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가 그쳤습니다.
< 본문 – 여호수아 5:10-12 >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이후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광야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베두인(Bedouin) 족속입니다. 사막의 유목민인 그들은 주로 씨족을 중심으로 생활을 합니다. 사막이나 광야에서는 대단위로 집단을 이루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숫자가 무려 60만 명이나 됩니다. 그것도 남자 장정만 말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군집하여 광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먹고 사는 것입니다. 먹을 음식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만나를 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슬처럼 내린 만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신광야에 있을 때부터 내리시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이슬이 내려 있었고,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둥글고 서리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만나입니다. 모양은 진주와도 같았고(민수기 11:7) ‘깟’이라는 식물의 씨앗과도 같았습니다.(민수기 11:7, 출애굽기 16:31)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거두어다가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처럼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그러면 기름 섞은 과자 맛이 났습니다.(민 11:8) 메추라기와 함께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광야는 자신이 무언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나 금덩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살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다 하더라고 물과 음식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를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살게 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40년이란 오랜 시간을, 그것도 장정만 60만 명이라는 어머어마한 사람들이 함께 광야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마실 물이 없어 고통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못해 죽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물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깨뜨려서라도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낮은 굉장히 덥습니다. 중동지역의 낮의 온도는 굉장히 높습니다. 제가 2016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그 때가 9월 말-10월 초였음에도 쿰란 지역의 온도가 섭씨 43도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 여름이라면 더 더울 것입니다. 사막이나 광야에서는 아무리 온도가 높아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그래도 시원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광야나 사막에는 그늘이 많지 않습니다. 60만 명의 장정들이 피할 수 있는 그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뜨거운 사막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덮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막이나 광야의 밤은 너무나도 춥습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에 의해 달궈진 모래라 하더라도 밤이 되면 습기가 없는 환경 때문에 뜨거운 공기가 다 대기 중으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러면 지면의 온도를 급하강하여 때로는 영하의 기온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몸이 저체온증으로 인해 사망하는 일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의 추위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감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광야에서 보냈지만, 그들의 옷이 낡아지거나 신발이 헤어지는 일도 없었습니다.(신명기 29:5)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는 광야,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버텨낼 수 없는 광야.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사는 문제를 해결할 살 수 없는 광야. 그곳에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품에 안으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살펴주시고 생존을 보호해 주셨다는 것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만나’입니다. ‘만나’는 그들의 생존을 대표하는 음식이요,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나는 인간의 생존 가능성이 제로인 상황에서 생존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넉넉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그들에게 훈련의 시간이었고,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광야에서 우리 인간은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셩들에게 만나를 주셨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만나가 그쳤음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와 길갈에 진을 치고 머물고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는 것이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일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여호수아 5:1절에서 말씀합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여기서 ‘요단 서쪽’이라는 말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곧 자기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은 광야 40년을 지내온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척박한 광야에서 그 많은 무리가 40년 동안이나 살아왔다면 그들에게는 분명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그들을 인도하신 신이 정말 위대한 분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길갈에 진을 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면 그들은 최소한 일주일 동안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 틈을 이용해 가나안 부족이 이스라엘을 선제공경해 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에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왜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향하라고 하시느냐?’고, ‘할례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가나안 부족이 우리를 공경하면 우리가 다 죽게 되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광야 40년의 시간을 지내오면서 분명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지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와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할례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몸에 새긴다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듯이, 가나안 땅에서도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다짐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유월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어 바로의 백성으로, 바로에게 예속되어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바로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지키는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이제 이 새로운 땅에서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마자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을 뒤로 하고, 이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도,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그들의 결단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이튿날 그들은 유월절에 먹어야 할 무교병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난 소산물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난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셨을까요? 왜 지난 40여년 간 먹었던 만나가 더 이상 내리지 않은 것일까요?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으시겠다는 뜻일까요? 그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 만나가 그쳤다는 것은 만나를 주신 것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이유는 광야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나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만나가 내리지 않아도 그들의 생존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광야가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특별한 개입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여기 가나안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보호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만나가 그쳤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어졌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나를 먹었던 광야의 생활이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었다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아야 할 삶은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40년 전에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그들 앞을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홍해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뒤에서 애굽 바로의 정예부대가 뒤쫓아오자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곤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로 인도하여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앞에는 넘실거리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애굽의 병거들이 그들을 뒤쫓아 올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친 후의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요단 동편 모압 평지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에 그들 앞에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요단강의 강물은 일 년 중에 가장 많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여호수아 3:15) 요단강은 3-4월이 되면 강의 근원이 되는 저 멀리 헬몬산의 눈이 녹아내리면서 엄청나게 많은 물이 흐르곤 했습니다. 어렸을 때 홍수가 나면 마을 옆으로 지나가는 개울에 북청물이라고 하는 황토색 물이 무섭게 흘러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때로 거기에 돼지가 떠내려오기도 하고, 황소가 떠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간을 건널 때의 모습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강물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그러신 것처럼 그 요단강의 물을 멈춰 세워놓으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건너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섭게 흐르는 그 강물로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속에 잠기자 흐르던 물이 멈춰 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요단을 건널 때 홍해와 같이 육지를 만들어놓고 건너라고 하지 않으시고, 무섭게 흐르는 강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일까요? 왜 홍해 때와 같이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대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막힌 담처럼 보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가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와 요단을 건널 때의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성숙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 때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셔야만 생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스스로 농사도 지어야 하고,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성숙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성숙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결코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나 손주들이 처음 자전거를 배운다고 할 때 어른들이 자전거를 뒤에서 붙잡아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무섭긴 하지만 자건거에 올라타고선 페달을 밟는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전거를 붙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습니다. 아이가 ‘붙들고 있어야 돼! 놓으면 안 돼!’라고 말하면 놓지 않겠다고 말하고선 아이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틈을 타서 살며시 손을 놓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자전거 타던 훈련을 했던 아이는 아빠나 엄마가 손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자전거를 탑니다. 그렇게 아이는 혼자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탈 때와 훈련과 연습을 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아이의 모습도 성장했습니다. 그러니 어른이 뒤에서 잡아주지 않아도 이제 혼자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만나는 기적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이 늘 베풀어질 수 없습니다. 늘 기적만 바라보며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장해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성장해갑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도 점점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살 순 없습니다. 갓난아이는 배가 고프면 울면 됩니다. 그러면 엄마가 알아서 분유도 타서 주고, 모유도 먹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 운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조금 자라면 숟가락질도 자기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울면서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어느 순간엔가 베풀어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성숙하여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 다른 길을 가라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이제 다른 길을 가야할 만큼 자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져가야 합니다. 성장하고 성숙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더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새로운 길에서 우리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더 이상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그들 스스로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나가 그치면 자신들의 손으로 농작물을 수확해야 합니다. 광야 때와는 달리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에는 이슬이 마르면 나가서 거둬들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씨를 뿌려야 하고, 가꿔야 합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그들은 더 풍성한 식탁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만나를 먹을 때와는 다른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파종하고 가꾸고 수확한 것을 가지고 내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만나를 먹을 때에는 굳이 나눠먹을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 말고도 누구나 만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지을 때에는 다릅니다. 농사를 짓지 못한 사람에게 밭모퉁이를 남겨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만나를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그 때는 우리가 너무 어렸을 때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장해 가면서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그 때에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는 늘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나를 먹을 때의 신앙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 손으로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어진 결실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만나는 유아기적 신앙입니다. 만나가 그쳤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고 말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성숙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것만 바라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으면서, 하나님께도 그리고 이웃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으로 사십시다. 성숙한 신앙에는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