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히브리서 13:20-21 >
찬송가 570장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이 찬송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는 찬양입니다. 시편 23편을 근거로 해서 지어진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은 장수철(張壽哲, 1917-1966)과 최봉춘(崔逢春, 1917-1998)이라는 부부입니다.
이 찬송의 작사자인 아내 최봉춘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교회의 주사로 사역하다가 1938년 21세에 남편 장수철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남편 장수철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 작곡을 공부하다 학비가 부족해 귀국하였고, 정신여자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됩니다. 전쟁이 터진 지 불과 3일만에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서울을 떠나 남족으로 도망가던 국군은 당시 서울과 강남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대교를 폭파해버립니다. 그 때 수많은 시민들이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채 서울에 고립되어야 했습니다. 그들 중에 장수철 최봉춘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최봉춘은 전혀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의 미래는 결국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편 23편을 되뇌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때 멀리서 배 한 척이 나타났고, 최봉춘은 남편 장수철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장수철은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중, 1956년 어느 날 아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다가 그는 그만 목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12살이던 큰 딸 혜경이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겹게 병마와 사투를 별였을 딸을 생각하니, 함께 해 주지 못한 못난 아비라는 죄책감에 그는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아내의 따뜻한 위로의 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이런 시와 함께 편지의 맨 마지막에는 시편 23편의 마지막 부분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니리.” 아내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기 위해 고통의 순간마저도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아내의 시에 멜로디를 입혔습니다. 그게 바로 찬송가 570장입니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57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탄일종이 땡땡땡’ 등 많은 동요와 찬송가를 작곡하여 보급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향한 사랑이 커서 전쟁 중 고아가 된 32명의 아이들을 선발해 합창단을 조직했는데, 그게 바로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입니다. 그는 비록 49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가 만든 찬송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여러분,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아십니까? 찬송가 570장을 지은 장수철-최봉춘 부부의 고백에 의하면, 6.25전쟁을 겪으면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비록 배가 와서 자신들의 생명을 건져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지리도 힘든 형편 속에서 하나님께서 쓰실 일꾼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을 불과 12살의 그 어린 나이에 잃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노래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이 부부가 부른 노래를 이어 생각해 보십시다. 2절 가사입니다.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에 사랑하는 나의 목자 음성이 나를 언제나 불러주신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어떻게 새들이 예쁠 수 있으며, 그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운 노래로 들릴 수 있겠습니까? 저녁 노을이 지면 사랑하는 딸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질텐데 그 노을 비치는 모습이 고운 황혼이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못된 짐승과 거친 비바람 가운데서도 나를 상하지 못하도록 강한 손으로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나는 그분의 귀한 양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를 양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주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0:11) 그리고 ‘양의 문’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10:7) 그 말은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의 양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양이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우리는 양이라고 하면, 목자의 품에 안겨 있는 평온한 모습을 상상합니다. 아무 걱정 없이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평화로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우리가 목자의 품에 안겨 있거나 목자의 뒤를 따를 때에만 가능한 평화입니다. 그러면 목자의 품을 떠나 있는 양은 어떤 모습일까요?
양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양은 너무나도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지 않으면 자기가 가고 싶은대로 갑니다. 그 길이 낭떠러지인지, 아니면 가시밭길인지도 모른 채 그냥 갑니다. 그 길이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특별히 양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향 감각도 없습니다. 그저 앞에 뭔가가 보이면 그게 자신을 인도하는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가기도 합니다. 이사야 53: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은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그 길이 잘못된 길인지도 알지 못한 채 간다는 것입니다.
양의 두 번째 특징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지난 2007년 우리 교우들과 성지순례를 갔을 때에 일입니다. 우리 일행이 차를 타고 가다가 길 옆 풀밭에 양떼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일행이 창문밖으로 서로 보려고 고개를 내밀고, 심지어 감탄사를 연발하자, 가이드가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양떼를 보게 했습니다. 성경에 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특별히 우리를 양이라고 비유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니까 아주 친근해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양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지저분했습니다. 우리는 양털이 곱고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온 몸에는 똥덩이를 비롯한 온갖 오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야생에서 키우는 양은 들판에서 잠을 잡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이스라엘 지역은 대부분 양들을 광야에서 키웁니다. 건조한 기후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곳에서 삽니다. 자신이 싸놓은 오물 위에서 그대로 잠을 자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양들은 스스로 그 오물을 떨쳐내거나 씻어낼 능력이 없어 지저분한 채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털이 자라면서 온갖 오물이 털에 묻어도 스스로 털을 깎아내지 못합니다. 양은 매년 한 번씩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털에 눌려 움직일 수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털에 벌레들이 번식해서 병에 걸려 죽기도 합니다.
