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새긴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
본문 : 신명기 5:8-10
구분 : 강남중앙침례교회 주일 예배

신명기 5장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오늘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은 구원받는 비결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행함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계명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 믿고 받는 것이고 축복은 십계명을 지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1~4계명까지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것은 대신 계명이기 때문에 5~10계명까지의 대인 계명보다 더 중요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제1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제1계명은 오직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들을 하나님의 얼굴 앞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무신론(無神論)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이 없다고 믿는 이런 사상은 헛된 사상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신은 많다고 믿는 다신론(多神論) 사상도 잘못된 사상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모든 자연이 다 신이라고 말하는 범신론(汎神論)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양도 숭배하고 달도 숭배하고 자연도 숭배하는 이러한 범신론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신론도 안 되고 다신론도 안 되고 범신론도 안 됩니다. 오직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을 섬겨야 된다는 것이 제1계명의 내용인 것입니다.
 제2계명은 제1계명과는 서로 다른 계명이면서도 서로 밀접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 8~9절까지 보게 되면 ‘하지 말라’(Thou shall not)는 명령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 의지 미래와 단순 미래를 공부하면서 ‘shall’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너는 죽을 것이다’(you shall die)라는 것이지만 이것은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I will kill you)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shall’을 쓰는 경우에는 이것이 단순 미래인 것 같아도 말하는 사람의 강한 의지를 말해주고 있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긴 우상은 어떤 것이든지 만들지 말라’(Thou shalt not make thee any graven image)는 말씀은 ‘내가 너로 새긴 우상을 절대 못 만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새긴 우상을 만들면 너를 그냥 놔두지 않겠다는 강력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2계명을 보게 되면 두 가지 강력한 금지 명령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들에게 절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도 말라”는 명령입니다.
 
I. 제2계명의 두 가지 내용은 무엇인가?
 첫 번째 금지사항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너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먼저 ‘새긴 우상’(graven images)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새긴 우상이란 나무나 돌이나 금속을 깎아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페셀’(פֶ֣֙סֶל֙)이란 말은 ‘형상’(image)이나 ‘우상’(idol)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8절 후반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할 때의 ‘형상’은 앞에 나온 단어와 다릅니다. 히브리어로 ‘테무나’(תְּמוּנָ֔֡ה)로 ‘형상’(image)이나 ‘유령 도깨비’(phantom)로 번역이 됩니다. ‘phantom’이라는 것은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할 때의 새긴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들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깎아서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예배나 예배의 보조수단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긴 우상을 만들 때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세계에 어떤 형상을 갖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해나 달이나 별 같은 하늘에 있는 형상들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곤충이나 무생물 같은 땅에 있는 형상들이나 물속에 사는 바다생물과 같은 형상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에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두세 가지가 결합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자인 반인반수인 경우도 있고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상을 새겨 만들어가지고 그것을 신이라 하고 그것을 예배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의 명령인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목적은 모두 다 개인적인 유익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는 반드시 개인의 이기적인 목적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방 종교들은 새긴 우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를 만들기도 하고 여자를 만들기도 하고 짐승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신이라고 하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종교들이 이러한 새긴 우상을 만들까요? 여기에는 새긴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 대부분의 이방 종교들이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우상을 통해서 신의 능력을 끌어 드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을 조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마치 리모컨처럼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우상을 만들어서 신의 능력을 끌어드리려는 매개체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에 패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합니다. “실로에 가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와서 전쟁터에 두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도 지게 되고 법궤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생각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은 왜 만드는가 하면 리모컨과 같이 신의 능력을 끌어드리려고 하는 것에서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는 속성으로 만들어서 쉽게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양인가 모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나타나 주시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가짜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도 없는 분이시고 영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답답해합니다. 그래서 형상을 만들어가지고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3) 신의 임재를 확보하기 위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우상을 가지고 있으면 신이 자기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도 우상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가가 말하기를 “당신들의 죄 때문에 바빌론 느브갓네살 왕이 쳐들어 와서 당신 나라는 망하게 되었으니까 바빌론에 항복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성전이 우리 곁에 있는데 누가 우리를 치겠느냐?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7장 4절에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The temple of the LORD)을 3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도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전에 쉐카이나 즉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와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과 같이 가셨습니다. 즉 바빌론으로 이사를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어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전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의 임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듯이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도 신의 임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가지고 신을 조종하는 것도 안 되고 또 하나님을 쉽게 이해하려는 것도 안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확보하는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려면 마음을 비우고 낮추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지 무슨 우상을 만들어서 우상 숭배한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번 양수리 신년 산상 축복성회에 올라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은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너 잘났냐? 