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의 바른 관계
(야고보서 2:8-13)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이라는 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고, 그러기에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 형성이 바로 된 인간이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강해 열네 번째 시간인 오늘에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앞에서 말씀드린 세 대상 가운데 성도가 어떻게 이웃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지난 몇 시간동안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가 이웃을 대함에 있어서 그 어떤 이웃도 차별하며 대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이웃을 차별하며 대하지 않으려면 이웃을 인간의 관점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이웃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 그리고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과 바꿀 만큼 사랑하는 존재, 그리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대하는 존재라는 그런 관점으로 이웃을 보고 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우리는 이웃을 대함에 있어서 그 이웃을 인간의 관점, 즉 인간의 판단이나 생각가지고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웃을 대하게 되면 우리는 분명 인간을 차별하는 옳지 못한 일들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이웃을 향한 선교와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와 구제도 이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한 가운데 행하게 되면, 그 구제나 선교는 바른 구제나 선교가 되지 못하고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가 되거나 자기 우월함을 나타내 보이는 자기 과시의 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는 이웃을 보고 대함에 있어서 그 이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고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웃을 차별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고, 이웃과의 관계도 바르게 형성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성도가 맺어야 할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성도가 어떻게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야고보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권면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하기 위해 첫 번째로 권면한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명령에 우리가 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반기독교적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이나 자유주의적인 신학이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다른 책과 비교해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의 권위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권의는 성경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대로 오늘 이 시대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해 오늘의 시대는 성경을 그저 보통의 책 정도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권위는 신학자들의 논리 정연한 신학적 이론이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는 믿는다고 외치는 신앙인들의 큰 소리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권위가 어떻게 지켜질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방법은 신앙인들 하나 하나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에 구체적으로 말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경의 권위는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에 구체적으로 말씀이 나타난다면, 즉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 복도 받고 거룩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 불신앙의 사람들까지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고 높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권위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신앙인은 성경의 말씀에 그저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정 그렇게 살아야 신앙인답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받고 거룩하게 살 수 있고, 그런 삶을 통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권위를 보여주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로 하여금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하시기 위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명령이 무엇입니까?
그 명령은 방금 읽은 8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야고보는 8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법 가운데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이 말씀에 나오는「최고의 법」을 영어성경에서는「Royal Law」,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의 법」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럼「최고의 법」(Royal Law)이란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최고의 법」이란 말씀의 의미는 온 우주와 모든 역사를 통치하시는 왕 중 왕이 주신 계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왕 중 왕(King of Kings)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온 우주와 모든 역사를 통치하시는 왕 중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왕 중 왕이신 예수님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온 우주와 모든 역사를 통치하시는 왕 중 왕이 주신 최고의 법입니다.

둘째, 「최고의 법」이란 말씀의 의미는 모든 율법들 가운데 왕과 같이 가장 귀하고 으뜸인 계명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웃 사랑을 율법과 관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또 갈라디아서 5장 14절 말씀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여러분! 이 두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두 말씀의 의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바로 이해하고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바로 이해하고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고, 반대로 이 계명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지키는데 실패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우리의 신앙 수준을 결정해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그러기에 모든 율법들 가운데 왕과 같이 가장 귀하고 으뜸인 계명입니다.

