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룟 유다 - 사랑을 배신한 사람

 

사랑을 받은 자만이 배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사랑받는 자식만이 탕자가 되며 종은 탕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배신이 다른 죄보다 죄질이 더 나쁜 것은 믿는 자의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자의 사랑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 한기채 [예수가 선택한 열두제자 이야기] 중에서 -

 

[마태복음 2614-16, 47-50]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복음 273-10]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안타까운 사람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라는 것을 알기에,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12명의 제자 중 유일하게 비극적 인생을 산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의 비극적은 죽음은, 그의 비극적인 삶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배신하고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흠이 없이 순결하거나, 주님의 사랑을 배신한 경험이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를 지킨 제자도 없었고, 십자가의 죽음 후에는 모두 흩어져서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회복되지 못한 사랑의 배신자로 끝나 버렸습니다.

 

유다의 삶을 바로 말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4 마가복음 1421에 나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는 멸망의 자식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B.C. 167년 로마에 대항한 마카비우스 항쟁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유대인들의 영웅인 유다 마카비우스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당시 부모들의 기대가 반영된 이름입니다.

대부분의 제자가 갈릴리 출신인 것과 달리 유다는 예루살렘 남쪽 30마일 정도 떨어진 가룟출신입니다. 세리 출신이 마태가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회계를 맡기신 것을 보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상당히 총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예외 없이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죠.

열두 명의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기적의 현장에 있었고,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가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거나 돌출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참 두렵지 않습니까? 유다가 열두 명의 제자 중에서 배신자가 되었다면,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동원 목사님의 강해 설교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가룟 유다에 대하여 이런 제목을 달아놓고 있습니다. “신자가 아니었던 제자

우리가 흔히 아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잘 따라다니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타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동원 목사님의 책에는 그를 종교적인 환경에 동참했을 뿐 참 신자는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것으로 그가 참 신자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다 타락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저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정말 신실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 있어 그렇게 보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이단 가운데 하나가 천부교의 교주 박태선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면 저렇게 타락할 수 있구나!” 그런데 그것이 타락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된 믿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이 살리는 영이 아니라 무익한 육이었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열광적으로 설교했고 열광적으로 치유사역을 했지만, 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신의 부유함을 위해서였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많은 명화 중에 유다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실리안 성당의 벽화를 그릴 때, 열두 살 된 아름답고 순수한 소년을 모델로 예수님의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거룩한 주간이란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던 중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됩니다.

다빈치의 마음에 그의 얼굴이 가룟 유다를 연상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그 술주정뱅이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주정뱅이가 다빈치를 알아보고는 묻습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어요? 20년 전 당신의 모델이 된 적이 있는데.”

이 일화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빈치의 역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마태복음 2621절의 말씀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이 당황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주여 나입니까?”

참 흥미롭죠? 예수님께서 친히 발을 씻겨주신 제자 중에 누가 주님을 배신하겠습니까?

서로를 바라봐도 그럴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이렇게 묻습니다. “혹시 저입니까?” 어쩌면 이 순간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약함을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물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유다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해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기에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꿈꾸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으면 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열광하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칠 때 큰 기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만큼 힘이 있는 예수님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마음이 조바심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을 들었음에도 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목표에 자신의 목표를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목표에 맞지 않는 예수님 때문에 아프고 힘들어했습니다.

요즘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꼭 이 상황에 들어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려 말기 타락할 때까지 타락한 왕조의 모습을 보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상황 인식은 같은데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이 다른 것이죠.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서로서로 배신하고 모략하고 죽이는 과정이 있습니다.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방원, 하륜 다 훌륭한 사람들인데. 왜 서로 배신하고 죽이는지 말입니다.

아마 드라마에서 그리고 싶었던 것이 누구도 정당하거나, 누구도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참 인상적인 말이 있습니다.

네 속에 벌레가 있다! 그 벌레가 너를 삼키고 말 것이다!”

