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 기쁨이 있습니까?
< 본문 – 요한복음 2:13-22 >
시편 122편에 이런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편 122:1)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살아있던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성전 짓는 것을 보류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짓도록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122편에서 ‘여호와의 집’이라는 말은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성소’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와서 자신이 살고 있는 다윗성에 모셨습니다. 그곳이 성소입니다. 비록 멀리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성소에 올라가자고 할 때에 다윗은 너무너무 기쁘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뵈올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예배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너무너무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배드리러 성소에 가십시다.’ 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소에 가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 그 말만 들어도 너무 기뻤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모신 성소가 크고 화려하게 잘 꾸며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성소에 간다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이런 설렘과 감격이 있습니까? 오늘 예배당에 나오실 때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그리고 주님이 계선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 기쁨이고 설렘이고 감격이었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주께 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여러분, 이 찬송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입니까?
그런 기쁨과 감격 없이 성전을 찾았던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시대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는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오늘 본문이 기록된 정황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 하신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의 공생애 맨 앞에 일어난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와 말기에 각각 한 번씩,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하신 것만 기록했는데, 요한복음에서만은 공생애 초기의 것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위치한 상황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행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첫 번째 행하신 기적과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또 장소도 너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갈릴리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은 유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신 후에 유월절을 맞아 유대 예루살렘으로 바로 오셨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시간 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나는 이 두 사건을 요한복음에서는 왜 서로 연결시켜 놓은 것일까요? 거기엔 분명한 의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가 참석한 혼인잔치에 제자들과 함께 초청을 받아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결혼식 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지역에서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료였을 뿐만 아니라, 잔치에서 포도주는 아주 중요한 음식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지 않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집안에 어떤 잔치가 벌어지면 큰 독에다가 막걸리를 가득 채워놓습니다. 막걸리가 없으면 잔치 기분이 나지 않기 때문에 막걸리가 떨어지려고 하면 집에서 약 1km쯤 떨어져 있는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를 주문하고 온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잔치집에서 막걸리는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잔치집에 포도주는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포도주가 떨어져 바닥이 났다는 것은 잔치집의 입장에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혼인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포도주가 필수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포도주가 바닥이 나 기쁨의 잔치여야 할 혼인잔치에서 기쁨이 사라지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시고는 그것을 모두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물 한 통은 약 40리터입니다. 그러니까 ‘두세 통이 들어가는 항아리’라고 하면 약 100리터의 물이 들어가는 제법 큰 항아리이고, 그 항아리가 여섯 개나 있었다는 것은 약 600리터의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이면 결혼식 잔치가 끝날 때까지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 집에서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기쁨을 회복시켜주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풍족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인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은 어떻까요?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만큼 기쁨이 있었을까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것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그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성전으로 대표되는 율법과 절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기쁨이었다면 그들의 삶에도 기쁨이 가득했을 것이고,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기쁘지 않았다면 그들은 삶에서도 별로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성전은 기쁨의 장소였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암울한 상황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가장 먼저 누가 눈에 들어왔습니까? 먼 길을 달려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예배자입니까?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축복하기 하기 위해서 그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는 제사장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그리고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보시고’라는 말씀은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신 것이 아니라 우연히, 보려고 해서 보신 것이 아니라 그냥 눈에 들어와서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장사하는 사람과 돈 바꿔주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들로 인하여 성전 뜰은 북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깨비시장과도 같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월절이면 이스라엘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지역에 사는 유대인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엄청난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합니다.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려 할 때는 반드시 율법에 따라서 정결하고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것을 받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흠이 없고 정결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만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판별하는 일은 제사장이 한다는 데 있습니다. 제사장이 성직자로서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제물을 판별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성전 뜰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백성들이 자신이 기르고 있는 양이나 소 또는 비둘기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흠이 없고 정결한 것으로 준비를 해온다 하더라도 먼길을 오면서 그 짐승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대로 관리가 안 돼서 상처가 난다면 그건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자신은 정성을 다해 힘들게 가져왔는데,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제물이 되어버리면 백성들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백성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성전 뜰에 정결한 짐승을 파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굳이 멀리서 가져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성전 뜰에서 정결한 제물을 구해 성전에 드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취지로 시작한 제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드릴 만한 제물인지를 제사장이 판별하면서 백성들이 자기 집에서 가져온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불합격 판정을 내립니다. 성전에서 파는 것을 사라고 말입니다. 성전에서 파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제사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그 제물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에 가져오기보다는 성전 뜰에서 판매하는 제물을 사서 바칩니다.
