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 마주 서라!

< 본문 고린도전서 1:23-24 >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천재라고 불리는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1954년에 그린 십자가 처형’(Crucifixion)이라는 제목의 독특한 유화작품이 있습니다.<그림1>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비전통적이고 초현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무 십자가인데, 여기서는 하이퍼 큐브 십자가입니다. 다면체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있고, 그 앞에서 예수님을 처다보고 있는 한 사람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얼굴은 뒤로 젖혀져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몸에는 채찍에 맞은 상처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에서 더욱 특별한 것은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입니다.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십자가 앞에 성모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 대신에 자신의 아내 갈라(Gala)를 그렸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의 아내가 아닌 가롯 유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어깨에 두른 노란 옷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노란 옷은 배신을 상징하고, 성화에서 가롯 유다를 표현할 때 이 색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도르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처럼 성화에 종종 가롯 유다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에서 가롯 유다가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재판 과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기 전에 가롯 유다가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예수님의 골고다에 가롯 유다가 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화가는 배신자 가롯 유다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와서 십자가 앞에 세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가롯 유다 사이에는 우주도 멈추게 할 것 같은 침묵만 존재하도록 그려놓았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왜 화가는 가롯 유다를 십자가 앞에 끌어다 놓은 것일까요? 이 그림을 해석하는 평론가들 중에는 이 그림이 가롯 유다를 비굴하고 스승을 배신한 사악한 죄인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과 당당하게 독대하고 있는 제자로서의 유다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비록 스승을 배신하긴 했지만 제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경의롭게 바라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 그림은 가롯 유다를 배신의 아이콘이 아니라, 배신한 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심하는 그의 내적 심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스승을 배신한 가롯 유다라 하더라도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과 독대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가롯 유다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를 향한 삶, 십자가를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이었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는 3년 동안이나 자기의 스승으로 삼았던 예수님을 배신하고,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가롯 유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이미 자신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가롯 유다가 시치미를 떼고 예수님께서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태복음 26:25)라고 되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했을 때 가롯 유다는 그의 마음을 고쳐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에수님께서 붙잡혀 정죄당하심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는지,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맙니다.

  가롯 유다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던 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 때 베드로가 당당하게 나서며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3)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더더욱 핏대를 높이며 대답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자신을 알아본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 아니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대답한 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 주님을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고, 심문을 당하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시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누가복음 22:61) 그리고 그 길로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위대한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스승을 배신한 가롯 유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여종의 물음에 자신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분명 그 둘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서 함께 했었고,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가롯 유다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래서 성화들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묘사한 그림 중에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베르도를 세워놓으면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 자리에 베드로가 없었지만, 그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쓴 베드로전서 2: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굳이 십자가 앞에 소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다릅니다. 그는 십자가 앞에 서 본 경험이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롯 유다를 십자가 앞에 소환하여 세워놓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그 가롯 유다의 모습이 때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인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십자가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존재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사도 바울도 그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무척이나 혐오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명기 21:23)는 율법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고,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그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의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깊이 묵상했습니다. ‘저주받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율법의 말씀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저주와 수치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는 극악범을 처단하는 최악의 사형도구였습니다. 로마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꾸민 괴수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노예들에게 적용되는 형벌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것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일 뿐입니다. 그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로마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보지 않는 유대인들, 십자가 앞에 서 보지 않는 로마제국의 시민들은 십자가가 그렇게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서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고린도전서 1:1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만 그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경험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무던히도 미워했고, 못살게 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디모데전서 1:13) 그렇습니다. 그의 고백처럼 그는 비방자였습니다. ‘비방자였다.’는 말은 모독하고 어리석은 말로 상해를 입힌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박해자였다.’는 말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격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되어 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폭행자였다.’는 말은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난폭하게 행동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그런 태도를 교회를 잔멸하려 했다.’(사도행전 8:3)고 말씀합니다. 마치 멧돼지가 온 밭을 헤집고 다니며 망쳐놓은 것처럼 교회를 그렇게 망쳐놓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이 변화되었습니다.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가 180도 달리진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고는 바로 왕처럼 강퍅했던 사도 바울이 변화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걸 사도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 15:10)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힘이나 노력이나 결단으로는 이렇게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이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런 자신이 이렇게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건 모두 십자가 앞에 선 자신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만 알기로 다짐했고,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사랑하며 마음에 품고 살았다는 것은 늘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워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늘 십자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가 가롯 유다를 십자가 앞에 끌어다 놓은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 앞에 끌어다 놓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 앞에 세워놓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와 마주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비방자였고 박해자였고 폭행자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옛날의 그런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늘 자신 안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 선 가롯 유다처럼, 우리도 십자가 앞에 서면 언제나 예수님을 배신하고, 에수님께 등을 돌리며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는 경건한 체 하지만 십자가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위선적인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죄악에 물들어 있는 더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내가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사는 못난 존재인지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 나를 세워놓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니 여전히 부끄럽고 못난 나의 모습을 보입니다. 여전히 죄에 종노릇하는 내가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우리고 그렇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여전히 나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서 나를 매일 죽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내가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서 십자가와 마주할 때 얻어지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건 그런 못나고 연약한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살바도르 달리가 가롯 유다는 십자가 앞에 끌어다 놓은 이유는 어쩌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게도 내려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났고 죄악투성이라 하더라도 십자가 앞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 어떤 죄악에 빠졌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비방자였고 박해자였고 폭행자였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그는 양심에 가책 때문에 가롯 유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앞에서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잔멸하려 했던 청년 사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오늘도 우리에게 흘러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악에 깊이 빠져 있더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다가 낙심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신앙의 회의 때문에 번뇌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실패하여 일어설 힘조차 없을지라도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십자가 앞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십자가 앞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도 십자가 앞에 서야 할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 앞에 섰던 사람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배반의 상징인 노란 옷을 입고 서든, 낙담하고 실패하여 거지의 누더기를 입고 서든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동시에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