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 이야기

 

요 4:43-54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 가운데 두 번째 표적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표적은 요 2장에 나오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표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첫 번째 표적과 두 번째 표적이 행해진 장소가 같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유월절을 행하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을 일으키셨고, 니고데모와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역을 펼치셨습니다. 이렇게 메시야로서 첫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뒤 다시 갈릴리를 향하셨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를 지나시면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여인이 변화되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먼저 고향 나사렛을 찾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아서 나사렛을 떠나 다시 가나로 오셨습니다.

   가나 사람들이 처음 보다 더 뜨겁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을 보기도 했지만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았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주인공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고, 또 한 번의 표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라는 마을은 예수님의 표적을 두 번이나 잇달아 체험했습니다. 다른 마을은 한 번도 받기 힘든 놀라운 은혜를 두 번이나 잇달아 받은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참 가나는 복된 마을이고 가나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가나처럼 복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가 가나사람들처럼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가나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에 오셨을 때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된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이 가버나움에 있는데 아이가 죽기 전에 서둘러 가셔서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을 받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이 사람이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다가 종들을 만났습니다. 아들이 나았고, 나은 시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간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아 만나다

 

   우선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왕의 신하가 주님 앞으로 나왔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분이 왕의 신하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합니다. 왕의 신하이니 권세가 있었을 것이고, 돈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권세가 있었고 돈도 있었으니 아들을 살리려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당시 의술로 고쳐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민간요법에 주술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살리고 싶은 간절함에 애가 탔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에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빨리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하러 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 거리를 가야 했습니다. 자기는 지금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나에 계셨습니다. 그 거리가 대략 34킬로나 됩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해발이 –200미터 정도이고, 가나는 +300미터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파른 언덕길을 멀리도 가야했습니다. 아마 족히 하루는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들을 살리겠다는 간절함으로 그 먼 거리를 달려서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와야 영적인 역사가 시작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역사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님께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역사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 앞으로 나가서 주님께 간청을 드리려 할 때 앞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장벽은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 마음속에 있는 자존심의 장벽입니다. 자기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고 나이도 많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시골마을 청년입니다. 예수님께 나가 무엇인가 간청한다는 일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본문을 보면 큰마음 먹고 예수님께 간청을 드렸는데 핀잔을 받았습니다. 48절을 보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핀잔입니다. 아마 크게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더 간절히 간청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가려 할 때 마음의 장벽이 생겨 가로막을 수가 있습니다. 안하던 짓을 한다고 이상하게 보는 주변 사람들 시선이 마음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까 하는 의심이 발목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주 앞에 저지른 죄가 마음에 큰 장벽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마음의 장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 왕의 신하가 아들을 살리려는 간절함으로 마음의 장벽을 넘어선 것처럼 우리도 간절함으로 이 장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담대함으로 이 장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뜨거운 회개로 이 장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잠 8: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은 만자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왕의 신하가 이 말씀처럼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약속하신 대로 만나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대 이상의 응답을 받다

 

   이 사람이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자 주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진심으로 이 사람을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간청에 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이 사람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5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왕의 신하의 간절함을 보시고 그 청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가버나움에 있는 이 사람의 아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다. 병세를 확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병자에게 그 어떤 처방도 내리시지 않으셨고, 또 직접 어떻게 하라고 명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주시려면 당연히 자신과 함께 가버나움에 가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보시고 손을 얹고 기도를 하시든지, 아니면 말씀으로 명하시든지 하셔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기 아들이 낳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대 이상의 응답에 이 사람이 정말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을 보면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단 하나 아들이 고침 받고 다시 건강하게 사는 것 그것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나은 것은 물론이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 모두 예수 믿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가정 전체가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 사람이 생각도 하지 못했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은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기대 이상의 응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305장 1절의 원어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기대 이상으로 놀랍기 때문에 이렇게 찬양한 것입니다.

  작사를 한 John Newton은 악명 높은 노예무역선 선장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지르며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항해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서 바다 한 가운데서 죽을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그제야 큰 폭풍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신기하게도 폭풍이 멈췄고 바다가 고요해졌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폭풍에서 구해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에 다시 주님 앞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의 저질렀던 죄를 뜨겁게 회개하고 새사람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자신은 폭풍 가운데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연히 자신을 구해주셨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응답을 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자기가 죄사함 받고 새사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폭풍 속에서 살아난 것보다 새사람 된 것이 더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대 이상의 응답, 기대 이상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라고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기대 이상의 은혜를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하게 주 앞에 부르짖을 때 기대 이상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당장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되, 우리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 이상의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런 기대 이상의 응답, 기대 이상의 은혜를 확인하고는 “Amazing Grace”를 외치며 찬양하게 됩니다.

   이미 이런 기대 이상의 응답을 체험하고 찬양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간절함으로 주 앞으로 나가면 주님께서는 또 기대 이상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또 “Amazing Grace”로 찬양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으로 주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다

 

   이 사람이 기대 이상의 응답을 받고 보인 반응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우선 이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이 나았다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아무 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만나신 것도 아니고, 병 낫기 위해 아무런 일도 행하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말도 안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제가 이 왕의 신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아들을 고쳐보려고 그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다행히 예수님을 만나서 간청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를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아들이 나았으니 돌아가라” 과연 그 말 한 마디만 듣고 다시 그 먼 길을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요즘 같으면 휴대폰으로 전화해서 확인이라도 하겠지만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았으면 더 확인하려고 주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믿고 순종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그 말씀만 믿고 바로 돌아서서 가버나움으로 갈 수 있었을까요?

   롬 10: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믿으려 노력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보니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분이라면 자기 아들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 아들이 나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의 열매입니다. 내가 생각해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내 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들은 그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내 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때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믿을 뿐 아니라 믿고 순종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순종해서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믿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바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자동차와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를 사서 보물처럼 차고에 보관해 놓지 않는 것처럼 믿음은 그저 소유하고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동차를 사서 늘 타고 다니며 활동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순종하고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히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에서 믿음을 소개하며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준비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고...

   그렇습니다. 믿음은 행동하게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새 삶을 만들어냅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 사람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그 가정이 다 예수 믿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주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왕의 신하처럼 간절함으로 주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께서 기대 이상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들으시고 여러분에게 믿음이 생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분에게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이 생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