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운 해여, 떠오르소서!

< 본문 말라기 4:1-3 >

 

오늘 설 명절을 맞아 우리 모든 교우님들의 가정과 앞으로의 삶에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보호하심이 늘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19세기 파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가 쓴 『고셰 신부의 블로장생주』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오래전부터 가난과 검소한 삶을 미덕으로 삼던 가난한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의 뽀족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이 깨어져 나갔지만 그것을 수리한 돈이 없었습니다. 깨진 종을 다시 살 형편이 안 되어 신부들은 나무 딱따기를 쳐서 기도 시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 수도원에 고셰라는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부가 아니고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셰 수사가 어느 날 가난에 찌든 수도원의 재정상태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선 수도원 원장의 허가를 받아 젓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 전문가였기에,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하며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불로장생주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 다음 날부터 고셰 수사가 빚은 불로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가난이 찌들었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점차 부유해졌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건물을 웅장하게 고쳤고, 뾰족탑은 다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신부나 수사들이 입는 옷도 비싸고 화려하게 바뀌었고, 먹는 음식도 달라졌습니다. 그 모든 게 고셰 수사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적을 인정받은 고셰 수사는 신부 서품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들이 모여 경건하게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고셰 수사였습니다. 고셰 수사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매일 술을 시음해 보다가 그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신부들은 고셰 수사를 밖으로 끌어냈고, 다시는 성당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양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며 거기에 예배하고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수사는 수도원 원장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는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하면서 양조장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수도원 원장이 양조장을 찾아왔을 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 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이제 수도원의 재정이 좋아졌으니 예전처럼 젖소를 돌보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일을 계속하다간 자신의 영혼이 나락에 떨어질 것만 같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은 그의 간청을 거절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불로장생주를 만들라.’고 격려해 줍니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면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고셰 수사가 포도주를 만드는 사이 수도원의 신부나 수사들은 포도주 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 그것을 운반하느라 미사를 거르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양조장의 낡은 건물 안에서는 술에 취한 고셰 수사의 슬픈 노래와 고함소리가 계속 들여옵니다.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그렇게 양조장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이 쓰여진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수도원은 로마 교황청의 비호 아래 아주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이 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은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 제조되어 판매되는 와인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수도원은 부유함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이 소설은 경건을 추구하고 가장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할 수도원마저도 돈의 권력에 물들어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로장생주를 팔아 부유해지자, 프로몽트르 수도원 사람들은 부유함에 취해버렸습니다. 고셰 수사가 양조장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몸과 영혼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사이, 수도원 안에서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수도자들이 부유함에 취해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하고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부유함의 맛에 취하기 시작하면 그 유혹을 끊어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롭게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지금 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고 다짐하며 고백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내가 살아서 내 자아와 욕망에 끌려 사는 세속인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면 우리 역시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는 고백과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입니다. 연대기적으로도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말라기이고, 맨 마지막에 기록된 책도 이 말라기서입니다.