그럼 네가 알아서 살아라”하고 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겸손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금지사항은 새긴 우상에게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인 예배도 금지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우상을 예배해서도 안 되고 예배의 보조수단으로 사용해서도 안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우상은 어떤 형상이든지 하나님을 잘못 소개하기 때문입니다.(misrepresent God) 하나님은 그런 우상의 모습으로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우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은 하나님을 잘못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상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거짓 신들’(false gods)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가짜 신들을 소개하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해도 바알이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새긴 우상을 만들지도 말아야 되고 절하지도 말아야 되고 섬기지도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II. 제2계명이 별도로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제1계명에서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제2계명이 별도로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 선생은 제1계명과 제2계명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을 했습니다. 제1계명은 인간이 예배해야 할 대상은 누구신가?(Subject of worship) 예배의 대상은 오로지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예배 대상이시다라는 것을 규정한 것이고 제2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서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한 섬겨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2계명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잘못된 방식과 올바른 방식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제1계명과 제2계명은 목적이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는 것이 제1계명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데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한강에다가 돼지 10마리를 잡아다가 집어 넣었던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왜 죽였냐고 물으니까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그랬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멋대로 예배의 방법을 정해서 예배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방식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제2계명을 별도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방식을 가르치셔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절대로 ‘새긴 우상’이나 ‘형상’의 형태로는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우상으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외형적인 형상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어떤 외형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창조물과 피조물을 혼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거짓된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고 예배를 완전히 오염시키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 46장 5절에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상과 비교하는 것을 굉장히 불쾌해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6장 6절에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라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으로는 나타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2)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이 새겨 만든 우상을 통해서 예배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식을 정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의 만찬을 할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만찬을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대한민국의 떡은 빈대떡이고 포도주는 막걸리니까 빈대떡과 막걸리를 가지고 하자”라고 하면 그것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우선 저는 예배당에 막걸리 냄새가 퍼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식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너희는 대한민국의 방식대로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만찬을 시행해라”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찬은 성경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라고 하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침례교회는 침례를 줄 때 물속에 집어넣어서 침례를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뭘 귀찮게 그렇게 하냐 그냥 간단하게 뿌리지 침례교가 물 많다고 자랑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침례 하나라도 성경에 있는대로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침례가 아니면 뭐하러 가셨겠습니까. 물 많은 곳에 가실 필요가 왜 있겠습니까. 세례가 옳다면 물 한 사발 가지고도 천명도 넘게 줄 수 있는데 무엇하러 요단강까지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경에 기록된 방식으로 하려고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방식을 가지고 함부로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드려지는 개신교 예배에는 두 가지 원리가 대립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의 규제적인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배의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 of Worship)가 있습니다. 예배의 규제적인 원리라는 것은 청교도와 개혁주의자들이 고수해온 원리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명하신 방식대로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규범적인 원리는 루터교가 취하는 방식인데 하나님께서 성경에 금지하지 않으신 것은 예배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 다릅니다. 규제적인 원리는 성경에 있는 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에 엄격하고 규범적인 원리는 약간의 자유를 주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원리 중 어느 것이 더 옳은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예배나 제사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엄격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이 제사할 때에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피를 가진 제사만 받으십니다. 굉장히 엄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화가 나서 자기 아우를 쳐 죽였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자기 아우를 쳐 죽여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또 아론의 네 아들 중에 큰 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가 하나님께 분향할 때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하다가 그 불에 타 죽어 죽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 불이나 받으시면 되시지 그걸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십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은 그만큼 예배에 관해서 하나님이 엄격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때에 원래는 법궤를 어깨에 메어야 하는데 수레에 싣고 가져오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가 갑자기 뛰자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법궤를 잡았는데 잡자마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십니다. 왜 죽이셨나? 법궤는 아무나 만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배와 제사에 관해서는 구약시대에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린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용어는 쓰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다른 예배는 다 닫힌 예배입니까 이런 용어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방법을 가지고서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쾌락을 주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예배에 관해서 너무 자유스러운 방식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청교도들이 고수해온 예배의 규제적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말씀이 있고 기도가 있고 헌신이 있고 찬양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엉뚱한 것을 만들어서 드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1689년 침례교 런던 신앙고백서 22장을 보면 예배의 규제적인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를 따라 어떤 가시적인 구상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배의 규제적인 원리를 침례교인들이 따랐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가 굉장히 보수적인 교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은 우상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성경의 없는 방식으로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제2계명은 ‘새긴 우상’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인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어떤 시도도 금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마음대로 조종이 됩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아내가 남편을 조종하려고 하면 그 집안은 반드시 싸움이 납니다. 