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십계명의 해석과 적용
본문 : 신명기 5:1-6
1.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제목 : 십계명을 주신 네가지 목적
본문 : 신명기 5:22-29
신명기 5장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Ten Commandments’(열 가지 명령들)라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Ten Words’(열 가지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모세에게 주신 세 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법’(Ceremonial Law)입니다. 의식법은 ‘제사를 어떻게 지내며 제사장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법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절기와 의식은 ‘예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림자와 같은 예표를 모두 ‘실체’로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식법이 폐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의식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둘째는 ‘시민법’(Civil Law)입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의 나라법인데 의식법과 같이 모두 다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신정통치 국가로서의 법도 있고 형법과 민법 같은 일반적인 법도 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도 재해석되고 적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는 ‘도덕법’(Moral Law)입니다. 17세기에 나온 신앙고백서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이것보다 더 탁월한 것이 1689년에 나온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서’인데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모체가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고백서는 거의 똑같습니다.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고 또한 신앙 교육을 하기 위해서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만들었습니다. 대요리문답은 주로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참조하라는 문답이고 소요리문답은 주로 평신도들이나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고 암송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문답인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터 대요리문답 문93항에서 ‘도덕법이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라고 했습니다. 또 문94항에 보면 ‘인간은 타락한 후에는 도덕법에 의해서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크게 소용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구원받지 못한 자나 구원받은 자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이 될 수 있고 신약시대에도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십계명은 법을 공부하는 것인데 실제로 고시공부하는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괴롭고 딱딱하고 지루한 공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답관체(踏冠體)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답관체란, 각 단어의 머리글자를 말(단어)로 시작하는 것으로 히브리어 알파벳이 22개인데 첫 글자를 머리글자로 해서 8개의 절씩 나누어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답관체로 쓰여졌기 때문에 22˟8=176으로 176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절이 다 ‘하나님의 율례, 주의 법도, 주의 증거의 도’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들이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서 꿀을 옆에다 놓고 성경을 읽게 했는데 나중에는 꿀 보다도 성경을 더 재미있어 한다는 것입니다. 또 시편 119편 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법이 즐거움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망하였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저 자신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씀도 시편 119편 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리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입니다. 인생에 큰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누구에게 주시는가하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에 큰 장애물이 있을때 우리는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편 1편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네 가지 대답을 하고자 합니다.
I. 십계명은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to show sins)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십계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칼빈과 루터는 이것을 율법의 ‘제1일 용도’라고 했습니다.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에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탐심하지 말라’했기 때문에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4절에도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Break the Law’(법을 거역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죄냐하면 십계명을 거역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개념을 수평적인 사람과의 관계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은 교회만 안 나갔을 뿐이지, 예수만 안믿었지 아주 착하게 살았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나가는 것이 죄가 아닌가요? 교회 안나가는 것이 죄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데 주일날 안식일을 안지키는데 죄가 아닙니까? 물어보겠습니다. 4계명과 5계명중 누가 더 큰 죄인이겠습니까? 저는 4계명을 어긴 사람이 더 큰 죄인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보면 주일날을 안지키는 사람은 6계명 살인자보다도 더 큰 죄인이라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까?
예전에 모방송국에서 방영된 ‘유나의 거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중 한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 역할이었고 또 한 여자는 소매치기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가 참 인상깊었습니다. “나는 소매치기니까 8계명을 어겼지만 그런데 너는 간음했으니까 7계명을 어긴게 아니냐 그러면 누가 더 나쁘겠냐?”고 하면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저렇게 죄인들도 십계명을 다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4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과 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까? 저는 4계명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일날 예배를 안드리고 놀러 가거나 집에서 쉬는 것을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무엇인지를 정해준 것이 십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일이 잘 안풀리면 ‘오 하나님’(oh my God)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으면 “주여! 주여!” 합니다. 도데체 주의 이름을 왜 그런데 쓰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왜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대인관계’에서만 생각하지 ‘대신관계’에서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십계명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이고 이 죄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한 가지라도 어기게 되면 죄를 짓는 것이고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서 영원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암4기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심각한 것입니까? 왜냐하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의사를 만나 정밀검사를 받고 난 후에 의사에게서 “당신은 암4기이나 치료받으면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의사 말을 들어야 되듯이 십계명을 통해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루터와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1용도’라고 한 것입니다.