  이 말라기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남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처럼 주전 538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고레스가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잡혀 왔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516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제2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면서 영광스러운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약 60년 후인 주전 458년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지면서, 예배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되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불과 14년 뒤 마지막 제3차 포로귀환 때에는 느헤미야가 유다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합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면에서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보장되었지만, 완전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백성들은 각종 세금에 시달려야 했고, 가뭄과 병충해 등 농작물은 불황을 거듭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벽이 다시 쌓아지면서 영광스런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들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지고 힘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백성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의구심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불신에 빠지면서 신앙적인 열정도 사라졌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긴 드리지만, 성의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마저도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다.(말라기 1:6) 백성들은 병들고 가장 가치 없는 것을 제물이랍시고 바쳤습니다.(말라기 1:8) 그들의 신앙이 엉망이 되자, 그들의 가정도 흔들렸습니다. 율법에서 엄격하게 금했고 에스라 선지자를 통해서 호되게 책망받았던 이방인과의 결혼이 다시 성행하게 되었습니다.(말라기 2:11) 아내를 학대하는 일이나 이혼하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말았습니다.(말라기 2:16) 그렇게 사회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져 버렸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끌려 사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으로 한다면 막가파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말씀으로 영적 부흥이 일어난 지 불과 100여 년도 채 지나지 않을 때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심판하시겠다고 말입니다. 말라기 3: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점을 칩니다. 성결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간음을 일삼습니다. 진실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품꾼을 삯을 떼먹음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힘없는 과부와 고아의 것을 빼앗습니다. 낯선이라고 나그네에게 함부로 대하여 나그네를 억울하게 만듭니다. 그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라기 3:16절에 그들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 말하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그 때에라는 말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에 끌려 살아가고 있을 때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고셰 신부의 이야기에 나오는 고셰 수사처럼 말입니다. 경건해야 할 수도원이 돈에 맛에 취해 정신을 잃어버렸을 때 그나마 고셰 수사만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져 감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던 옛생활로 돌아가려 했던 것처럼, 영적으로 부패해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경외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의 욕망을 따르고 있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분별하실 것입니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옵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이 그걸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입니다. 바짝 마른 지푸라기에 불이 붙으면 곧 불에 타 재로 변하고 맙니다. 그것처럼 용광로의 불과 같은 심판의 날에 지푸라기와 같은 악인들은 심판을 받아 사라질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여러분, 공의로운 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두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새날이 밝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용광로의 불 같은 날로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와 같이 다 불살라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던 사람들이 모두 불에 사라지는 지푸라기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날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오름으로 인해 맞이하게 될 새로운 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심판의 날이 악인들에게는 형벌의 날이겠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우리들에게는 희망의 날입니다. 악인들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힘이 없어 수없이 빼앗겼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날입니다. 더 이상 그런 고통도, 억울함도, 가슴 아픈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심판하시는 날은 아니겠지만 올해 우리에게도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날 고통당하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고, 억울한 일을 당하던 우리의 삶에서 더 이상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공의롭고 공평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하늘의 보상이 가득해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공의로운 해라는 말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누가복음 1:78-79절에서 사가랴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의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돋는 해이십니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밝은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악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우리의 구주가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에게 은혜의 날입니다. 의로운 해와 같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날 우리에게 치료의 광선이 비칠 것입니다. ‘치료의 광선이라는 말은 래이저와 같은 광선이 비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광선이라는 말은 날개를 뜻합니다. ‘치료하는 광선이라는 말은 치료하는 날개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날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날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32:1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고 보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건져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광야의 험난한 길을 오는 40년 동안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보호하고, 때로는 날개 위에 업어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룻기 2:12절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방 여인 룻이 시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온 것을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온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려 하는 룻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상을 주시길 원한다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시편 36: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들어간다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자하심(헤세드)은 주님의 특별하신 사랑입니다. 보호하시는 사랑입니다. 한이 없는 사랑입니다. ‘해가 떠올라서 비추는 날개라는 표현은 마치 태양을 바라볼 때 태양 주위에 너풀거리듯 이글거리는 태양의 빛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 태양의 빛이 온 세상에 비추고 온 세상을 감싸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온 세상을 덮을 만큼 크고 강렬합니다. 우리가 그 날래 아래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사랑으로 우리를 온전히 감싸줍니다.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품에 안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 보호는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보전해 주시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회복시켜주십니다.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막힌 담을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뛰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2023년 올 한 해,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꼭 붙들고 사십시다. 세상이 아무리 교만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세상에 아무리 악의 물결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굳게 버티고 서 있으십시다. 그 신앙의 자리에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고 놀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해가 되어 주십니다. 치료하는 날개 아래 보호해 주셔서 우리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뛰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질병과 고통이 사라지고,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어둠도 사라지고, 우리를 위협하는 거짓과 불의를 견디어내는 승리의 감격을 우리에게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3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악인의 세력을 이기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악인들이 우리의 발바닥 아래에서 재와 같은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올해가 우리에게 그런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