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그것은 선물입니다.
< 본문 – 전도서 3:13 >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옛날, 아버지와 아들이 말을 타고 숲 속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몇십 마일을 간 다음에 드디어 부자는 반갑게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워 부둥켜안고 기뻐하고 있을 때, 아들이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참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요.” 아들의 뜻밖의 말에, 궁금해진 아버지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제가 지금 아버지를 찾으러 오는 도중에 나무 뿌리에 걸려 말이 세 번이나 쓰러졌어요. 말 위에서 아래로 나뒹굴었는데, 저는 한 군데도 다친 데가 없어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자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참 감사할 일이구나. 그런데 나도 하나 감사하자꾸나. 내가 너를 찾아오는 도중에 내 말은 한 번도 나무 뿌리에 걸려서 쓰러진 적이 없으니 얼마나 감사하냐?.”
참 아름다운 대화입니다. 흔히 오늘 우리 시대를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에 감사하지 않을 부분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 눈을 떠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간밤이 지내야 했고, 안타깝게도 오늘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가 숨을 쉬며 살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언제 숨이 멈출지 몰라 불안해 하며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중환자실에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발로 예배당에 찾아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지 못해 이 귀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주님의 전을 사모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입원해 있는 사람들과 거동이 불편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마음껏 찬송하고 싶지만 입을 열어 찬송할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이 아름다운 예배당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내 귀로 찬송소리를 들으며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처럼, 건강할 때에는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본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56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암이 발견된 이후 그는 암을 치료하자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대체의학을 고집하다가,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늦게서야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가 수술대에 오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반드시 읽어야만 할 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지 않은 책이 한 권 있었는데, 그것은 <건강한 삶>이라는 제목의 책이다.”라고 말입니다. 평소 건강에 신경 쓰지 않다가 건강을 잃은 후에야 ‘왜 내가 건강에 대해서 무관심했나?’라고 후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보면 그 많은 재산도 의미 없습니다. 건강만이 아닙니다. 목마르지 않을 때에는 한 모금의 물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모릅니다. 그러나 갈증으로 인해 죽을 것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은 세상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지금 당장 내 목마름을 해갈해 줄 물 한 모금이 더 중요합니다. 그걸 생각하면 언제든지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을 때에는 작은 떡 한 조각이나 떫은 과일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잊고 삽니다. 그러나 허기져 더 이상 걸음을 걸을 수 없어 곧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을 때에는 그 작은 음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압니다. 그걸 경험해 본 사람은 오늘 내가 무언가를 아무 걱정없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처럼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라는 찬양처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침 해가 뜨고 저녁에 노을 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봄의 꽃향기를 맡고 가을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사시사철 변하는 계절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 같지만, 그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하는 가장 평범한 일상입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먹는 식탁이 아닐지라도, 최고급 포도주나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오늘 우리의 가정에서 평범한 밥상을 차려놓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병으로 인해 음식을 조절해야 하는 사람도 그렇거니와 여전히 삶이 넉넉하지 못해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저 멀리 어느 가난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 경제대국 가운데 하나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 끼니를 때울 수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가족들과 친밀하게 식탁을 나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하루의 일상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편 128:2-3) 우리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한 후에 그날의 소득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둘러앉아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복되고 형통한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과 다른 기쁜 일이 일어야 복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삶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누구나 살아가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뭔가가 있어야 복되고 형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우리의 욕심에서 나온 마음일 뿐입니다. 특별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일상,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지루한 듯한 일상일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은혜요, 그게 복되고 형통한 삶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수고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시인의 고백에 나오는 ‘내 손이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오늘 일할 수 있다는 것, 내 가족들을 위해서 뭔가 수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낙을 누리고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낙을 누린다’는 것은 어떤 큰 기쁨을 얻어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낙’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언어로 토브(טוֹב)입니다. 토브라는 말은 ‘좋다, 선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으신 것을 보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좋았더라’라는 말이 토브입니다. 토브는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내가 내 가족을 위해서 수고하여 식탁에 둘러앉아 변변찮은 음식이지만 즐겁게 나눠 먹으면서 ‘내 가족이 있어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식사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참 좋다!’라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카페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면서 ‘분위기 참 좋다, 경치가 참 좋다, 이런 여유가 참 좋다’라고 느낀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어딘가 나들이 가서 새로운 풍광을 보면서 ‘참 좋다’라고 느낀다거나,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참 좋다’라고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포근한 이불을 덮을 때 ‘참 좋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때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는구나!’라고 기대감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작고 소소하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선물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고 감사한 이유는 그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그런 소소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뉴스거리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와서 많은 사람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 잡혀가 죽임당하거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은 모든 일상이 깨어졌습니다. 평소 소소하게 누렸던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마스가 정권을 잡고 있는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무장정파의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에서 수많은 포탄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어 언제 포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피난을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놀던 아이들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전쟁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 채 두려움 가운데 숨죽이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거나 헤어져야 하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공포 속에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일상의 평범함은 꿈만 같은 일입니다. 그들에게 평범하게 살았던 지난 일상으로의 회복이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겠습니까? 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큰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공하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평범한 일상은 너무나도 간절한 바람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평범한 일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당연히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주에 예배드린 것처럼 오늘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다. 오늘 예배드림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지난주에 만났던 성도들을 이번 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기에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만남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일터에서 만난 직장 동료를 오늘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가 사고를 당했다면, 누군가가 일터에서 잘렸다면, 누군가가 병이 들었다면 오늘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만난 것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싸우고 시기하고 경쟁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크나큰 축복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교회교의학』을 비롯한 수많은 책을 저술하여 현대신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1962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교수로서 은퇴한 후, 미국 시카고 대학교에서 강연을 할 때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바르트 박사님,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당신이 배운 가장 심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최고의 신학자 바르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Jesus Loves me this I know”(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이 말은 우리 찬송가 563장의 가사 첫 줄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모든 신학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말입니다.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지금도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사랑에 의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주 평범한 삶이라 하더라도,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아니 남들만큼조차 평범하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것 다 잊는다 하더라도 오직 그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아도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그의 삶은 세상적으로 볼 때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라 곤두박질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사도 바울은 성공을 위해서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사도 바울은 고난과 박해와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건강한 것도 아니었고, 남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그 이름에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고, 배척받고 미움받는 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8)고 권면할 정도로 그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그가 큰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닙니다. 그는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풍부하고 넉넉한 삶을 산 것도 아닙니다. 때론 궁핍하고 때론 비천한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인이 누리를 감격이고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늘 만나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가족들과 함께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평범한 오늘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혜자가 자신의 삶 전부를 통해서 배운 인생의 지혜이고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은 특출난 삶이 아니라 평범한 오늘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가득 담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