II. 십계명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사람은 십계명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고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존 칼빈(Jean Calvin)은 칼빈주의 5대교리를 말하면서 첫 번째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십계명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 영생을 얻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I am slave to sin)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아무리 십계명을 지키고자 해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고 선을 행하고자 해도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적무능력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지킨 것이지 그것을 온전히 다 지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마음도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6계명과 7계명을 가지고 설교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27~28절에서는 7계명에 관해서 설교를 하시면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운전하다가 예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7계명을 어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6계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라가’(Raca)라는 말은 번역이 안되서 그대로 쓴 것인데 그 뜻은 ‘멍텅구리, 어리석은 자’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보고 이렇게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행위로서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살인죄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이라는 것은 사람이 다 지켰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너무나 어려운 것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을 보게 되면 십계명이 93항부터 152항까지 무려 59개항이 십계명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가 200개항이 안되는데 거의 1/3이나 십계명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요리문답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17세기의 청교도들이 십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문145항의 질문을 보면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라고 되어있는데 그 답을 보게 되면 굉장히 깁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우리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웃이 지니고 있는 진실과 좋은 평판을 특히 공적 재판 사건에서 해치는 모든 일이나...비진리를 말하고 거짓말하고 중상하고 험담하고 훼방하고 고자질하고 수군수군하고 냉소적이고 욕설함이며 조급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또 남의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는 것이며 거짓 소문을 내는 것이며 나쁜 보도를 받아들이고 동조하는 것이다” 이만큼 자세하게 진지하게 계명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평판을 깍아내리는 것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을 욕설하고 수군수군 하는 것이나 그것을 듣고 맞장구 치며 동조하는 것들이 다 9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간중간 간략하게 말해서 그렇지 그 안에 다른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계명 하나하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문149항의 질문을 보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가?’라고 되어있는데 답은 “아무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언행심사 간에 매일 계명을 범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III. 십계명은 인간에게 ‘구주’(Savior)가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내가 십계명을 지켜서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나를 구원해주고 용서해 줄 수 있도록 남의 힘이라도 빌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에게 힘을 빌려 줄 수 있는 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이라는 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주인의 아들이 학교에 안가려고 하면 몽둥이 들고 때려가며 학교에 데려다 주는 힘센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선생은 아니지만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夢學先生)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스스로 구원할 능력은 없지만 구원할 능력이 있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식법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도덕법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두 가지 일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사는 것도 중요하고 죽으신 것도 중요합니다. 죽으신 것은 율법을 어긴 죄값을 대신 갚으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사신 것은 의가 없는 죄인들에게 완전한 의를 나눠주기 위해서 십계명을 100% 다 지키시는 완전한 의를 주시기 위해서 사신 것입니다. 학자들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어긴 죄인들의 죄값을 갚아주기 위해서 죽으신 것을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의를 이루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사신 것을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두 가지 순종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통해서 자신의 죄와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분을 믿고 영접하게 되면 두 가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십계명을 범한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의인(義認) 전가’ (Justification)를 받아서 그 의를 예복처럼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천국에 들어갈지 안갈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거나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어 언제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에 하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고 3장 28절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수동적 순종’ (Passive obedience)과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죄사함을 얻고 의롭다함을 얻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의 전적 무능력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서 결국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IV. 십계명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기준’(Standard of the Life)이다.
