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시즌 2(눅15:11~24)
흔히 기독교를 가리켜 ‘변화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변화는 좋은 것입니다.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입니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마치 발효와 부패의 차이입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발효되면 맛이 좋고 향기도 좋아집니다. 예를 들면 김치나 치즈 같은 경우입니다. 반면 부패하면 냄새도 고약하고 독소가 생깁니다. 그래서 부패한 음식을 먹으면 금세 탈이 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효와 같이 좋은 변화가 생기면 좋은 사람이 되고, 부패와 같이 나쁜 변화가 생기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개인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자꾸 어지러워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의 본성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부패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떻게 해야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결심으로? 지식으로? 교육으로? 징벌로? 그런 것들로 잠시 변하는 것 같지만 표면적인 변화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앙생활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체험하면 인간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변화를 체험합니다. 그 변화가 그 인생을 행복하게 했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을 얼마나 놀랍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본문만 보면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온 장면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읽을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서 어떻게 변화됐는지 기록해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하자면 ‘돌아온 탕자 시즌 2’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성경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고, 굳이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아도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탕자의 변화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그가 어떻게 변화됐을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돌아온 탕자의 변화된 모습처럼 우리도 변화된 삶을 꼭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이고, 더 나아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길인 줄 압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돌아온 탕자 : 자녀의 신분 회복
그러면 먼저 탕자가 돌아온 이야기부터 살펴봅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불량자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졸라서 유산을 가불합니다. 어이가 없죠. 그는 며칠이 안 돼서 좀이 쑤셨는지 재산을 챙겨서 멀리 떠납니다. 아마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그 품 안에 살아야 마땅함에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 딴에는 잘 살 줄 알았죠. 하지만 쫄딱 망하고 맙니다. 그는 허랑방탕한 가운데 재산을 탕진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닥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다 하다 돼지 치는 일까지 하게 되는데 그마저 신통치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얻어먹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가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그리운지! “아버지 집에서는 풍족히 살 수 있는데 내가 미쳤지 ... ” 후회막심했습니다. 만약 단순한 후회로 끝났다면 탕자의 인생을 정말 비참해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고자 결단합니다. 그리고 실행합니다.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회심이라고도 하는데 헬라어로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입니다. 이 단어는 방향전환(conversion)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탕자가 그동안 온갖 잘못을 다 저질렀지만 회개한 것 하나만큼은 정말 잘했습니다. 눅15:20(상)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 그는 드디어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떠난 지 오래됐음에도 아버지가 동구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멀리 지평선에 나타난 아들의 모습을 대번에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그 장면을 그려 보십시오. 눅15:20(하) “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기대밖에 크신 아버지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에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나는 이제 아들이 아닙니다. 품꾼으로나 써 주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온 것 한 가지만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그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 보십시오.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Quick! Bring the best robe-NIV)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온몸을 씻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손에 가락지 끼워 줍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 줍니다. 이 모든 게 아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고대에는 종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이제 신발을 신긴다는 것은 아들의 신분 회복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영어성경을 보면 ‘quick’이란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면서 아들을 속히 회복시켜 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버지의 퀵 서비스’입니다.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할 정도입니다. 아니, 그 아들이 잘한 게 뭐가 있다고 저러나 싶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돌아온 것 한가지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받아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었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한 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NIV)를 주셨으니” 자녀의 권세는 특권으로 곧 자녀의 신분입니다.
사실은 아들이 신분 회복을 했으니 본인이 기쁜 것인데 가만히 보면 아버지가 더 기뻐하십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라고 하며 좋아합니다. 사실 아버지를 배반하고 떠난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직 닥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체가 이미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새 생명이 된 겁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는 이제 어엿한 아들이 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단지 회개하고 믿기만 했는데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도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셔서 자녀 삼으신 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2] 돌아온 탕자 시즌 2 : 자녀의 신분에 합당한 삶 – 감사, 성결, 충성의 삶
그러니까 돌아온 후의 모습인 ‘돌아온 탕자 시즌 2’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뭘까요? 자녀의 신분을 회복한 후 그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회개에 합당한 삶이요 구원받은 성도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살았을까? 이제 다시는 아버지 집에서 나가지 않습니다. 아마 등을 떼밀어도 나가지 않을 겁니다. 미쳤나요? 아버지를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뼈저리게 경험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됐을까요? 아버지의 사랑을 절절히 체험했기에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겁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바로 그와 같은 겁니다. 그 모습을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감사, 성결, 그리고 충성의 삶입니다.
