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피로 말미암아

< 본문 에베소서 1:3-7 >

 

종교개혁 시대 독일의 화가인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Younger, 1515-1586)1555년에 그린 마르틴 루터와 함께 하신 구세주 그리스도’(Christ As Savior With Martin Luther)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사진1> 이 그림은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흐가 구상한 것을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가 완성한 작품입니다. 바이마르 교회에 봉헌된 세 폭짜리 제단화(Weimar Altarpiece)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으로, 두 번째는 붉은 천을 두르고 죽음과 사탄을 제압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세 번째는 희생제물로서의 양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을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왼편은 율법과 심판을, 그리고 오른편은 복음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 오른쪽 뒤로 모세의 율법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벌거벗은 사람이 그 율법을 보고 소스라쳐 놀라며 도망치고 있고, 그가 도망치는 산 아래는 불에 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은 심판을 의미하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 왼편에는 붉은 천을 두른 사람이 투명한 창을 들고 괴물을 제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린 다음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발밑에 깔린 괴물은 사망의 괴물인 사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하셨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두르고 있는 세마포가 양 옆으로 흩날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죽음과 멸망이 아니라, 부활이며 생명의 자유로운 비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 갖고 보아야 할 부분은 십자가 오른쪽에 서 있는 세 사람입니다. 십자가 가까이에 붉은 천을 두르고 있는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오른손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고, 왼손은 손가락 세 개로 십자가 앞에 있는 어린 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고 외친 그 말씀처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앞쪽에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는 손으로 성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 천주교가 가르쳤던 교회를 통한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무기를 가지고 당시의 교권에 의해 부패된 천주교회와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 보아라.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 하얀 수염을 기른 사람은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입니다. 그는 마르틴 루터의 절친이었으며, 루터의 아들 한스의 대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크라나흐의 정수리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루카스 크라나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로마 천주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그의 보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교황청에서 발행한 면제부를 가져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루터는 강하게 아니라고 거부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면제부를 사야만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대로 십자가 보혈로 죄용서 받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로마천주교는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래서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직접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만인제사장설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고 죄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신약시대에는 그 역할을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죄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스 크라나흐는 사제인 루터나 세례 요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멸망에서부터 건져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피를 통해서입니다. 이미 율법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사하느니라.”(레위기 17:11) 피는 곧 생명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우리의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인 피를 흘려 죽어야만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로 가득한 인간이기에 죄로 물든 우리의 피로는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 16:31)

  우리가 구원받은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방법이 오직 그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방법을 선택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그 방법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셨기에,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3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도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복을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최고의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늘의 복으로 우리의 삶에 채워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이사야 59:2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리고 예레미야 5: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우리에게 죄가 있는 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고, 결국 그 죄라는 장애물이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모든 복과 좋은 것을 우리에게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에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그 막힌 담을 헐어버렸습니다. 장애물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과 복이 아무러 장애물을 거치지 않고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덕분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복을 받아누리길 원하신다면 우리는 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이 날마다 우리에게 넘치게 흐르도록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죄씻음 받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을 누릴 때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자랑하더라도, 내 안에 신령한 기쁨으로 가득하면 그런 것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잘 되었다고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일이 잘 풀렸다고 자랑하더라도, 죄 용서받는 기쁨으로 가득하면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렸음을 알기에 그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말씀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었고, ‘흠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흠없는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은혜 덕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흠없는제물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혹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을 덧입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덧입지 못하면 우리의 예배는 허공에 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7:5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성소의 휘장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열고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에는 시은소가 있습니다. 시은소(施恩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때 그 시은소로 들어가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가로막힌 것이 없이 누구나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지성소로, 시은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누구나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그 예배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 덕분입니다. 그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는 예배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때 우리는 하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것보다 더 귀하고 복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존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 보혈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본문 6절에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거져 주시는 은혜를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 덕분에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사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된 것도 십자가의 은혜요 주님의 보혈 덕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죄악 가득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만 주신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이유,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 씻음받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에베소서 2:11-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가깝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가깝게 하셨고, 둘째는 믿음의 사람들과 가깝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에서 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내 곁에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함을 인생의 최고의 행복으로 누리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으려서 당신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죄가 있는 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에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간절히 바라시기에 우리의 죄를 씻어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슬플 때이든지 기쁠 때이든지, 때로는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 때문에 우리의 삶이 힘들 때에든지 평안한 때이든지, 하나님이 늘 내 곁에 계심을 잊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십시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을 하나님께서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신 것처럼,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형제들과 늘 가까이하며 사십시다. 우리는 다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모습도 다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이요, 할례자들에게는 무할례자였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서는 그 언약과 무관한 사람이었고, 하늘의 소망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편도 다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도 다 다르지만,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믿음의 형제들입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한 하나님을 동일하게 아버지로 고백하는 믿음의 형제들입니다. 믿음의 형제들과 가깝게 사는 것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사람들입니다. 앞서 보았던 그림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가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떨어지는 것처럼, 오늘도 우리가 그 보혈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 보혈에 흡족히 젖어야 합니다. 그 보혈로 죄 용서를 받고, 그 보혈로 하늘의 복을 누리고, 그 보혈의 은혜로 예배자가 되고, 그 보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보혈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 보혈 때문에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 보혈 때문에 우리가 절망에서 일어설 수 있고, 그 보혈 때문에 우리가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보혈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그 보혈 때문에 우리가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정수리에도 십자가 그리스도의 보혈이 가득 흘러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그 보혈을 정수리를 통해서 우리의 가슴에 가득 채우십시다. 보혈의 은혜 안에 푹 젖어 사십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요 죄를 이기는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 승리자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