모든 인간은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간에 십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십계명과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문96항 ‘도덕법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들의 양심을 그것으로 일깨워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게 하며...죄의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하여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불신자들에게도 죄를 억제하고 죄의 심판을 받을 때에 핑계될 수 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루터와 칼빈은 ‘율법의 제2용도’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대요리문답 문97항 “도덕법이 중생한 자들에게는 무슨 특별한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감사하게 하며 이 감사를 표시하려고 그들의 생활법칙으로서 도덕법을 더욱 더 조심하며 따르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생활법칙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칼빈과 루터는 이것을 ‘율법의 제3용도’라고 불렀습니다. 십계명은 성도의 생활 법칙으로서의 용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제3용도가 십계명의 가장 기본적인 용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삶의 기준을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해서 십계명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는 십계명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이 나오게 되었는가? 만약 제가 십계명을 설교하는데 누군가 “목사님은 율법주의자”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율법폐기론자나 이단사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단을 퍼뜨리고 설교하는 종을 비방하는 사람입니다. 율법폐기론은 왜 나오는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6장 14절과 갈라디아서 3장 25절을 잘못 해석합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우리 성도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쓸데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 (we are not under the condemnation of the law), ‘우리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 (we are not under the the curse of the law) 이런 말씀이지 십계명이 쓸데없다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신약성경에 모든 계명들이 다 반복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율법폐기론적인 것은 이단사설과 같은 아주 잘못된 해석인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2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에는 도덕법도 있고 의식법도 있는데 이러한 법들이 다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식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얘기이고, 도덕법에서도 도덕법의 제2기능 즉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더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1기능과 제3기능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성도의 삶의 기준, 생활법칙이 되는 것이고 율법적인 기능이 모두 끝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결과로서 십계명을 생활법칙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으려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축복하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메뉴얼’입니다. 십계명은 성도들을 제한하고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행복과 자유를 주고 축복을 줍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축복의 법칙이지 속박의 법칙이 아닙니다.
결론
십계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메뉴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의 인도로 시내산 기슭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큰 음성으로 들려주시자 두려워떨며 모세에게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신명기 5장 29절에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십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지켜나갈 때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지키지도 못할 것을 지키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해도 십계명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십계명이라는 완전한 법을 모범으로 삼고 살아갈 때에 비록 다 못지켜도 그대로 사랑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공부하는 동안 이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고 축복이 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6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오늘부터는 신명기 5장부터 시작해서 십계명에 관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4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서언입니다. 특별히 신명기 4:44-26:19절까지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에 해당되고 이것은 율법 부분에 대한 해설, 율법 강해입니다. 모세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출애굽 2세대를 위하여 모압 평야에서 율법을 다시 해설하고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율법이 복잡하지만 모든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복잡한 율법을 요약하면 다 십계명이요, 십계명은 율법의 요체입니다. 십계명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입니다. 종교에 미친 영향, 윤리에 미친 영향, 법률에 미친 영향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막대한 영향인 것입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서론 부분으로 십계명의 전체적인 관찰과 해석의 원리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I. 십계명이 계시될 때의 상황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십계명은 쉽게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대단히 무섭고, 두렵고, 엄위한 가운데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성경에 두 번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17절에 첫 번째 계시가 되었고 신명기 5장 6~21절에 두 번째로 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9장 9~15절까지는 모세가 십계명을 처음 계시받을 때의 엄위 했던 모습, 얼마나 장엄했는가 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고, 옷을 깨끗이 세탁하고,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고 3일 동안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 기슭으로 인도해서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다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사면으로 지경을 정해놓고 그 이상으로 절대 올라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상으로 올라오는 자는 사람도 죽게 되고 짐승도 죽게 되니까 절대로 그 지경을 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팔을 길게 불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 있다가 산기슭에서 집합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3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기슭에 집합해 있을 때에 아침에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을 보면 엄위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뢰가 임하고 번개가 치고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게 울렸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부는 나팔소리가 아닙니다. 천사가 부르는지 누가 부르는지는 몰라도 나팔소리가 시내산에 크게 울리자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에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에 시내산에 강림을 하셨습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인간이 보기에 두려운 것들은 다 있었습니다. 천둥, 번개, 구름, 불, 연기가 있었고 온 산도 크게 진동하였습니다. 시내산의 온 산들이 다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산이 어떻게 흔들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산이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께는 일도 아닙니다. 포항에 지진이 났을 때 판교에서 집회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묵었던 숙소가 흔들렸습니다. 처음에 생각하기를 건물이 부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포항에 지진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항에 지진이 나도 서울까지 흔들리는데 하나님이 강림하시는데 시내산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강림하심으로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고 나팔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습니다. 