성으로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 망나니올시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울면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는데, 그분이 꿈에서 깨어나 전도지를 읽다가 혀가 풀리면서 다시 말을 하게 되는데... 결국 게일 선교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직접 만든 신발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는 과거에 도적놈에다 싸움꾼, 사기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만든 신발을 드리겠습니다. 꼭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스스로 잘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령님만이 우리를 변화시켜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가 더 강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바꿔]라는 노래가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꿔'라는 말속에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되었든, 가정이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 압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라는 사실도 누구나 똑같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겠습니까?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나를 바꾸고 나를 개혁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겠습니까?
나를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나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힘입니다. 나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나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지만 나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나를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를 확실하게 바꾸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방인 전도를 위해 바울을 변화시켜주시는 내용입니다.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울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바울처럼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서도 세상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꼭 바라봐야 할 것만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완전히 반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바울처럼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을 적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말의 수준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해야 할 말... 해서는 안될 말을 잘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말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세워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소망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죽이는 말을 했지만 성령을 받은 후에는 살리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유대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처럼 삶의 틀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삶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집안의 가구를 옮겨서 다시 배치하는 것처럼 삶의 틀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남이 섬겨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가 먼저 섬겨주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침례교 신학교의 설립자요 교장인 캐롤 박사님이 하루는 시골 전도사님이 자기 집에서 잠을 자는데 아침에 그 전도사님의 구두를 닦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이 깜짝 놀라서 구두를 못 닦게 하니까 캐롤 박사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자의 구두를 닦아드리는 것이 나에게는 영광이요, 기쁨입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해야 합니다. 또 이웃들 앞에서도 항상 정직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낮은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잘 섬겨야 합니다.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일군으로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누리게 되는 혜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선은 우리가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영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역할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이런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축복들을 마음껏 누리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