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먹어버린 씨

< 본문 마태복음 13:1-9 >

 

미국 교회에는 버닝 선데이’(burning Sunday)라는 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거니와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건축을 합니다. 그리고 대출금을 매달 역량이 되는대로 갚아 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출금을 다 갚은 후에 대출금 문서를 예배의 마지막 순서에 불태워 없애는 의식을 진행하는데, 그 날이 버닝 선데이입니다. 빚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주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미국의 전통에 따른다면 오늘이 우리 교회는 버닝 선데이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20116월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본당 건물을 완공했습니다. 20106월 첫 삽을 뜬지 정확히 1년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118개월 동안 건축에 따른 대출금을 갚아 왔고, 지난 227일자로 마지막 대출금을 완납했습니다. 비록 교육관 리모델링을 하면서 갖고 있는 은행 대출금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본당 대출금을 완납함으로써 본당에 대한 빚문서는 태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빚문서를 태우는 어떤 의식은 진행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오늘 기쁜 날을 맞이한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본당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대출금을 한 푼도 미루지 않고 상환할 수 있었다는 것도 모두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는 우리 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건축헌금을 작정하지 않고도 어려움 없이 건축을 마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5년이 넘는 구 예배당이 너무 낡고 협소하여 교회당을 건축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을 때 장로님들께서 먼저 교회당을 건축하자고 제안을 하셨고,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축을 시작하면서 제가 당회에 제안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건축헌금 작정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생활이 넉넉하게 사는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빠듯하게 생활하고 계시는데 교회당을 건축한다고 건축헌금을 작정하면,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축헌금 작정을 하시겠지만 그 후의 삶은 너무나도 힘들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알아서 헌금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감사하게도 당회에서는 저의 제안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축헌금을 작정하지 않고 교회당 건축을 시작했고, 여러분들이 기대 이상으로 많은 헌신을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축을 끝내고서도 은행에서 대출한 것을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달 1만 원씩만 헌금하면 좋겠다는 제안에 많은 분들이 기꺼이 동참하셨고, 어떤 분들은 더 많이 헌금을 해 주셨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동참해 주셔서 대출원금과 이자를 지난주 월요일에 다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여러분들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해 주셔서 가능했던 기적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이웃을 돕거나 선교하는 일을 축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우리 교회는 긴축재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건 건축하는 교회라면 어느 교회나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당회에 건축하는 동안이나 대출금을 갚아나가는 동안 우리가 선교하는 일이나 이웃을 돕는 일을 더 늘리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축소하지는 말자고 제안했고, 당회에서는 기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교회당을 건축하고 건축대출금을 갚아 나가는 동안 이전에 했던 선교나 구제하는 일을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 또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코로나를 겪어온 지난 3년 동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님들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는 것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으셨을텐데, 긴축재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선교와 구제하는 일을 축소하지 않도록 협조해 주신 장로님들과 교우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른 교회의 예들과 비교한다면 그런 힘든 과정 속에서도 온 교우들이 십시일반 헌금하여 교회당 건축 대출금을 완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기적의 역사에 여러분이 기꺼이 동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 하나, 우리가 대출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교회는 지난 2018년 필리핀에 교회당을 건축했습니다. 창립 60주년을 기념해서 시작한 해외 교회당 건축 사업이 교우들의 기도와 헌신 덕분에 1억이 넘는 재원을 들여 마이슬랍선교교회와 은혜크리스쳔유치원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당을 건축하고 우리는 너무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배당이 없어 길거리나 허름한 판자 지붕 아래서 예배드리는 분들에게 조금이나 안락한 곳에서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예배당을 건축해주자는 제안에 온 성도들이 함께 하여 예배당과 유치원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요 기적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함께 해 주신 여러분들께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우리 교회가 은행에 갚아야 할 대출금은 남아 있습니다. 본당을 건축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육관을 새롭게 단장하느라 대출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당에 대한 대출금을 다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13장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가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비유의 뜻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 비유가 뜻하는 바를 해석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1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네 주간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를 통해서 이 비유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3) 여기서 씨를 뿌리는 자라는 말은 일반적인 농부를 뜻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일부만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농부는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지, 나지도 않고 열매 맺지도 못할 땅에도 뿌렸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논과 밭이 분명하게 경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논두렁을 만들어 물을 받아 볍씨를 뿌리고 모를 심어 쌀을 수확하고, 밭두렁을 만들어 자기가 농사짓는 곳이라는 표시를 하고 그 곳에다가 농작물을 심어 거두기도 합니다. 그런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씨를 뿌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땅에는 오늘 우리 시대와 같이 농사를 짓는 곳에 명확한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 땅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특별히 많은 땅에 농사를 짓지 않고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난한 농부들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빈 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씨를 뿌려야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만일 농부가 열매도 맺지 않을 땅임을 알면서도 그곳에 씨를 뿌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에이,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고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거부반응부터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은 것은 그렇게 씨를 뿌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씨가 뿌려진 그 네 개의 밭 중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여기에 씨를 뿌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마가복음 4:14)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19절에서 이렇게 해석해 주십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말씀을 듣긴 들었습니다. 말씀의 씨가 뿌려지긴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한 말씀은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가버립니다.

