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약함에 함께 하신 분
< 본문 – 히브리서 4:14-16 >
프랑스의 작은 마을 콜마르(Colmar)에 있는 운터린덴(Unterlinden) 미술관에는 유명한 그림 한 장으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이젠하임 제단화’(사진)로 알려진 이 그림은 16세기 독일의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70경-1528)가 이젠하임에 있는 안토니오 수도원 성당의 중앙 제단화로 그린 목판 유채화입니다. 이 그림의 특징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몸에 검붉은 점과 괴사당한 발 등은 이전에 그린 제단화에서는 볼 수 없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세시대에 성당에서는 제단화나 기타 성화를 통해서 글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교훈을 전달하거나 헌신을 이끌어내고 신앙심을 고양시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단화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염병에 걸려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안토니오 수도원은 전염병과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당시에는 무도병(舞蹈病)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무도병이란 곡식의 맥각균이라는 곰팡이에 의해서 걸리는 병인데, 곰팡이가 혈관을 수축시켜 혈액의 이동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손발은 물론이고 얼굴마저 검붉게 변하며,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다가 괴사에 이르게 됩니다. 이 병에 걸리면 몸이 심한 경련으로 뒤틀리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기도 합니다. 환한 대낮에도 길거리에 나와서 고통에 못 이겨 춤을 춘다는 것 때문에 무도병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고통으로 인해 밤새도록 춤을 추듯 움직이는데, 그런 쉴 새 없는 움직임을 버텨내지 못하여 발가락에 괴사가 오고, 심한 경우 심장이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심장박동이 멈춰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15-16세기 당시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는 약 3천명 가량이 이 병으로 고통당했고, 중증 환자 25명 가운데 4명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원인이 맥각 중독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의학적인 지식이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사막의 수도자(수도자들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오가 이 병에 걸려 고통을 호소하는 귀족의 아들을 고쳐주었다고 알려지면서, 이 병을 ‘안토니오의 불’이라고 불렀습니다. ‘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병에 걸리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림 중앙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예수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맥각에 중독된 것이 분명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부는 채찍질과 전염병으로 인한 상처투성이이고, 입술과 발가락은 파랗게 질려 있습니다. 활짝 펼쳐진 앙상한 손가락 끄트머리는 기괴하게 뒤틀려져 있습니다. 패널 왼쪽에는 ‘안토니오 불’을 치유한다고 알려진 성 안토니오가 그려져 있고, 패널 오른쪽에는 ‘전염병을 막아주는 수호성인’인 성 세바스찬(St. Sebastian)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왼쪽 옆에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쓰러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를 부축하는 제자 요한, 그리고 비통한 모습으로 절규하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세례 요한이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서 있고, 그 뒤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는 요한복음 3:30절의 말씀이 라틴어로 씌여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의 성당 제단화로 그려졌지만, 지금은 프랑스혁명으로 수도원이 불에 타자 지금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페스트와 성 안토니오 불에 희생되어 너와 함께 고통받고 있단다. 그리스도의 몸도 너의 몸과 똑같이 망가졌으니, 그분은 너의 아픔을 이해하신단다.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무도병으로 인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이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이 그림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으셨으며 그러기에 우리의 아픔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병자들을 위로했습니다. 16세기에도 무도병으로 인해 고통당한 사람들이 치료하기 위해 찾아오면 먼저 환자에게 신선한 빵과 와인, 그리고 성 안토니오 유물에 담갔다가 꺼낸 약초를 준 후에, 환자를 이젠하임 성당 성가대석으로 데리고 가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겪은 예수님을 기리며 묵상하라고 ‘처방’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환자들은 이 제단화를 보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우리와 같이 느끼신 분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통 가운데 있든지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에수를 깊이 생각하라.” 성경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바라보며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서 바라보야 할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대제사장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를 가슴에 품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 죄를 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용서의 은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하루 7월 10일 대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구약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그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제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매년 반복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에 매년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큰 대제사장’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대제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깊이 관심을 갖고 주목하여 바라보며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깨달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그리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모두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도 모두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계신 분이시기에 15절에서 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쉽게 표현한다면 ‘우리가 겪는 모든 연약함에 공감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연약함(ασθενεια)’이라는 말은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함, 배고픔, 목마름, 질병을 의미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나 연약하고 겁이나 두려움이 몰려드는 것, 무기력해지고 소심해 지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인간 본성이 약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쓰인 몇 가지 경우를 보면 우리가 좀 더 이 말이 어떤 때 쓰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소개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8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병’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연약함과 같은 단어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말은 더 이상 그 어떤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병, 모든 사람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병,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병을 이야기할 때 ‘연약함’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고린도후서 12: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자신의 약함은 육체적인 질병입니다. 