이때 모세가 말을 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부르면 하나님은 "나 여기 있다"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한번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야 저 백성들이 네 말을 잘 모르고 경계를 넘어오다 죽을 수가 있으니까 너는 다시 한번 내려가서 절대로 정한 경계를 넘어오지 말라고 얘기해라 왜냐하면 내가 공격해서 죽일까봐 그렇다"고 하자 모세가 듣고 내려가 백성들에게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귀하게 보시고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강림하신 중에도 두 번씩이나 모세를 통해 지경을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산으로 부르시고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가운데서 십계명을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음성으로 직접 들려주신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너는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지니라, 너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지니라, 너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것이니라’ 이것을 하늘에서 음성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었고 음성으로 말씀하실 때 그 엄위한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의 말씀 하시는 음성을 모세가 듣고 그 들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말을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말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말은 하나님이 진노하시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이날을 ‘총회의 날’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6절에 그 날을 ‘총회의 날’ (The day of the assembly)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민법, 종의 율례, 토지 율례에 관한 각종 율례를 주시고 다 받고 내려와 그 모든 율례를 다 기록하고 언약서를 만들어서 피를 뿌려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언약의 식사를 함으로써 출애굽기 24장의 "시내산 언약"을 체결한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는데 모세는 이렇게 시내산을 8번이나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등산을 못 하면 모세도 못 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성도들과 함께 시내산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자정에 그 근처에 도착해가지고 밤 2시에 시내산 등반을 시작하였습니다. 왜 2시에 가야 하냐면 새벽에 해가 뜨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벽 2시에 비몽사몽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시내산을 모세는 무려 8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40일 40야를 금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돌비와 성막에 관한 자세한 계시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처음에는 하늘의 음성으로 들렸고 두 번째는 모세가 40주 40야를 금식할 때에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두 돌비에 양면으로 기록을 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께 두 돌비를 가지고 내려오는데 산 아래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모세의 형님인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너희를 인도해 낸 여호와라’(출 32:4)해서는 사람들이 금송아지 근처에서 술 먹고 뛰고 놀고 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것을 보더니 화가 나서 두 돌비를 던져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모세가 한 성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두 돌비를 깨뜨려버리고 우상 숭배한 3000명을 레위인들을 통해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또 다시 모세는 40주 40야를 금식하면서 ‘이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도고기도’ (Intercession)를 하였습니다.(출 32:11~14) 모세의 도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시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고 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모세는 다시 장막으로 가서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너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돌비를 깎게 하였습니다. 두 돌비를 깎은 모세는 또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가 깎은 두 돌비 양면에다가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받을 때에 쉽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노랫말에 보면 ‘말들이 나에게 쉽게 오지 않는다’ (words don’t come easy to me)는 가사처럼 십계명이라는 ‘말씀들’ (word)이 모세에게 쉽게 온 것이 아닙니다. 불과 몇 달밖에 안 되는 시간동안 모세는 40일 금식기도를 3번이나 하고 시내산을 8번이나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받은 것이 십계명입니다. 여러분 인류에게 십계명이 오게 될 때 그 상황이 이렇게 어려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십계명을 계시하실 때의 상황은 첫 번째 계시하실 때와는 매우 다릅니다. 첫 번째처럼 그렇게 어렵고 엄위한 상황이 되풀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설교한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십계명과 두 번째 십계명은 내용이 동일하나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로, 4계명 즉 ‘안식일을 지키라’고 할 때 그 동기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는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7일에 쉬셨으니, 인간도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것이고, 신명기 5장 12~15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으니,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동기가 구원의 동기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두 번째로 열 번째 계명의 순서가 다른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이웃의 아내나 종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내용이 후에 나옵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 21절에서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 ‘이웃의 집이나 종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내용이 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 방황기간에 집이나 소유나 종은 탐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이웃의 아내는 사람들이 많이 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순서가 40년 뒤에 바뀐 것입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십계명이 인류에게 올 때의 상황은 쉽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법과대학 출신인데 학교에 다닐 때 법철학 교수가 1교시에 들어와서는 “법은 어디서 왔는가”하고 질문하였는데 학기 말이 돼서는 “법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하고 끝나버렸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게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은 시내산에서 온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이 십계명이 모든 인간의 법에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II. 십계명에 관한 전반적인 관찰 (네 가지 질문)
첫째, 십계명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가? 네 가지로 불립니다. 첫째, 십계명은 ‘말씀’ (Word)입니다.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영어로 ‘열 가지 명령들’ (Ten Commandments)라고 번역하지만,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 가지 말씀들’ (Ten Words )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합니다. 신명기 4장 13절과 신명기 10장 4절에도 단순하게 ‘십계명’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로 볼 때 “열 가지 말씀들”이 맞습니다. 히브리어로 에세르(עֶשֶׂר)는 10이요 다바르(דָּבַר)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바르의 복수인 데바림(דְּבָרִים)으로 말씀들이라고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로 ‘다바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엄청나게 풍성한 단어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에만 85개의 다른 단어로 번역이 될 정도로 풍성한 단어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말씀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에 빛이 있었습니다. 복잡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말씀대로 그대로 된 것입니다. 또 ‘다바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실려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실 때도 말씀으로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단순히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이 실려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십계명은 ‘증거’ (Testimony)입니다. 신명기 4장 4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증거하신 것과”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31장 18절에도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두 증거판’ (Two Tablets of Testimony)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증거’ (Testimony)는 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말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숙한 선언’ (Solemn declaration)인 것입니다. 이 증거는 내가 목숨을 걸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단어가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법원에서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법원에서 재판을 할 때에 “나는 위증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서를 하고 그리고 입증을 합니다. 그런데 선서한 후에 위증을 하게 되면 그것은 위증죄가 되어서 벌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증거라는 것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벌을 받겠습니다”라는 엄숙한 선언인 것입니다.
