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
(약 1:26-27)
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내용들, 그러기에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소유하고 있어야 할 삶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경건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해야 할 너무도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경건이 없는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이라 할 수 없고, 경건이 없는 신앙인도 바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앙과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이 경건에 대한 오해와 소홀함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에 보여지고 있는 경건에 대한 오해와 소홀함의 모습들은 이미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서 경고한 바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 말씀에서 바울은 말세에 나타나게 될 여러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 불경건을 말하면서, 그 때가 되면 외적모양으로만 나타내 보이려는 경건에 대한 오해와 경건이 신앙의 진정한 능력임을 부인하고 경건을 소홀히 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니 성도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어떤 지도자들보다 더 경건을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이 바로 야고보가 가르쳐준 경건에 관한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그는 우리 크리스챤이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야고보는 부정하고 더러운 헛된 경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참된 경건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에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에 경건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야 하고, 우리의 삶이 경건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그 경건이 헛된 경건인지 아니면 참된 경건인지를 정확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Ⅱ
그럼 야고보가 가르쳐주는 참된 경건이 무엇입니까?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다.
신약성경에는 경건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하나는 본문 26절과 27절에 나오는 경건으로 이 경건이란 단어는 헬라어 단어로 드레스코스(θρεϭκός)입니다. 이 드레스코스란 단어는 경건 그 자체를 표현하는 단어라기보다는 경건의 외적모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건의 뜻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경건으로 번역된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헬라어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단어는 사도행전 3장 12절, 디모데전서 2장 2절, 디모데후서 3장 5절, 그리고 베드로후서 1장 3절과 6절과 7절에서 경건으로 번역된 유세베이아(εὐϭέβεια)라는 단어입니다. 이 유세베이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입니다. 그러기에 유세베이아라는 단어로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 경건이란「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 두렵고 섬기는 마음으로 삼가 조심하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유세베이아라는 단어가 뜻하는 경건에 대한 정의를 요약해서 오늘 본문 말씀 27절 첫 부분에서 짧은 한 문장으로 정의합니다. 그 문장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파라 토우 데오(παρἁ Τω̑ θεω̑)”.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라고 정의했습니다. 분명 그가 정의한 그대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그러기에「하나님 앞에서」로 정의된 경건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입시켜 경건의 내용을 설명한다면 경건한 말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이고, 경건한 행위란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이며, 경건한 생각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생각”입니다.
진정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 없이는 절대 소유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지금 듣고 계시며 하나님이 지금 알고 계신다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말과 행동과 생각이 경건한 말과 행동과 생각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혈기 왕성한 청년 요셉을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은밀한 시간에 은밀한 장소에서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때 요셉은 그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9장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 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사람들은 모른다할지라도, 그리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할지라도,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지 못해도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보고 계시고,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신다는 인식이 그의 내면에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경건한 삶을 살았던 이유입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는 경건을 그런 “하나님 앞에서”라는 내면적 인식은 무시한 채 외면적인 모습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중에는 경건을 자기를 선전하는 광고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람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어느 교회의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를 알리는 전단지에 실린 강사 소개를 읽다가,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 전단지에는 이렇게 강사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섯 번이나 하신 능력의 종!” “일 년에 성경을 100독 하시는 말씀의 종!”
물론 제가 그런 강사 소개에 대한 글을 읽다가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제가 한 번도 못해본 40일 금식기도를 무려 다섯 번이나 했다는 그 분에 대한 시기심 때문도 아니고, 일 년에 성경을 100독 하신다는 그 분에 비해 초라한 저의 성경 읽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하는 방어적 의식 때문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단순하게 경건이 사람에게 보이려하는 외면적인 자기 자랑의 수단이 되면 그런 경건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라는 너무도 기본적인 저의 신앙관 때문입니다.
물론 금식기도를 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들은 자랑할 만한 신앙의 내용이고 신앙에 유익을 주는 귀한 신앙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를 경건한 사람으로 알리고 자랑하는 것은 분명 내면적 경건을 잃은, 그래서 경건을 외면적인 모습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병든 신앙에서 나온 철없는 행동입니다.
참된 경건은 진정 “하나님 앞에서”에서 나옵니다. 절대 “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경건한 삶을 살았던 종교개혁자인 깔뱅(J. Calvin).은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라틴어 문장인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로 정해 놓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깔뱅처럼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야 그 인생은 분명 경건한 삶이 됩니다. 내면적 경건은 없으면서도 외면적으로만 경건이 나타나는 삶은 분명 경건한 삶이 아닌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삶입니다.
