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사자를 만났을 때

< 본문 사사기 14:5-6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 아틀라스(Atlas)는 평생 하늘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제우스가 속해 있는 올림푸스의 신들과 아틀라스가 속해 있는 티탄족의 신들이 전쟁을 하게 되는데, 티탄족의 선봉에 선 아틀라스가 올림푸스의 신들과 맞서 대항하지만 결국 티탄족이 패하고 맙니다. 티탄족을 이기고 승리한 제우스는 아틀라스가 워낙 힘이 강해서 언제든지 자기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형벌을 내리는데, 그게 바로 하늘을 두 손과 어깨로 떠받치게 한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엄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아틀라스가 그 무거운 하늘을 잠시 내려놓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힘이 세고 유명한 영웅인 헤라클레스(Heracles) 덕분입니다. 헤라클레스가 진탕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아내와 세 아이를 죽이고 맙니다. 그 댓가로 12개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상 끝에 있는 헤스페리데스(Hesperides)에 있는 황금사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스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 하늘을 짊어지고 있는 아틀라스를 찾아갑니다. 아틀라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하늘을 대신 짊어지고 있으면 자신이 가서 그 황금사과를 따가지고 오겠다고 제안하고,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를 대신해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황금사과를 따가지고 온 아틀라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자신이 직접 그 황금사과를 에우리스테우스(Eurystheus) 왕에게 가져다 주겠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짊어지는 고통에서 벗어나 보니 그게 너무나도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헤라클레스에게 떠넘기려고 그런 계책을 세운 것입니다. 아틀라스의 그런 의도를 알아챈 헤라클레스는 내가 평생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야 한다면 어깨바지를 덧대야 하니까, 잠깐만 하늘을 받쳐달라.’고 말합니다. 순진한 아틀라스는 헤라클레스의 부탁을 받고 손에 든 황금사과를 잠시 내려놓고 하늘을 짊어집니다. 그러는 사이에 헤라클레스는 황금사과를 가지고 그대로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그리스 신화에서 아틀라스는 이처럼 잠시의 쉼도 없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지만 그 짐을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틀라스에 대한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면서 아틀라스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 지구라고 변형되었고, 지금도 아틀라스는 지구를 짊어진 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틀라스는 지도책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 때문에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Sisyphus)는 산 정상에서 굴러떨어진 바위를 다시금 산 정상까지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무한 반복으로 말입니다. 아틀라스는 하늘을 어깨에 짊어지고 떠바치고 있어야 했습니다. 평생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벌을 받은 아틀라스이지만,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아틀라스는 제우스에게 평생 하늘을 떠받들고 있어야 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틀라스 조각들은 지구본을 어깨에 짊어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입니다.(사진1) 이 사진은 로마시대에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아틀라스 조각상입니다. 그의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그의 몸은 지구의 무게에 짓눌려 곧 쓰러질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 아무리 거인이라 하더라도 지구를 짊어져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뉴욕의 록펠러센터 앞에 청동으로 세워진 아틀라스의 동상은 조금 다릅니다.(사진2) 이 동상은 마치 자신의 힘을 자랑하듯 지구를 번쩍 들어올리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이쯤이야!’ 하고 역도 선수가 역기를 들어올리는 것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해 하늘을 향해 힘껏 들어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이 두 사진에서 어떤 차이점을 느끼십니까? 왜 하나는 무거운 짐에 눌려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엄청난 기상을 뽐내듯 비약하는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고대와 현대의 조각 차이가 아닙니다. 돌과 청동의 차이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같은 고통의 순간에 놓인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고통을 느끼는 강도는 분명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자극에도 큰 고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강한 자극에도 그다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고통 속에서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고통을 묵묵히 견디어내는 사람도 있고, 고통을 통해서 성장할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어떻게든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피해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고통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만날 때 시련이나 고통과 맞서서 해결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묵묵히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전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짧지만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삼손은 우리가 많이 들어서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힘의 대명사라고 한다면 성경에서는 삼손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삼손 앞에 젊은 사자가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지방인 딤나에 갔다가 거기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반해 그 여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삼손은 자신의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 그 여자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딤나로 내려가고 있을 때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정황으로 본다면 삼손의 부모님은 그 때 삼손과 함께 있진 않았습니다. 아마도 삼손이 먼저 딤나로 내려가고 곧 이어서 부모님이 뒤따라 오기로 한 것같습니다.

  아무튼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던 도중 한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삼손 앞에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웬 사자가 포도원에 나타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 지역에서는 포도원이 주로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그리고 산비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에서 뭔가를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여 들짐승들이 자주 나타났는데, 그 들짐승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사자와 같은 맹수들도 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고 합니다.