  여러분,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뿌려진 씨앗을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천국 복음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여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결국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천국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해 그 말씀을 악한 자에게 빼앗겨버린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세 종류의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온 배경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날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본문 바로 앞인 마태복음 12:38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무슨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일까요? 당연이 메시아인 표적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면 메시아라는 분명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을 보여주면 우리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은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굉장히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셨고, 귀신들을 제압하시며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 날에만도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증거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 다시 메시아의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굳게 다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여 아무리 말씀이 들려져도 귀를 막아버리고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천국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아집에 사로잡혀 참된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의 논리와 편협된 지식에 사로잡혀 복음에 대해서 귀를 막아버린 지식인들, 논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결코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현대적 시각과 과학적 사고로 성경을 분해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문학 작품으로만 여기는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전이 교회에 좀 다니고,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조금 듣고 알고 있는 성경지식이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복음의 본질을 들으려 하지 않는 어설픈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고, 교회에서 보여지는 조그마한 잘못이나 실수나 좋지 않은 이야기들만 긁어모아서 교회와 복음을 쌍그리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에 말씀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잘 알기에 누가 뭐라 그래도 들으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새들이 와서 씨앗을 먹어버린 길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 14-15절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이 천국복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들은 그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타까워 하시면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꼭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천국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 혹 우리가 지금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는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들려지는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와서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스스로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우리는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없습니다. 때로 내 맘에 맞는 이야기 하나 들으면 그것으로 예배 잘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강단에서 말씀을 외쳐지고, 말씀이 선포되어도 예배당을 떠날 때에 내 가슴에 남는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배당에서 이미 새들이 와서 말씀을 씨앗을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굳이 말씀을 듣지 않아도 신앙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씀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그게 지금 내 모습은 아닙니까?

 

농부가 열심히 씨를 뿌리지만 새들이 와서 그 씨를 먹어버린 길가와 같은 사람은 첫째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주님이 뭘 말씀하시는지 전혀 관심없이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말씀을 머리로는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삶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 판에 새겨지지는 않습니다. 그저 머리로 이해할 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 머리로 이해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23:3) 그렇습니다. 서기관들은 회당이나 성전에서 공문서 등을 작성하는 전문가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쳐 전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사(율법학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이스라엘이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문화를 따라 살 수 없다며 이방 문화를 거부하면서 탄생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듯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켰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악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언급하고 가르쳤지만, 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말한 바를 듣고 행하지만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듣고 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00개의 말씀을 알지만 하나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보다 하나밖에 아는 것이 없지만 자신이 아는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더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그것 아닙니까?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인생에 비바람과 풍파가 몰아칠 때 그 집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들은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안전합니다.

  여러분, 혹 우리가 말씀을 듣긴 듣지만 깨닫지 못하여 새들에게 다 빼앗겨버리는 어리석은 신앙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깊이 되돌아 보십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짧은 지식을 가지고 말씀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긴 하는데,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결코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신앙은 말씀을 받아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