문제는 그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판다는 것입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16배나 비싸게 판매했습니다. 어떤 것은 무려 80배나 비싸게 판매하는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결한 짐승이라는 이유로, 제사장이 합격 판정을 내린다는 이유로 그렇게 너무 비싸게 판매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제사장과 결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판매자들로부터 엄청난 뒷돈을 받아 챙긴 것입니다. 뒷돈을 챙기고 그런 불법과 무법천지가 만들어진 것을 방관한 것입니다. 아니 그런 모습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자신은 집에서 정성을 들여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라고 생각하고 키워서 성전에 가져왔는데,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이라고 퇴짜를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 성전에서 파는 짐승이라도 사서 하나님께 드리자 생각하고는 성전에서 파는 짐승을 사는데 너무나도 비삽니다.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라도 사서 하나님께 드리긴 하겠지만, 그들의 마음이 편할까요? 자신이 정성들여 키워서 가져온 짐승이 퇴짜를 맞았을 때, 그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가격이 붙여진 짐승을 사서 드려야 할 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기쁨이 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지만 성전에 도착한 순간 그런 기쁨과 설렘은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들려야 할 성전이 백성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러분,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칫집과 성전을 비교해 생각해 보십시다. 갈릴리는 당시에 버려진 땅처럼 여겨졌습니다. 유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갈릴리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가나라고 하는 동네는 나사렛에 비하면 제법 큰 마을이었겠지만, 그래도 갈릴리의 작은 동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위기를 맞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갈릴리 가나와 너무나도 다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최대 도시입니다. 특별히 유월절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왕과 권력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갈릴리 가나와 감히 비교도 할 수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앞선 도시입니다. 화려한 도시요,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타락한 도시입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성전 안에서조차 탐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다 내 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엎어버리실 정도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하실 정도로 탐욕이 지배하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찬양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성전에서 값을 흥정하는 소리만이 난무합니다. 간절한 기도 소리가 가득해야 할 성전에서 환전하는 사람들의 경쟁하는 소리가 정신없게 만듭니다. 그러니 그 성전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 성전에 거룩함과 경건한 모습인들 있겠습니까? 그런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격이 있겠습니까? 제물을 사긴 샀는데 바가지를 잔뜩 쓴 사람의 마음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인들 있겠습니까? 그런 짐승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회개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너무나도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19절)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고 화가 치밀어 오르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런 곳이라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린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찾아왔다는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다는 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란 기대도 없습니다. 그저 습관을 따라, 억울하지만 관습이 그러니 제물을 사서 드릴 뿐입니다. 아무런 신앙적 감동이나 헌신이나 뜨거움도 없이 말입니다. 그게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칫집과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주는 이유는 성전이 갈릴리의 혼인 잔칫집처럼 기쁨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과 감격이 있는 예배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 이후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감격은 우리를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경험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란 주님의 말씀도 잊어버린 채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제 그들이 두려움을 온전히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건 오순절 성령 강림 때입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두려워 걸어잠가놓았던 문들을 열고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를 해도, 심지어 복음을 전하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가해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기쁘게 살길 원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기쁨이 가득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행하신 이적이 혼인 잔칫집에 기쁨을 회복시켜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도 그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기쁨의 예배입니까?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림이 기쁨입니까? 혹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깨끗하고 경건해야 할 우리의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진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 결코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하늘의 기쁨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탐욕의 상징인 양과 소를 다 내쫓으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탐욕도 다 내쫓아야 합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다 쏟으시고 상을 엎어버리셨듯이,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것들을 다 쏟아내고 엎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세상의 욕망을 다 비워내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런 우리의 마음에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평안과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올 한 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그리고 모든 예배의 자리에서 그 기쁨을 풍성히 누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