그는 그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약함’을 안고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또는 늘 곁에 있던 의사 누가의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고쳐주셔야만 회복될 수 있는 질병이었습니다. 그 질병이 그에게 바로 연약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은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고, 아무리 힘을 써도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연약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합니다. 우리에게는 극복하려고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연약함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연약함을 우리는 우리의 내면세계 저 밑바닥에 밀어 넣고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내면 저 밑바닥에 밀어 넣어놓은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를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주님께서는 다 헤아려 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그것을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것을 공감하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마치 앞서 보여드린 이젠하임 제단화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치유되지 않는 병으로 인해 고통 속에 울부짖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친히 그 병에 동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주님께서 직접 경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병들어 고생할 때만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아 괴로워할 때에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험을 받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지? 내가 그 맘 다 안다. 나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보았기 때문에 그 힘든 마음을 다 알아!”
때로는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졌을지라도 우리를 꾸중하고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죄에 빠진 우리를 용납해 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힘들지? 죄악에 빠져 마음이 아프지? 내가 네 마음 다 안다. 너로서는 결코 쉽지 않았을거야. 그러나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단다. 내가 너를 도와줄게. 힘을 내!”
때로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에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내가 네 마음 다 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다 알아. 나도 채찍에 맞아봤거든. 나도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도 겪어보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다 쏟아내었거든. 내 죄 때문이 아니라 네 죄를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 힘을 내, 내가 네 질고를 대신 져 주마.”
우리가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쓰러질 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선 “힘들지! 나에게 와. 내가 네 짐을 대신 져주마. 내 강한 어깨를 너에게 빌려줄게. 나를 의지하렴.”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넉넉히 질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곁을 다 떠나고 나 홀로 외롭고 쓸쓸히 눈을 흘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어 너무나 쓸쓸하지?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주마. 그 힘든 마음 나도 안다. 내가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 내 마음도 무척이나 아팠단다. 그래서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단다.” 그러면서 홀로 눈물짓는 우리를 당신의 포근한 품에 안아 주십니다.
로마서 8: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때로 무얼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기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돕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령의 도우심이 바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도우심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로마서 8:24)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곧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때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손과 발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며 “아버지, 아무개의 죄를 죄대로 벌하지 마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그를 위해 대신 고난을 받고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혔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그의 모든 죄값을 제가 대신 치르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를 위해 고난받고 피 흘려 대신 죽었으니 그를 용서하시고 그를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심판이나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면제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우리를 다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품어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할 때에도,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워할 때에도, 우리가 유혹을 받아 마음이 괴로울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공감하시고 우리에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께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을 지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추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더러워진 우리의 모습을 가지고는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더럽고 추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 부르시며,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 누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감싸 주시기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심을 기억하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가 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죽어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신에 주님께서 대신 고난받으시고, 우리 대신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연약함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가 감내해야 할 연약함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이사야 53:4-5)
여러분,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분,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져주신 분, 우리의 연약함에 공감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믿음을 굳건하게 하십시다. 본문 14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십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보듬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편을 이해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꾸짖지 않으시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