셋째, 십계명은 ‘언약’ (Covenant)입니다. 신명기 4장 13절에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했습니다. 언약이 곧 십계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언약을 맺을 때 어떻게 맺는가 하면 먼저 짐승을 쪼개 놓습니다. 그리고 언약 맺는 당사자가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을 어기게 되면 너나 나나 이 쪼개진 짐승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언약은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약은 목숨을 걸고 맺는 맹약이요 절대로 변경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언약의 내용은 복잡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잊어버렸다고 말할 수 없고, 몰랐다고 말할 수 없도록 언약의 내용은 간단하고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몰라서 간음했다거나 도적질을 했다고 핑계 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명령하는 내용을 다 요약하면 ‘십계명’입니다. 성경 66권에서도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례를 다 요약하면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십계명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하나라도 못 지키면 다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을 못 지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인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존재로는 골백번 믿어도 죄를 용서 받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대신 갚아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로부터 신약의 사도들에 이르기까지 전한 명령의 요체인 것입니다. 윤리적인 명령과 도덕적인 명령의 핵심은 십계명이고 언약적인 명령의 핵심은 ‘이 예수를 믿어 죄 사함을 받으라’인 것입니다. 이 언약은 영원히 변경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4) 십계명은 ‘도덕법’ (Moral Law)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다른 영역 즉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구별하여 도덕법이라고 부릅니다. 십계명의 도덕법이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준입니다. 죄가 뭡니까? 십계명을 어긴 것이 죄입니다. 의가 뭡니까? 십계명을 지킨 것이 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기준은 죄와 의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만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바람을 피워도 내가하나, 남이하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하는 것은 의의 분명한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도덕법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도 십계명을 아는 것입니다. 아담이 도적질 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다 압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살인했을 때 자기가 죄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다 도덕법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1689년에 「침례교 런던 신앙고백서」(19장 2항)에 보면 ‘인간의 마음에 처음으로 기록된 그 동일한 율법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의의 완전한 규율로 계속해서 존속하게 되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형식으로 전해주셔서 두 돌비에 새겨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 새겨진 법을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십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명백한 법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은 도덕법을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십계명이 두 돌비에 기록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첫 돌비는 하나님이 직접 돌비도 마련하시고 십계명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비는 모세가 깎아 만들었습니다. 어쨌든 돌비가 두 개고 양면으로 하나님이 직적 기록하셨다는 사실이 성경에 13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자 15~16절에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두 돌비에 기록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기록하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신약시대를 예언하면서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십계명을 기록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비에 기록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십계명을 기록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이 십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아무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을지 몰라도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 복을 받지 못합니다. 복을 받는 것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따라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사랑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존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럴 힘이 없다면 성령님께 구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기 전에 주일날 예배 나오는 것이 정말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게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일에 예배 안 드리고 어떻게 일주일을 삽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저는 그것이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두 돌비에는 무엇이 기록되었습니까? 전통적인 견해로 1~4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대신계명)이 기록되었고, 5~10계명은 사람을 향한 계명(대인계명)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학자들은 좀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옛날 종주권 계약문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은 왕하고 신하하고 계약을 맺을 때 문서를 2부로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왕이 갖고 하나는 신하가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비가 2개이고 양면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각각 하나에 십계명 전체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두 부를 만들어서 하나는 하나님이 보관하고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관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언약궤 안에 두 돌비를 다 보관하게 하셨는가? 