셋째,「최고의 법」이란 말씀의 의미는 신앙의 핵심적 내용이 되는 계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와서 계명 중의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씀해주고 있는 하나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말씀해주고 있는 이웃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적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내용을 하나님 사랑으로만 국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신앙의 두 핵심 가운데 하나를 놓치는 잘못된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사랑만을 신앙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 정도는 무시해도 신앙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합니다.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의 뜻은 많은 법들 가운데  단 하나만 어겨도 어긴 그 사람은 범법자가 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은 심판받을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모든 이웃을 다 귀하게 여기지 않고 차별하여 대한다든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신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야고보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최고의 법, 즉 왕 중 왕이 주신 계명이고 율법들 가운데 가장 귀하고 으뜸인 계명이며 신앙의 핵심적 내용이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진정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최고의 법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최고의 법이라 하시며 지키라하신 그 명령에 순종하여 지금 자신이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이웃을 차별하며 대하고 있지 않는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살펴봄을 통해 자신이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웃을 차별하며 대하고 있다면 우리는 속히 회개해야 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법으로 주신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이기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이웃을 차별하며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죄 가운데 가장 무서운 큰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언제나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가 우리가 이웃과 맺어야 할 바른 관계입니다. 사랑으로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하기 위해 두 번째로 권면한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을 늘 기억하며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기독교 신앙이 가르쳐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전,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사건은  방금 읽은 말씀에 나오는 심판입니다. 분명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심판 받게 될 내용으로 가운데 하나는 이웃과 맺어온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분명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중요한 내용입니다. 야고보는 특히 방금 읽은 12절과 13절 말씀에서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심판받게 될 내용으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그 첫째 내용은 이웃에게 했던 말이고, 둘째 내용은 이웃에게 취한 행동이며, 셋째 내용은 이웃에 대한 태도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그 마지막 때에 우리가 이웃에게 했던 말을 가지고 심판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과 37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하는 말을 늘 듣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이웃에게 용기와 위로와 칭찬의 말을 하며 살았는지, 아니면 우리가 이웃에게 비난과 조롱과 무시의 말을 하며 살았는지 다 알고 계신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는 자신이 이웃에게 어떤 말을 하며 살아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며 살았다면 이제는 말을 고치며 살아야 합니다. 분명 우리가 한 말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둘째,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그 마지막 때에 우리가 이웃에게 했던 말과 함께 이웃에게 취했던 행동에 대해서도 심판을 받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도망자의 신세가 된 다윗이 바후림이라는 곳에 갔을 때 거기 살고 있던 시므이라는 사람이 취한 행동이 나옵니다. 그 때 시므이는 다윗을 위로하며 대접하기보다는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다윗이 그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자, 그 때에도 가는 길에까지 따라와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시므이의 행동에 다윗은 대응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하 16장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즉 그런 시므이의 행동을 하나님이 심판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에도 그렇게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심지어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더 큰 아픔을 주는 그런 행동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웃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행동은 분명 마지막 때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는 그동안 이웃에게 취했던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행동이 있었다면 용기있게 그 이웃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셋째,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는 이웃에게 한 말, 그리고 이웃에게 취한 행동과 함께 우리의 이웃을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심판을 받습니다. 13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해 반드시 소유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 태도는 방금 읽은 말씀에 나오는 대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긍휼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엘레오스(ἔλεος)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함께’라는 단어와 ‘감정’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긍휼이라는 단어에는 ‘함께 느끼는 감정’, 즉 ‘공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분명 긍휼은 이웃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며 그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웃에 대한 긍휼의 태도는 마지막 심판 때 심판의 내용이 됩니다. 방금 읽은 13절 말씀에도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만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같은 의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는 이웃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쁨도 함께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누려는 태도로 이웃을 대했는지, 아니면 이웃의 기쁨에 배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은근히 고소해 하는 태도로 이웃을 대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정 우리가 이웃을 긍휼의 태도로 대하게 되면 이웃도 우리를 긍휼한 태도로 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로 대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엄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심판을 의식하며 매일 매일을 산다면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는 잘못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하는 말과 취하는 행동과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이웃을 대한다면, 우리는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 수 있습니다. 심판을 기억하며 이웃과 사랑으로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와 하나님의  심판을 늘 기억하는 자세로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가 이웃과 바른 관계입니다. 분명 이웃과 사랑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는 인간은 그가 어떤 지위와 부귀를 얻었다 해도 그 인생은 실제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는 신앙인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사람 역시도 그 사람의 신앙연수와 직분이 아무리 오래 되었고 큰 직분이라 하여도 그 신앙은 실제 실패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으로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그래서 인생도 신앙도 실패하지 않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