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아래의 풍경

< 본문 누가복음 23:33-38 >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가 그린 명화 가운데 우리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본 것’(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그림1)이라는 독특한 그림이 있습니다. 1890년 경에 그려졌고, 지금은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박물관(Brooklyn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여타의 다른 십자가 그림과 관점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골고다의 풍경을 그린 수많은 성화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그린 것들입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통과 그 십자가에서 보여진 놀라운 사랑을 보라는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시선으로 골고다를 바라본 풍광을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림 맨 아래에는 십자가에서 못에 박혀 피가 흐르는 예수님의 발끝이 보이고, 그 아래에 큰 슬픔으로 인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올려다보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가 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오른쪽 옆에는 신 도포주를 적신 해면과 우슬초가 놓여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뒤에 있는 세 여인 가운데 중앙에 있는 이가 성모 마리아이고, 그 옆으로 예수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 여인 곁에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습니다. 그 뒤 그림 왼편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양손을 단단히 모으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로마 군인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태복음 27:54)라고 외쳤던 백부장입니다. 백부장 양옆에 긴 창을 쥐고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성전 경비병들입니다. 오른쪽 성전 경비병의 창끝 지점에는 어둠의 세력을 상징하는 컴컴한 무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편 가운데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들로, 그들의 얼굴에서는 자신들이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 옆에는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마태복음 27:40)고 외치던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에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서 골고다까지 따라왔던 군중들의 다양한 모습과 그들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표정은 다양합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바라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표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그 골고다에 있다면 나는 어느 부류의 사람이었을까요?

  이 그림을 그린 제임스 티소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1871년 런던에서 자리를 잡고 풍자화가이자 여성의 우아함을 묘사한 화가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다 1882년 파리로 돌아온 후 1888년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죽을 때까지 성경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작품에만 전념했습니다. 또한 직접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얻은 견문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넓혀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린 것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채로 고통 속에서 숨져가는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있는 그들을 바라보실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물론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제자 요한과 같이 비통해해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골고다에는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행악자 두 명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십자가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담담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34절 마지막에 보면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9:23절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눠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라는 가장 처참한 처형을 행하고도, 그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는 이의 마음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이 해야할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형수의 몸에서 벗겨진 옷을 네 깃으로 나눠 가졌습니다. 당시에는 사형수들이 착용했던 것들을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취해가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이의 고통도, 또 그것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며 절규하는 이들의 아픔도 외면한 채 자기들의 분깃에만 눈이 멀어 누가 더 좋은 것을 가져갈지에만 혈안되어 있는 것은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본문 35절은 백성들이 서서 십자가와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자신들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방관자의 자세로 구경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차경기를 관람하듯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그들은 불과 며칠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누가복음 19:38)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환호하며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메시야로 기대하며 영접했습니다. 그것이 불과 닷새 전입니다. 그들은 닷새 만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빌라도 총독이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누굴 놓아주길 원하느냐?’고 물을 때 바라바를 놓아주라!’,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선동당하여 그렇게 외치긴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만일 빌라도 총독이 바라바냐 예수님이냐?’고 물을 때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요청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빌라도가 물을 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지만 않았더라도 어쩌면 예수님은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십자가형 대신에 다른 형벌을 받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도록 하는데, 백성들은 주동자들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은 마치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처럼 방관자가 되어 십자가를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요, 그들은 몇 시간 후에 자신들이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철저하게 느끼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23: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모습을 보면서, 로마 백부장의 외침처럼 죄없으신 의인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자기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슴을 치며 골고다를 떠나야 했습니다. 자신들은 십자가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 것처럼 방관자(구경꾼)로 골고다에 서서 십자가 처형을 구경했지만, 결국 그 모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35절은 이어서 관리들의 태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리들은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하면 그들이 욕망하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가지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예수심을 끌어다 놓고 심문했습니다. 물론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던 대제사장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정죄했지만, 대제사장이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에게 당신들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한목소리로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마태복음 27:66)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맞춰 보라.’, ‘네가 선지자라면 그것쯤은 알 것 아니냐?’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면 최고의 권력기관입니다. 그런 최고의 권력에 오른 사람들이 마치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때리고 놀리고 조롱했습니다. 관원으로서의 품위라곤 조금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태도는 골고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본문 35절에서 고발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조용히 구경만 하던 백성들보다 훨씬 더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조롱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은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메시야를 정죄했고 메시야를 죽이는데 앞장 섰습니다. 자기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36절에 의하면 또 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인들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신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희롱하다는 말은 아이들이나 천한 노예들이 하는 천박한 장난질을 말합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한 말은 앞서 산헤드린 관원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은 네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어쩌면 로마의 군인들은 그런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희롱한 그런 말을 한 듯합니다. 다만 관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라면이라고 조롱한 반면, 로마 군인들은 왕이라면이라고 희롱했습니다. 그렇게 달리 표현한 이유는 로마인들에게 최고의 권력자는 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의 최고 권력자들이자 종교지도자들인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조롱하자, 자신들도 덩달아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아래에는 여러 군상의 인간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런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비록 고통 속에 계시지만,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안타까운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어떤 사람들이 내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를 누구의 모습과 비슷하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혹 예수님의 옷가지를 제비뽑아 가져간 군병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챙겨야 할 것에만 혈안되어 살아가는 바로 그 모습으로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마치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그저 내 할 일만 하고, 내가 얻어갈 것만 얻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보고 눈물 흘리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생각해도 내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저 십자가는 주님의 것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십자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옷가지를 제비뽑아 가져간 군병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구경만 하고 있는 백성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살고 있진 않습니까? 한 때는 그래도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이익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고, 이제는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뭔가 기대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구경꾼의 자리로 물러나버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구경꾼처럼 예배를 드리고, 남들은 기도하고 은혜 받고 찬송하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저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신앙이 때론 장식품입니다. 기분 좋을 때에는 멋진 것 같지만 실증이 나면 언제든지 서랍 속에 처박아 버릴 수 있는 장식품입니다. 그러다가 때때로 가슴을 치며 후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곧 그 때뿐입니다. 다시금 구경꾼의 자리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혹 우리의 신앙이 구경꾼의 자리에 있진 않습니까?