남을 자기 의사대로 조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은 귀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남을 조종하려는 사람은 그 사람 마음속에 귀신이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남은 조종할 수 없습니다. 인격체로서 자기의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대로 조종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조종해서도 안 되는데 하나님을 조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이유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셔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지배한다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가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람의 마음대로 조종하려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4) 영적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관능적인 요소’(Sensual)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다 예배에 관능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할 때 바알은 남성 신이고 아세라는 여성 신으로 이 두 신들은 땅에다가 비를 내리는 풍요의 신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비를 내리게 하려면 어떻게 숭배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알 신전에 보면 거기에 공창(公娼)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거기는 신전이 아니라 공창이라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오늘 바알신께 제사드리러 갑니다”라는 말은 “오늘 내가 바람피우러 갑니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들은 신전에서 육신의 관능적인 행위를 하게 되면 바알과 아세라가 자극을 받아 연애를 해서 그 결과로 땅에 비가 내린다는 아주 무식하고 더러운 교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합법적으로 자기가 바람을 피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공창에 합법적으로 가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한 도시인 고린도에도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헬라 말이고 로마 말로 하면 비너스 신전입니다. 여기에도 여자 사제들이 1000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도 사실상 공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신들은 모두 다 위의 신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눈과 코와 피부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형태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구원을 받으려면 피가름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소리를 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피가름을 한다는 것은 결국 바람피운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관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짓하는 사람들이 옛날에 계룡산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은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비가 많이 올 때에 물에 떠내려가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웃깁니다. 그 사람을 여태 따르는 교단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계명은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때문에 제1계명과는 별도로 절대 필요한 계명인 것입니다.
 
III. 제2계명을 준수하는데 따르는 상벌은 무엇인가?
 신명기 5장 9절에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마음이 좁은 존재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약적인 질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과 아내가 언약을 맺어서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과 아내는 상대방에게 언약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고 여기저기 바람피우면 언약을 깨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을 깨면 아내는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아내가 질투를 느껴야 옳은 것입니까? 아닌 것입니까? 만약에 너도 하니까 나도 한다 그러면 그 집안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인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인 것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언약적인 질투는 참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9절 중반에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애매모호하게 삼 사대에 죄를 갚겠다고 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자녀들이 아비의 죄로 벌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자기 죄로 벌을 받고 아들도 자기 죄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죄는 각자 책임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0절 후반에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잘못 만나 지옥 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죄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자식 하고도 다 각기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상 숭배하면 아버지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우상숭배 안 하면 벌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의 어른이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그 밑에 3대 혹은 4대가 우상숭배의 영향력으로 계속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증손자가 왜 벌을 받는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손자와 증손자가 우상숭배를 배우게 되었는가? 할아버지한테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의 어른이 되면 이러한 저주의 영향력을 미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대라는 말은 계속해서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면 우리도 축복받고 자손들도 축복받고 헛된 길로 안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2계명은 어떤 예술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이라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작품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예배의 목적으로 어떤 상이나 조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작품을 보면 참 좋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예술작품을 보고 숭배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술이라 해도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다든지 사진을 찍는다든지 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현재 예수님 사진으로 나온 것이 수천 개가 있습니다. 미국 사람처럼 생긴 사진도 있고 동양인처럼 생긴 사진도 있고 흑인처럼 생긴 사진도 있고 머리가 길고 짧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고 그린 그림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예수님의 모습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실 때와 승천하실 때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진이나 어떤 그림도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총각 사진인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집에 그런 그림이 있다면 다 떼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거기다가 부모님 사진이나 나누어드린 십계명을 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결론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은 삼 사대가 저주를 받게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후손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고 저주의 영향력을 끊어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 내 후손들은 축복된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길게 얘기했지만 정리하면 간단한 것입니다.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것에서 요동하지 않으면 우리도 복을 받고 우리 후손도 천대까지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시발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와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경배하므로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