이것을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돌비에는 1~4계명, 두 번째 돌비에는 5~10계명으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전통적인 견해로 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십계명은 어떻게 배열되는가? 일반적으로 십계명의 순서는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인데 개신교와 동방정교는 1~10계명 배열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다릅니다. 그들은 1계명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1, 2계명을 합친 것을 1계명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 순서가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과 루터교는 1~2계명을 합쳐서 1계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번째 계명을 둘로 나눕니다. 그래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가 9계명, ‘네 이웃의 집이나 소유나 종들을 탐하지 말라’ 이것이 10계명이라는 것입니다. 1~2계명을 합한 것은 어거스틴인데 그것을 합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가톨릭의 십계명을 보면 1계명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고 했고, 2계명의 내용은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1계명 안에 2계명의 내용은 당연히 암시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면 우상은 당연히 만들지 않는 것과 같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음성으로도 들려주시고 손으로도 직접 기록하신 십계명을 단순히 내포 혹은 암시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계명은 1계명, 2계명은 2계명 분명하게 말해야지 그것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구교인 로마가톨릭은 자꾸만 상(像)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2계명을 문자 그대로 못 박아 놓지 않았기에 상(像)을 많이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신교의 십계명 구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의 십계명과 같이 명확하지 않은 십계명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십계명을 분류할 때 어떤 학자들은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대신계명에 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인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도 부모도 인간이기에 대신계명으로 들어 갈 수 없고 대인계명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가 저는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넷째, 십계명은 신약시대에도 타당한가? 십계명의 모든 내용은 신약에 반복되었고 재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20세기 세대주의 종말론이 너무 만연해서 십계명을 율법으로 치고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십계명을 갖다버리는 ‘율법 폐기론’ 경향이 너무나 강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도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십계명 전체가 다 반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신약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어느 신약에 도둑질해도 된다고 되어있고, 간음해도 된다고 되어있고, 우상숭배를 해도 된다고 되어 있습니까? 이처럼 십계명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타당한 도덕법이고 ‘항존법’ (Standing Law)인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지켜 행할 때 인생이 복 되게 되는 것입니다.
III. 십계명 해석의 원리
십계명 해석의 원리에 관해서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인 Ezekiel Hopkins라는 사람이 쓴 ‘십계명 해석의 10가지 원리’ 「An Exposition of the 10 Commandments」(1690) 책에서 가장 탁월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성경의 모든 명령은 십계명의 범주 안에 모두 다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긍정적인 명령은 부정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부정적인 명령은 긍정적인 측면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긍정적인 명령은 부모를 해치거나 불순종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부정적인 명령은 항상 적용되지만 긍정적인 명령은 해당하는 시간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24시간 적용되지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안식일에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십계명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내적인 생각이나 동기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찌니라’는 계명은 내적인 원인 없이 미워하고 분노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계명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어떤 죄를 금지하면 죄로 이끄는 분위기도 ‘간음으로 인도하는 음식이나 환경’도 금지한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첫 돌비의 계명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로 지니지만, 둘째 돌비의 계명은 첫 돌비의 계명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라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첫 돌비의 명령과 둘째 돌비의 명령이 충돌되면 첫 돌비의 명령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고 하면 부모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여덟째로, 둘째 돌비의 수행이 위급한 경우에는 첫 돌비의 명령도 예외를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죽어가는 환자가 있으면 의사는 주일을 지키느라고 환자를 죽일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를 못 드리더라도 환자를 살리는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홉째로, 계명이 금하는 것은 그 증세도 금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라 하면 교만한 눈, 교만한 말, 교만한 걸음도 금한다는 것입니다. 열째로, 십계명은 모두 연결된 하나의 고리와 같아서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것과 같은 죄책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노력해서 천국에 가려면 십계명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켜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꼬리를 내리고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십계명은 거룩한 법이로되 나는 다 못 지키니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결론
십계명은 구원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계명을 택함 받은 성도들의 심비(心碑)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십계명을 강해하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새겨지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