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홀로 두시렵니까?
< 본문 – 마태복음 26:30-35 >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피렌체나 로마에 견줄만한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기여했던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1506년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로부터 ‘이탈리아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라는 극찬을 들었던 지오바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The Crucifixion)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여러 개의 그림 가운데 독특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501년 경에 그린 것입니다.<그림1> 그림의 맨 아래에 있는 해골로 시작하여 아래에서 위로 그림을 읽어가다 보면, 시들어 앙상한 뼈대만 남은 나무와 묘비, 그리고 풀밭과 초원을 지나 물레방앗간에 이어 마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언덕과 구름 위의 파란 하늘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광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거기에 달리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같이 못 박혔던 두 강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인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제자 요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벨리니의 초기의 작품에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른 인물들이 배치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보다 46년 전인 1455년에 다른 그림<그림2>에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비통해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로마 군인들을 비롯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1464년 경에 그린 또다른 그림<그림3>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성모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 비통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단 세 명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말년에 그린 그림<그림1>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림 뒤로 보이는 화려하고 환하게 드러난 도시와 상반된 해골들이 놓여진 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높이 예수님이 달려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왜 지오바니 벨리니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 그린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에 예수님 외에 아무도 그려 넣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수록 예수님께서 너무 외롭게 십자가 달려 있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자꾸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가 십자가 뒤로 보이는 환한 세상에 도취되어 십자가 곁에서 떠나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홀로 쓸쓸하게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같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제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려두고 환한 세상으로 떠나버려, 예수님께서 홀로 쓸쓸하게 십자가 위에 계십니다. 때로는 세상 살아가는 것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때로는 세상의 쾌락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때로는 우선 급한 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려두고 내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에 홀로 외로움에 사무쳐 계신지도 모릅니다.
물론 에수님은 당신의 생애에서 참 많은 외로움을 겪어내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홀로 광야로 가셨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홀로 지내셨습니다. 벳새다 빈들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그들을 피해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가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은 더욱 혼자일 때가 많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홀로 버려지실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지금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함께 걷고 계시지만,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기대감이 사라졌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은 평범하게 사는 그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쳐 주셨고, 수많은 이적들을 보여주시며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1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참으로 가슴 아픈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가롯 유다가 배신하여 당신을 팔아먹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가롯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도 가롯 유다와 함께 하셨고, 떡 한 조각을 가롯 유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가롯 유다를 사랑하셨고, 그에게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사랑이나 기대와는 달리 가롯 유다는 떡을 받고는 그길로 나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정성이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머지 제자들을 데리고 지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고 계십니다. 비록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먹기 위해서 떠난 것은 아니지만, 함께 가고 있는 나머지 제자들도 스승인 자신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기 위해서 그 밤에 예수님 곁을 떠나버린 가롯 유다나 지금 당신과 함께 겟세마네도 가고 있지만 모두 도망칠 제자들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 주님을 버린다는 것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의 거리, 함께 걷고 있지만 따로 걷는 것과 같은 이질감,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었지만 그 사랑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배신감, 어쩌면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들이 겪는 갈등이나 감정을 느끼지 않으실 거야’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니까 우리 인간이 겪는 고통이나 아픔, 배신감이나 외로움, 이런 것을 전혀 느끼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셨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의 성품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는 힘드셨고,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배신당할 때에는 가슴에 쓰라림을 느끼셨고, 외로우실 때에는 고독감을 느끼셨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좀더 가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39)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내 마음이 매우 고민되어 죽게 되었다.’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고민으로 인해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아!’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겪어내야 하느냐, 아니면 십자가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민이었습니다. 그 고민이 얼마나 깊었던지, 죽을 것만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인데, 죽을 것만 같은 깊은 고민과 갈등으로 인해 지쳐 계신 예수님인데, 제자들은 모두 그런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쓰라리고 자괴감이 들으셨겠습니까? ‘3년 동안이나 그렇게 사랑해 주고, 배신한다는 놈도 끝까지 사랑해 주었는데, 마지막 만찬에서는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도 나누어주었는데, 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데, 그런데 이 놈들은 자기 목숨 살겠다고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거야.’ 이런 생각하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감정이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느끼는 감정, 예수님께서도 느끼십니다. 