① 감사의 삶 :
돌아온 탕자는 감사하며 살았을 겁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온 후에는 모든 게 감사 제목입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뭐가 불만족스럽겠습니까! 모든 게 기쁘고 마냥 감사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자가 새 생명으로 거듭났으니 모든 게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회복기 환자의 감사와 같은 겁니다. 중병에 걸려 의사에게 사망 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극적으로 치유되어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에겐 모든 게 기쁘고 감사 제목입니다. 밥 한 숟갈 떠먹을 수 있는 게 감사하고, 길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는 것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보행이 아직 불편해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괜찮고 그것조차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살아났기에 넘어지는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문자 그대로 범사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 모든 것 주심 감사 / ... // 향기론 봄철에 감사 / 외론 가을 날 감사 / ... // 응답하신 기도 감사 / 거절하신 것 감사 / ... // 아픔과 기쁨도 감사 / ... // 길가에 장미꽃 감사 / 장미꽃 가시 감사 / ... / 기쁨과 슬픔도 감사 / 하늘 평안을 감사 / 내일의 희망을 감사 / 영원토록 감사해//”
아무쪼록 아버지의 사랑으로 구원받고 그 은혜로 살고 있으니 범사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성결의 삶 :
돌아온 탕자는 성결하게 살아갑니다. 과거에는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했습니다. “저 뉘 집 자식이야? 아나, 왜 저 꼴이지? 그 아버지는 얼마나 속상할까 ... ? 그 어머니는 저런 자식 낳고 뭐가 좋다고 미역국을 먹었을까 ... ?” 그런데 돌아온 탕자는 이제 아버지가 입혀준 새 옷을 입고 행동거지가 달라집니다. 훌륭한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이제는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해졌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어? 자식은 역시 아버지를 닮게 마련이네.”
구원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롬13:12~14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한 마디로 새 옷을 입었으니 그 옷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다가 회개하고 변화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후 방탕했던 과거의 모습을 청산하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과거 방탕하던 시절 사귀던 여자가 지나갑니다. 못 본 척 지나가는데 그 여자가 말합니다. “아니, 어거스틴 아냐? 오랜 만이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옛날 어거스틴은 죽었소. 나는 새 어거스틴이오! 그 여자는 머쓱해져서 지나갔다고 ...
아무쪼록 아버지의 사랑으로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닮은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충성의 삶 :
돌아온 탕자는 충성하며 살아갑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보니까 이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까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아버지 일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 일이 자기 일이 됐습니다. 알아서 지원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열심히 합니다. 충성을 다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사랑으로 구원받았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 보답할까 궁리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시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사도 바울은 과거 핍박자였던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게다가 사도의 직분까지 무슨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까 주의 일에 충성할 수밖에 없음을 간증했습니다. 고전15:10 “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수년 전 제주도의 한 선교관에서 인도네시아 목회자 대상으로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선교관을 설립한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격려 차 방문했습니다. 식사 시간에 그 장로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그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예수님을 믿게 됐다고 합니다. 하루는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동료 병사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겁니다. 뭐냐고 했더니 “기천불! 기천불!”이라고 합니다. 종교 활동 시간이니 빨리 줄을 서라는 겁니다. 기독교 줄, 천주교 줄, 엉겁결에 제일 길 줄에 서서 따라갔더니 교회였습니다. 첫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게 됐는데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감사하며 교회 일까지 하게 됐습니다. 제대 후에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충성하다가 장로가 된 겁니다. 그는 중장비 기술자로 열심히 살았고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이민 기회가 생겨서 집을 팔고 출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담임목사가 교체됐습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과 통성명을 하다가 같은 학교 5년 선배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목사님은 열심히 사역하자며 기뻐했지만 어정쩡하게 넘거버렸습니다. 얼마 후 이민 간다는 소식을 들은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동문이라 잔뜩 기대했는데 가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며 간청합니다. 고민이 돼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나게 하셨고, 결국 이민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충성하던 중 교회에서 좋은 사역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교회 부설 지역아동센터를 설립했는데 그 책임자로 임명받은 겁니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이혼율이 제일 높아서 방치된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 방과후 학교도 하고 성경 공부도 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겁니다.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신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기회에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해 보자고 마음먹었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야간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감사하게 한 학기를 마쳤는데 성적표를 보니까 줄줄이 A인 겁니다. 너무 좋아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들아, 이거 뭔지 알아? 장로님 성적표야. 내가 대학에 못 갔었는데 이번에 야간 대학에 입학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성적이 나온 거 있지.” 아이들이 줄줄이 A가 표시된 성적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너희도 하나님을 잘 믿고 열심히 공부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하나님이 축복할 거야. 나이 든 나도 공부하니까 너희들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어.” 그 후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게 됐고 그 지역아동센터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런 간증을 하는 그 장로님은 지극인 평범한 분인데 얼마나 커 보이고 존경스러웠는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성이 죄인인지라 부패하며 나쁜 변화만 생기기 일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좋은 변화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변화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때 나 자신이 행복해지고 내 주변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비록 평범해도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훌륭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아무쪼록 ‘돌아온 탕자 시즌 2’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로 날로 변화되어 나도 행복해지고 세상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