  들짐승을 잡아먹기 위해서 포도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자가 삼손을 보자 자신의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이 울부짖었습니다. 본문 5절에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라고 아주 덤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다. 몹시도 배가 고픈 사자가 먹잇감이 없나 살피던 중에 삼손이 나타났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배를 채울 먹잇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사자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에 사자가 포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울부짖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사자가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먹잇감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좀더 쉽게 먹잇감을 포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을 만난 사자도 그랬습니다.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포효했습니다. 더구나 그 사자를 오늘 본문에서는 젊은 사자였다고 말씀합니다. 젊은 사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자, 누구와 싸워도 결코 지지 않는 사자, 용맹하기 그지없는 사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인간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삼손과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은 젊은 사자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요? 여러분, 아무리 우리 인간이 힘이 세다 하더라도 맹수인 젊은 사자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임꺽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눕혔다고 하는데, 그건 설화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맹수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맨손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삼손은 자신 앞에서 큰 소리로 포효하는 젊은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찢는 것같이 찢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삼손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설화 속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백성의 아들 임꺽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눕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힘의 장사 헤라클레스도 12개의 과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네메아 사자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고, 멧돼지와 크레타 섬의 황소도 때려잡았다고 합니다. 그것 역시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설화와 신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두려움 없이 인간보다 힘이 센 호랑이나 사자를 때려눕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간이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삼손이라 하더라도 설화 속의 임꺽정이나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처럼 두려움 없이 호랑이나 사자와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삼손은 설화나 신화 속의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삼손이 갑자기 나타난 젊은 사자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네 깐 놈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면서 사자에게 달려들었을까요? 성경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하나님만큼이나 위대한 인물로 치켜세우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 하더라도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다윗 왕이라 하더라도 그도 많은 실수를 하는 인간일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이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그 역시 인간일 뿐입니다.

  아마 아무리 힘이 센 삼손이라 하더라도 젊은 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 앞에서 으르렁거릴 때 그는 분명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자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심리는 조용한 산길을 가다가 갑자기 토끼가 바스락거리며 달려가는 소리만 들어도 움찔거리며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는데 어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삼손은 그 젊은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찢는 것처럼 찢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아무리 힘이 센 삼손이라 하더라도 삼손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 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6) 무슨 말씀입니까? 삼손이 젊은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니까,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자를 찢은 것입니다.

  여러분, 삼손이 아무리 힘이 세다 하지만 그게 삼손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힘이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 삼손의 이야기 가운데 삼손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때마다 등장한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사기 14:19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삼십 명과 싸워 이길 때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긴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시니 삼손이 30명과 대적하여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사기 15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사사기 15:14)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자 그를 결박했던 밧줄을 끊고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삼손은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실 때 자신에게 힘이 생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삼손의 삶 마지막에 그가 다곤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그 신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때, 삼손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사사기 16:28)

  여러분, 삼손은 자기 힘으로 싸워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마다 힘을 얻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여 적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젊은 사자를 죽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신의 힘으로 사자와 싸워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자 그에게 힘이 생겨났고, 그 힘으로 사자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삼손도 다른 사람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리 힘이 센 삼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이겼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오늘 우리는 삼손만큼 힘이 세지 않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삼손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단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힘이 세다고 스스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삼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죽일 수 있었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적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내 힘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죄악으로 유혹하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도 내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 앞에 갑자기 사자가 나타났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젊은 사자는 인간의 힘으로 결코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젊은 사자 앞에서 두려워 떨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갑자기 사자와 같은 시련이나 유혹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힘 주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그렇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라는 말씀은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것은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힘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우는 사자과 같은 대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을 겪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시련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별로 두려움을 안겨주지 않는 작은 시련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내 힘만을 의지하지 마십시다. 작은 시련일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것을 이겨내십시다.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엔가 젊은 사자와 같은 거대한 시련이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때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깊은 수렁과 같은 일이 내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면 겁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마음이 너무나도 힘드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마가복음 15:34) 예수님께도 십자가 고난의 길은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내가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 두렵고 떨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넉넉히 그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생겼다고 말씀하신 주님이 어떻게 당당히 고난의 길을 가실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누가복음 22:43)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힘을 주셨습니다. 그 힘으로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고, 기도하신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있는 사자와 같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길에도 갑자기 사자와 같은 거대한 시련이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로 인해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다. 갑자기 나타난 젊은 사자 앞에 선 삼손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그 가로막은 문제를 이겨내게 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예수님의 힘든 마음에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실 수 있게 도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도움이십니다. 아무리 큰 시련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에게 반드시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 고난과 시련 앞에서 주눅들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능력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라 하더라도 깨어 기도하며 담대하게 사십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