그러니 같이 가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은 홀로 걷는 기분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이후에도 계속 홀로이셨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고민되어 죽을 것만 같은데, 아무도 예수님의 고민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붙잡혀 가실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 그래서 그런 결의를 지키기라도 할 것처럼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리기도 했던 베드로, 그러나 결국 그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멀찌기 예수님 뒤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군병들에게 붙잡혀 가실 때 예수님은 외롭게 홀로 결박당하여 끌려가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당하실 때도 예수님은 홀로이셨습니다.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변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버리고 도망칠지라도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던 베드로는 멀찍이서, 대제사장의 공관 뜰에서 불을 쬐며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 편에 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법정에서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에도, 빌라도 총독의 재판정에서도 홀로이셨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채찍을 내리칠 때에도 어느 누구 하나 ‘그러면 안 된다.’고 예수님을 두둔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흉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 주길 원하느냐? 아니면 예수를 놓아 주길 원하느냐?’고 물을 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 속에 서 계셨지만 예수님은 철저하게 홀로이셨습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가실 때에도 예수님은 홀로이셨습니다. 비록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끌어다가 에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홀로이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 주변에 수많은 구경꾼들과 군병들, 사랑하는 어머니나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철저하게 고독하셨습니다. 세 시간 동안이나 지속된 깊은 어둠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셨듯이,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홀로이셨습니다.
어쩌면, 앞서 보여드린 지오바니 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철저하게 고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예수님을 지금도 고독하게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이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은 깊은 고독 속에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그렇게도 정성을 들여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돈궤를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해 외로우셨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마저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철저하게 홀로이셨습니다. 고독하셨습니다. 깊은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또다시 고독의 자리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3: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 당신과 함께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금방 읽어드린 말씀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전도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도 하며’라는 말은 전도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신 첫 번째 이유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외로우실 때, 예수님께 누군가가 가장 필요할 때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예수님 홀로 남겨두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제자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 전도한들 그 복음이 능력이 있겠습니까? 전도는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말솜씨가 좋아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해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결코 내 힘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말주변이 없고 사람들 앞에 내 세울 것이 없어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면 내가 전한 복음이 능력을 나타내 생명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앞서 ‘나와 함께 하자. 나와 동행하자. 내 은혜 안에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려고 부르심을 받았는데, 가장 중요할 때 주님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할 떼 주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쓸쓸하게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으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지금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뭔가 큰 일을 하는 것보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는 에덴동산을 찾아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창세기 3:8절에서 하나님을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과 함께 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힘들 때 다 도망치고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었지만,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셔서 그들과 함께 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지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보혜사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보헤사 성령으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니 함께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신 예수님이신데, 우리가 그 예수님께 등을 돌이며 살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홀로 남겨두고, 우리의 생활에 쫓겨 정신 없이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나의 욕망을 좇아 사느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외면한 채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성공해서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것이 아닙니다. 설혹 우리가 그 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허공에 메아리치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누리가 못한다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산다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데, 어떻게 나중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지금은 제가 너무 바빠서요 주님을 생각할 시간이 없네요.’ ‘제가 지금은 너무 힘드니까 조금 정신 차리고 주님과 함께 할게요.’ 여러분, 혹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나중이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오늘입니다. 우리도 한 때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주님 제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놓고선 지금 우리는 ‘주님, 지금은 말구요. 조금 있다가요. 조금 한가해 지면요.’라고 핑계대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살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자든지 깨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소원이요 바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사는 귀한 절기인데, 지금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로 홀로 남겨둔 채 정신없이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네 삶이 바쁘고 힘든 줄 아는데, 나는 네가 먼저 나와 함께 살면 좋겠구나.’ 여러분, 주님 홀로 십자가에 외롭게 남겨두지 마십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