그러기에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경건한 삶,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까? 다시 말하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참된 경건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Ⅲ
이렇게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경건한 삶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실천적인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삶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오늘 말씀에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혀를 조심하며 사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재갈은 기수가 자기가 타는 말의 입에 물리는 도구입니다. 일단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만 하면, 말은 기수가 이끄는 대로 꼼짝없이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런 재갈을 자기 혀에 먹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혀를 재갈 먹이라는 이 구절을 “control tongu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혀를 조절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혀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건은 가짜이고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신앙인이라면서 자기 혀를 다스리지 못하면 참된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혀를 잘 쓰는 것은 경건의 척도입니다. 분명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종교적 행위를 한다 하여도 경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한국의 비크리스챤들이 크리스챤들을 비난하는 내용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으며 예배 참석에도 열심을 내고 있으나 말이 많다는 것, 그것도 함부로 말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비크리스챤들이 크리스챤들을 비난하는 대표적 내용 아닙니까?
정말 우리는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시고 은혜와 저주를 내리십니다. 민수기 14장 28절 말씀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과 아픔이 더 나타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하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언제 어디에서나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원망하는 말이나 정죄하는 말이나 비방하는 말이나 어두운 말이나 부정적인 말 대신에 축복하는 말과 격려하는 말과 이해하는 말과 사랑하는 말과 용서하는 말과 밝은 말과 꿈을 주는 말을 하며 살기 바랍니다.
둘째, 환난 중에 있는 자를 돌보며 사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중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본문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는 당시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돌보고라는 말은 도움을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말씀은 어려움을 당한 이웃이나 환난 중에 있는 이웃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웃이 주릴 때에는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는 마실 것을 주고, 벗었을 때에는 입혀주고, 병들었을 때에는 돌보아 주는 행위가 바로 참된 경건의 삶이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성도의 경건은 이론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닌 실천과 행동의 문제입니다. 진정 참된 경건은 환난 당한 자를 돌아보는 사랑에서 성취됩니다.
테레사 수녀와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자녀가 여덟이나 되는 크리스챤 가정이 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고 그 집에 갔습니다. 집 안에는 어린 여덟 명의 아이들과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그들에게 준비해간 음식 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내민 음식 꾸러미를 아이들의 어머니가 너무도 고마워하며 받았습니다.
그런데 음식 꾸러미를 받아 든 그 어머니가 그 꾸러미를 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잠시만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테레사 수녀에게 부탁한 다음, 그 꾸러미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30여분 후에 그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가 물었습니다. “어디 갔다 왔습니까?” 그 물음에 아이들의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이 동네에는 저희 가족보다 더 굶주리고 있는 이웃이 있습니다.”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테레사 수녀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가족이 굶는 것을 보는 중에도 더 어려운 이웃을 보고 계셨군요.”
잠시 후 그 집을 나온 테레사 수녀는 그 어머니가 먹을 것을 주고 온 가정이 어떤 가정인가를 알고 싶어 그 가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그 가정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정이 얼마 전 예배드리고 있던 몇 명의 크리스챤을 죽인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가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와 같은 신앙인인 크리스챤을 죽인 사람의 가정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 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크리스챤의 경건이다.”
환난을 당한 사람이나 세상에서 무시당하며 사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모습과 종교가 어떠하든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진정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절대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교제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참된 경건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것도 환난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셋째,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27절 하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세속이란 말은 세상이라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세속은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죄악을 의미하는 말로, 의나 성결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말은 죄악에 빠지지 말고 의와 성결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지키라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말이고, 절제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사람이 죄악에 가득찬 세속에 물들게 되면 사람은 경건을 잃게 되는데 이런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잘 지켜야 한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만, 그리고 세속의 문화와 풍조 앞에서 자기를 절제할 수 있어야만, 사람은 자기를 지킬 수 있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이 얼마나 대단했던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런 대단했던 바울도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신의 삶이 죄를 향하고 세속으로 향할 위험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했습니다. 즉 자기를 지키려 했다 그 말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단호하게 우리의 몸을 성령께 복종시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고, 세속문화와 풍조에 대해 절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 인생 3류 인생이 되고, 아무리 잘났어도 절제의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인생 밑바닥 인생이 됩니다. 바라기는 자기를 지키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그래서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Ⅳ
말씀을 정리합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고한 내면적 인식을 가지고 경건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삶의 내용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건을 위해 실천하며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은 혀를 조심하며 사는 것이고, 환난 당한 자를 돌아보며 사는 것이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경건한 자를 찾으시고, 경건한 자에게 복을 주시며, 경건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런 까닭에 경건이 신앙인의 능력이고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듯 혀를 조심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 최선을 다해 환난당한 자를 돌보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듯 죄악된 세속의 문화와 풍조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물음에 부족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는 말씀처럼 경건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자신을 연단하면 우리는 경건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도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풍성히 받는 참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