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집이라

 

 

 

히 3:2-6

 

 

 

 

   제가 즐겨보는 TV프로그램들 중에 EBS의 [건축탐구-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건축 전문가가 특색 있는 집을 찾아가서 집도 소개해 주고, 그 집을 짓게 된 배경 이야기, 그리고 그 집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전문가들을 통해서 요사이 어떤 집들을 짓고 있는지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집을 지은 건축주들을 통해서 어떻게 집을 지었고, 그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집에 산다는 것이 참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경치가 좋고 환경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집이 좋은 집이고, 멋진 외관에 편리하고 미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인테리어를 갖춘 집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건축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집에 살면서 가족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집에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집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건축주들이 그 집을 사랑하는 집, 그런 집이 좋은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집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집이라는 말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집이란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영적인 처소를 말합니다.

   창 28:16-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이 말씀은 야곱이 하란으로 가다가, 들판에서 노숙하며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중에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에 잠에서 깨어 한 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곳을 ‘하나님의 집’(בית אללעהי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들판입니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입니다. 아무런 건물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머무신 곳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창 28:19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잠에서 깨어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부른 뒤에, 간단하지만 뜻 깊은 의식을 치렀습니다.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처럼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어떤 곳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 이스라엘백성들이 흔히 하던 신앙적 습관입니다. 이 의식을 치른 뒤에 다시 그곳의 이름을 정식으로 ‘벧엘’(בית אל)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고전 3: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 18:20에는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 그곳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절을 보면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고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우리 교회나 교회 안의 작은 공동체들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 그곳에 머무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시는 곳, 그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때로는 그곳이 한 개인의 심령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곳이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곳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곳이 믿는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며 교제하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고전 3:16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책망하면서 한 말씀입니다. 고린도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집이고, 고린도교인들이 모인 공동체 즉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집인데, 왜 이 사실을 잘 모르느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의 집인 지 모르다 보니 그 집이 하나님의 집다운 집일 수 없게 됐다는 책망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집일까요? 우리는 좋은 집일까요?

   우리가 좋은 집인지 그렇지 못한 집인지는 누가 판단할까요?  우리가 사는 집이 좋은 집인지 아닌지는 그 안에 사는 우리가 판단합니다. 우리가 그 집에 살면서 행복한지 아닌지, 그 안에 더 오래 살고 싶은지 아닌지, 그리고 그 집이 남에게 소개하고 자랑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우리가 판단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면 우리가 좋은 집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좋으신지 아닌지, 우리 안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하시는지 아닌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지 아닌지를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은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은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은 집이라고 판단하실만한 기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은 집은 어떤 사람들 또 어떤 공동체일까요?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하나님의 집이려면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집이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잘 잡고 있는 사람들 또는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가 좋은 하나님의 집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 소망의 확신

 

   소망의 확신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소망을 살펴보겠습니다. 소망이란 원어로는 ‘엘피스’(έλπί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엘피스라는 말은 성경에서 “믿음으로 바라보는 기대”라는 뜻을 가집니다.

   사실 기대라는 말 때문에 소원과 소망을 혼돈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원과 소망은 분명히 다릅니다. 소원이란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에게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지만,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합니다. 소원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사라지지만, 소망은 믿음이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과거에 단순한 소원을 가지고 살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밝은 앞날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살 기대를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확신이란 그야말로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세상 떠나신 조용기 목사님과 오랜 세월동안 친구로 교제를 해오셨답니다. 한 번은 조 목사님께 물었답니다. “왜 내가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병이 잘 안 났는데, 당신이 기도하면 잘 났습니까?” 조 목사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게 기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기도하면 낫는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당신과 다를 바 없는 목사인데, 그분들의 확신 때문에 병이 낫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망을 확신하는 사람들 그들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망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소망을 확신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확신이 없는 소망은 그저 일장춘몽과 같은 것입니다.

   히 1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히 11장을 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소개할 때 늘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확신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참 좋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실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집중에서도 참 좋은 집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분들처럼 소망의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으로 박봉수는...”, “믿음으로 상도중앙교회는”...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좋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둘, 소망의 자랑

 

   우리가 좋은 하나님의 집이려면 또 하나 소망의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랑하되 소망을 자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일 2: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 요한이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고, 둘은 안목의 정욕을 좇아 사는 것이고, 그리고 셋은 이생의 자랑을 하며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자기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 속에서 자랑거리를 찾고, 그것을 자랑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찾은 자랑거리는 저마다 다르고 다양합니다. 남들에게 없지만 내게는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남들은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놓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이런 자랑거리를 자랑하며, 이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입니다.

 

  옛날 지구상에는 ‘메가케로스’(megaceros)라는 거대한 뿔을 가진 사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슴들은 커다란 뿔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메가케로스는 오래 가지 못하고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뿔 때문입니다. 점점 거대해 진 뿔에 눌려서 번식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뿔 때문에 포식자들에게 쉽게 눈에 띠었고, 또 빠르게 도망치지도 못해서 손쉬운 먹이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랑거리가 오히려 망하게 만듭니다. 이 이생의 자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 이생의 자랑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 받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후 11장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자랑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고후 11:17-18을 보면 바울이 자기도 자랑거리가 있어서 자랑해 보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자랑거리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어리석음입니다. 16절을 보면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볼 때 자기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일 텐데, 이것을 감추지 않고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은 고난입니다. 23절 이하를 보면 자기가 당한 고난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 맞고, 항해하며 배가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고, 강도를 만나고, 동족들과 이방인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굶주리고, 그리고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눌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감추고 싶은 일이지만 자랑삼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셋은 약함입니다. 3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자기가 정말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것들을 자랑거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여 이생의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볼 때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일들인데 왜 이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는 어리석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혜를 주셔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많고 큰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견딜 수 있는 인내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그것들을 다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그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의 자랑입니다. 자기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비록 자기가 어리석고, 큰 고난을 많이 당했고, 약한 사람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소망을 소중히 여기고 자랑하며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안에 거하시는 것을 참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이렇게 소망의 자랑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참 좋은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좋은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주신 소망을 확신하고 또 그 소망을 자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