양의 세 번째 특징은 자기 스스로 자기 목숨을 지킬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닭들도 자기들이 위기에 처하면 깃털을 세우고 달려들어 상대에게 위협을 줍니다. 대부분의 동물이나 짐승들이 생명에 위기를 느끼면 방어하거나 방어할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든 빨리 도망쳐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적이나 맹수가 공격해 올 때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나운 맹수들의 주 타깃이 됩니다. 특별히 혼자 있으면 그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이 주업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양치기였고, 다윗 왕도 목동이었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그들은 양들의 특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자신들은 양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뛰어난 영성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어리석고 추하고 무능한 양의 모습이 꼭 자신의 모습과 같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양입니다. 그리고 양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목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그냥 세상에 방치하면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지옥의 자녀가 될 것이 너무나도 뻔하기에,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에도, 더럽고 추함에도, 그리고 우리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평강과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좀 억울하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양처럼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구요. 나는 그래도 양처럼 더럽거나 추하진 않다구요. 나는 양처럼 결코 무능하게 살진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우리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모른 채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후회하곤 합니다. 때로는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하는데,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분명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헛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할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까지도 선하게 역사해 주셔서 그나마 실수를 줄이고 체면을 세우며 살 수 있었지, 우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셨다면 우리는 얼굴조차 들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라고 연구하여 깨달은 후에 예수 믿고 생명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결코 깨달아 알 수 없는 생명의 길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덕분에 생명의 길을 가고 있고, 큰 목자이신 예수님 덕분에 오늘도 하늘의 지혜를 덧입어 살 수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이며 분별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를 깨닫고 그 뜻을 이루며 사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를 하늘의 지혜를 갖고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양들처럼 더럽고 추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다 죄로 인해 사망의 길을 가던 사람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만이 아니라 우리는 수시로 죄와 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 여러분, 우리 중에 입으로는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단 한 번도 욕하거나 저주해본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욕하거나 저주했다면 그것은 지옥불에 들어갈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는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 이 말씀 앞에 떳떳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비단 남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음침한 생각이 늘 꽈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우리는 매일 매순간 수도 없이 세상의 것에 마음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영적 간음이라고 말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나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에서는 유대교의 제사로는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받지 못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들은 무능합니다. 우리 또한 참 무능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과학적 기술을 발달시켜 오늘의 문명과 영화를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무능합니다. 그 무능을 입증할 단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인간이 지혜를 발휘하고 연구하고 노력하여 수명은 좀 연장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이라는 사람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습니다. 그가 다이너마이트 개발에 힘쓴 이유는 화학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나 자신의 막내 동생을 비롯한 5명이 희생되는 사건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에 사용하던 액체의 위험요소를 발견하고 보다 안전하게 공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 폭약을 만들길 원했고, 그렇게 해서 다이너마이트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의 기대와 달리 다이너마이트는 전쟁에 사용되면서 수천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결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한치의 앞도 내다볼 줄 모릅니다. 무엇이 인류에게 유익이 되는지, 무엇이 해악이 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현대 과학이 우리 인류에게 엄청난 편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점점 그 과학 문명의 시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간이 발전시켜놓은 그 과학 때문에 인류는 어마어마한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 치 앞도 못 보는 무능한 인간이 스스로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만든다는 것이 결국 우리를 해치는 도구가 될 뿐인 인간의 머리로 영생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양과 같이 무능한 우리 인간, 스스로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면서도 잘난 체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목자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모두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는(베드로전서 5:8)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과 고통의 쓰라린 삶을 살다가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능한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고 추하고 무능한 양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목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가장 완벽한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큰 목자’라는 말은 우리를 위해 완벽한 목자라는 뜻입니다. 더없이 좋으신 목자, 양떼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큰 목자가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리석고 추하고 무능한 양과 같은 우리의 큰 목자가 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주님을 큰 목자로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양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양입니다. 우리는 추하고 더러운 양입니다. 우리는 무능한 양입니다. 양인 우리는 눈이 어두워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거짓을 따라가곤 합니다. 양인 우리는 귀가 얇아서 속이는 자 마귀에 속삭임에 금새 넘어가고 맙니다. 양인 우리는 머리가 아둔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진리의 길-생명의 길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양인 우리는 가슴에 거짓된 허영으로 가득 차서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허망함을 위해 몸부림치다 지쳐버립니다. 양인 우리는 다리가 허약하여 의를 위해 달려가지 못하면서도, 잘못된 습관과 악이 끄는 길에는 힘을 내 달려가곤 합니다. 양인 우리는 스스로 내 목숨을 지켜내는데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바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양임을 알기에 우리에게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실 목자,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실 목자, 우리를 보호해 주실 목자, 우리를 치료하고 깨끗하게 해 주실 목자 말입니다. 그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사야에서 그 목자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이사야 40:11)
여러분, 우리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나는 무척이나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길에 나를 인도해주실 목자가 필요합니다. 나는 무척이나 더럽고 추악합니다. 그래서 나를 깨끗이 씻어주실 목자가 필요합니다. 나는 무척이나 무능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실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목자, 큰 목자이신 주님 품에 안겨 또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어리석은 나를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신 큰 목자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더럽고 추한 나의 죄를 씻어주신 큰 목자이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무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힘을 주신 큰 목자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 믿음의 고백으로 평생을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