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

 

눅 7:11-17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셋 나옵니다. 하나는 막 5장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둘은 요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셋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차별화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랍비라거나, 선지자라거나,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등 말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의 작은 마을인 나인성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한 장례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러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과부를 찾으셨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례행렬 안으로 들어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 말씀이후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선지자가 아닌 큰 선지자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두루 퍼졌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13절을 보면 “불쌍히 여기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과부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글자 그대로 ‘과부’입니다. 이미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의 사별의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남편과 사별할 때보다 그 슬픔은 훨씬 컸을 것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슬픔은 이 여인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 죽고 겨우 아들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그 아들마저 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을까요? 지금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않을 수 없어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제대로 걸을 수는 있었을까요? 아마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이 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원어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γκνίζομαι)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창자가 뒤틀리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며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슬픔을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애끊다.”라는 말입니다. 너무 슬퍼서 창자가 다 끊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유행가 중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아리고개만 생각하면, 공산당에게 끌려가 소식이 없는 남편 생각에 단장 즉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 밀려온다는 노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과부를 보실 때 단장의 슬픔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연민’(憐憫)과 ‘공감’(共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을 보며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질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연민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sympathy’라는 말입니다. “함께”라는 뜻의 ‘syn’과 “느낌” 또는 “고통”을 뜻하는 ‘pathos’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옆에서 누군가의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공감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empathy’라는 말입니다. “안에”라는 뜻의 ‘em’과 “느낌” 또는 “고통”을 뜻하는 ‘pathos’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가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느끼고 겪는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함께 가슴 아프게 느끼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는 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장례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과부의 고통와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과부를 연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과부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느끼시며 공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보고 아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주목해 보시고 그 슬픔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으시고 또 함께 슬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파하시며 우리를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공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울지 마라”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을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으로 함께 느끼시면서 이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상을 당한 가정을 위로 차 방문합니다. 가서 조문도 하고 예배도 드립니다. 그러면서 늘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큰 슬픔으로 눈물 짓는 유족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울고 있는 분들에게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울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잡아드리고 옵니다. 만일 말해야 한다면 “주 안에서 위로 받으십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며 성경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세 번 모두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울고 있는 유족들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조금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울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족들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주님의 위로, 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한 번은 미국 시카고 구세군센터에서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부스 터커(Booth Tucker)목사님이 “하나님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한 남자가 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따지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로요? 만일 당신의 아내가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면서 칭얼대고 있다면,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 기차 탈선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전 누군가 저에게 아내를 잃는다면 그 때도 위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여기 계시다면 이제 그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시다시피 제 아내가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이 순간 그분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로 이 슬픔을 견뎌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하십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저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본문 14절을 보면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보고 슬퍼하고만 계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부가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 과부를 도와주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관에 손을 대는 일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율법에 시체나 무덤이나 주검과 관련된 것을 만지는 일은 부정한 일이기 때문에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율법의 금기를 깨시고 지금 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결단하시고 나서신 것입니다. 율법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신 것입니다.

  방송인 안문숙씨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탤런트가 되어 연예계에 발을 들어놓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연예인이 되어 생각지 못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힘이 들어 큰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주님께서 이분을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 초인종이 울려 엄마가 나가보았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전도지를 전해주면서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소심해 보이고 자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엄마가 문전 박대하며 내쫓았고 소금까지 뿌렸습니다.

  그 후 이분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자신도 없으면서 왜 우리 집에 전도하러 왔습니까?” 그 때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안문숙씨가 떠올랐습니다. 한 번도 누구에게 전도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도하라는 명령이라 생각해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이 분의 집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엄마부터 식구들이 차례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신자들이 원래 꿈을 잘 믿고 꿈에 약합니다. 엄마가 밤에 꿈속에 십자가를 보고는 자다가 깨서 소리를 지르면 달려 나왔습니다. 이분도 꿈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연속되자 엄마가 찜찜해서 안문숙씨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에 가야할까 보다. 너 먼저 지난번 전도하러 온 사람 따라서 교회에 가봐라.” 그래서 교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기 인생에 개입하신 뒤 자기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개입하셔서 그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을 하신 대상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상이 바로 죽은 시체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벌써 죽은 뒤 며칠 됐고, 염을 하여 관에 넣어놓은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두 번의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서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막 5:41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리고 요 11:43을 보면, 나사로를 살리실 때 무덤 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시체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강을 넘어가서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의료진들이 환자를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특히 응급환자인 경우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간 안에 병원으로 이송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앰뷸런스 안에서도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하며 죽음을 막아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병원에서는 응급환자가 도착하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심박이 멈추면 끝입니다.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리고 흰 천을 덮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료행위를 중단합니다. 진료하던 의료진들이 다 떠납니다. 가족들도 더 이상 곁에 있지 못하고 슬픔 가운데 그 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한계입니다.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무엇인가 몸부림치며 하던 노력도 이 한계 전까지만 합니다. 희망을 가져도 이 한계 전까지만 갖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이 한계를 알고 이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안 될 거야. 그것은 기도해도 소용없을 거야. 마음으로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한계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데도 포기하고, 믿고 나갈 수 있는데도 주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히 11:19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믿음으로 순종했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실제 칼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 여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일으키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능력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저앉아있는 영혼들,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침체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주시옵소서.” “우리 가정, 우리 사업, 우리나라를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