아마도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벌레가 자라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가 특별히 못된 사람이 아니라 유다는 끝까지 인간적이었다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예수님께 쓰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마태복음 273~5을 보면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의 의도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는 말씀을 보니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는 예측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함으로 예수님을 충동질하면, 어떤 능력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후회한다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자신이 해결하려니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외면했을 때, 그의 선택은 그의 최선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자신의 후회를 만회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인간의 최선은 해결이 아니라 후회와 비참이라는 것이 참 안타깝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유다는 예수님의 가치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알았더라면 노예를 사고파는 가격에 해당하는 은 30 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흥정하고 넘겨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가치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은 여인,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에게 주님은 한순간에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부어도 아깝지 않은 분이었지만, 유다는 그 돈을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지만,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유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죠.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이용하려고 도둑질해 온 분이었기에 헐값을 받고 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고로 도둑이 훔친 물건은 제값을 받고 팔 수 없는 장물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는 예수님을 헐값에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은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유다의 배신이 선명하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예수님의 마음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는 흔히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 배신자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유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도 역시 유다에게 빵조각을 주시며 가슴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아셨기에 더욱 간절하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왔을 때입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 2647~50절을 유심히 보세요.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참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유다는 이미 모든 계획을 짜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인사는 거짓이었고, 그의 입맞춤은 배신과 가증한 것이었죠. 그런 유다를 향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친구여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은 예수님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면서도, 베드로가 회개하기를 이미 기대하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잘못이 생각났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밖에 나가 통곡합니다. 그 통곡에는 후회가 있었겠지요. 그의 나약함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에게도 후회가 찾아왔으나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문제의 해결은 주님!’이라는 절규가 아니라, 다시 결탁자들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과의 결탁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들에게서 확인한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돈을 그들에게 돌려주었지만, 이미 자신이 팔아버린 예수님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권앞에서 저들은 더는 동업자가 아니었던 것이죠.

마태복음 273~5을 보세요.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유다를 이용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유다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예수님이 관계를 맺는 방법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부르시고 사랑하시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끝까지 그 인생에 대한 가능성을 보시지만, 목적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는 자신이 무엇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가 중요하죠. 그들은 유다에게 매몰차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겟세마네에서 끝까지 유다를 친구여라고 부르셨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후회한 인생은 후회로 마감됩니다.

하지만 회개한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후회가 자신의 망가진 삶과 죄의 결과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몸부림이라면, 회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유다의 삶이 자살로 마감됩니다. 자살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피행위입니다. 자살하기까지의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누가 그 순간까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살은 해결이 아니라 도피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또 하나 유다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긴장 관계가 절정으로 치달은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족식을 통해 아는 진리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그럴 수 없노라고 거절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죠.

그러자 베드로는 요한복음 139에서,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진정한 마음입니다. 자신이 주님과 어떻게 해서든지 떨어질 수 없다는 절절한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10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죠.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족식이 단순히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섬김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말씀 가운데는 다른 뜻이 있을 수 있구나!

한번 목욕한 자라는 것은 주님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영접입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목욕한 것입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우리가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죄가 묻습니다.

 

영접한다는 것과 죄를 씻는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요? 구원받은 자인 우리가 발을 씻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되는 특권은 한 번에 와지는 것이지만,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발을 씻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시 구원받을 필요는 없지만,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다의 문제는 그가 목욕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예수님이 발을 씻겨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족식을 거행하기 전 이미 유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성경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3:2)

유다가 아직 목욕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는 향유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돈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좋아해서 따라다녔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치는 아직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려는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든 생각을 보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늘 어느 것이 이득이 될까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요한복음 132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말씀하는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실 때, 27에 보면,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생각이었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유다의 마음에 이제 사탄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죠.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사탄의 꾐에 빠져들고, 사탄이 얼마나 쉽게 우리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우리의 욕망을 건드려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짓게 하는지 말입니다.

돈을 사랑했던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자 이제 그는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유다가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에 사로잡혀 마귀 짓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죠.

통일교회 측에서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유다야말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고, 그가 행한 일은 분명히 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선용하셨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의 강점기를 통해 우리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일, 그리고 6 25를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해야 했던 일.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런 일을 통해 우리 민족이 단련되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뤘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행한 일이 정당화되거나 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일은 언제나 악합니다. 단지 그 어려움과 고통을 우리가 잘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유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악한 일과 마귀의 궤계도 하나님께서는 선용하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악을 용인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유다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려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세상을 바라보며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꺾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 사탄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늘 세상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발을 씻으므로 인해 주님과의 관계를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의 발을 씻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솔직하게 주님 앞에서 가면을 벗고 우리의 내면을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비극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쫓아다니면서도 내면에 감추어진 욕망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 말입니다. 그에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참 곤고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이 혹시 곤고함 가운데 있다면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주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과연 거듭난 자인지,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는 것은 아닌지.

진짜와 가짜는 드러납니다. 그것이 언제이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수필가 황태영은 그의 에세이 [풀이 받은 상처는 향기가 된다]에서 참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는 도끼에 찍히는 순간 나타난다.

평소 겉모습은 같아 보이지만, 고통과 고난이 닥치면 진짜는 향기를 내뿜지만, 가짜는 비명만 지르고 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재물의 크기가 아니라 내뿜는 향기와 비명에 따라 그 품격이 결정된다.

 

내가 세상을 향해 매연을 뿜어내면 남들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내 호흡기도 해를 입게 된다.

결국은 그 독기가 나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상처와 분노를 향기로 내뿜어야 나도 향기로워질 수 있다.

깊은 향 아름다운 세상은 그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당신의 삶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유다가 버림받은 것은 그의 속에 악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것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찢긴 우리의 상처가 향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