 

어쩌면 관원과도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누릴만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기죽지 않을만큼 성공도 했습니다. 그런 내게 십자가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공하는데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출세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주님이 안 보여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나에게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교회에서 지도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내면에는 주님을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저 내 성공과 출세, 내 권세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삽니다. 교회에 나올 때에는 경건한 것 같지만,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신앙이나 믿음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가 그렇게 관원처럼 살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 십자가의 예수님을 희롱하는 군인들처럼 살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관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자 그들도 덩달아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지는 소리에 끌려, 객관적인 판단이나 신앙적인 양심에 따라 생각해보지도 않고, 덩달아서 기독교에 대해서나 신앙에 대해서 또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마치 교회를 비난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확한 것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기독교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욕하기에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본문의 군인들처럼 말입니다. 신앙이나 기독교 또는 교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글에 대해서도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 디모데전서 4:2절의 말씀처럼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세상 사람들의 조롱에 신앙의 양심을 내팽개치고 덩달아 비난하고 거짓말에 동조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혹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는 제자들 말입니다.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도 주님이 붙잡혀 가실 때 모두 도망가버린 제자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죽어가실 때 골고다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던 제자들이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데 보이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주님이 필요하다고 찾으시는데 나 살기 바쁘다고 주님의 부르심에 외면한 신앙인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자.’고 말씀하시는데 나 좀 내버려 두라.’고 주님 곁을 멀리 떠나버린 우리는 아니었습니까? 그나마 믿을만한 사람은 어린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눈에 비쳐지고 있을까요? 우리의 모습이 제비뽑아 옷을 나누기에 정신없는 군병들은 아닙니까? 그저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 섰던 관원들, 혹은 남들이 하는 말로 예수님을 조롱하는 군인들은 아닙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최소한, 내가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십자가 곁을 지켰던 나이 어린 제자 요한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제 시대 항일저항 시인이었던 윤동주는 교회당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일제 시대의 암울한 상황에서 그는 십자가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괴로워하지만 행복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괴롭지만, 당신의 고통과 흘린 피로 인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것을 기대하며 행복해 하는 바로 그 예수님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과 조국을 바라봅니다. 지금은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언젠가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 조국에 해방과 광복의 기쁜 날이 반드시 올 것이란 희망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 십자가의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본문 34) 이 기도는 단순히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 서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이 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 채 도망치고 없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때론 군병들처럼, 때로는 구경꾼처럼, 때로는 관원이나 군인들처럼, 그리고 때로는 도망친 제자들처럼 살아가는 이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기도도 들어야 하지만, 우리가바른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골고다 십자가 앞에서 선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