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우리에게 주는 기적

요6:1-13

 

감사하는 생활 속에 축복의 비결이 담겨져 있습니다. 감사는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한마디로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는 내가 가진 것을 알고 생각할 때에 시작이 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것들이 더 많습니다. 부자이면서 가정도 행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에게 왜 감사가 없습니까? 나에게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없는 것만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망원경으로 작게 보고 남에게 있는 것은 현미경으로 크게 보면서 비교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대설교가 크리소스톰은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다. 라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도 감사하는 사람은 점점 젊어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감사’라는 책을 쓴 라이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이란 손을 내밀면 얼마든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하지만 행복은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누릴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또 감사는 건강의 중요한 비결입니다. 또 감사는 우리 인생을 역전시키는 비결입니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계속 연장이 됩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 보면 자기 어머니의 암을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1981년 조엘의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습니다. 감기인줄로만 알았는데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이 치료해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에는 몇 주 정도밖에 살지 못 할 거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지만, 그들은 자연법칙을 뛰어 넘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엘의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평과 패배의 말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선포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살 거야. 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꼭 보고 말거야.”

 

그리고 성경에서 좋아하는 치유에 대한 말씀을 찾아서 그것을 종이에 적었고 매일 읽으면서 큰 소리로 선포를 했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점차 황달이 사라지고 몸무게가 늘고 건강이 다시금 돌아왔습니다. 며칠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오스틴의 어머니는 말씀의 능력으로 암에서 완전히 벗어나 건강함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감사할 때에 건강이 찾아옵니다. 감사할 때에 축복이 찾아오고 감사할 때에 기적이 찾아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사람들은 다 감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사로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서 건짐을 받게 된 이야기는 다니엘의 감사기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다니엘은 결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단 2:23과 6:10에 보시면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불평하면서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바다에 던져져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불평하면 어려운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다행히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됩니다.

 

104세 최고령의 목사님으로 목회활동을 하셨던 방지일 목사님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말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정말로 소년 같은 꿈의 사람이었고,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목사님이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늘 감사했기 때문이고 늘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시편이 아름다운 이유는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9:1에 보시면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받게 된 것도 역시 끝없이 감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롬 7:25에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감사는 표현할 때에 감사가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표현이 없는 감사는 감사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하나님께도 표현할 줄 알아야 되고 사람에게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로도 표현하고, 글로도 표현하고, 기도로도 표현하고, 찬송으로도 표현하고, 물질로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는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 만사에 다 때가 있다. 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아마 다른 아홉 명의 사람도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꼭 감사드려야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은 굶으면서도 하나님께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면 언제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8:12 이하에 보시면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17절에도 보시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교만해지는 죄를 범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될 영광을 도적질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도 능력도 은혜도 다 중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대목에서 저는 항상 은혜를 받습니다. 이 작은 사건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의 원리가 뭔지를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작은 일에도 감사했습니다.

 

7절에 보시면,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니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치면 실상은 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조금씩만 사서 나누어 주어도 200데나리온이 부족할 것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한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가지고 온 오병이어는 거의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작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양은 부족하지만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을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느냐? 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하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대로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부족하지만 감사할 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빌립이 조금씩만 나눠줘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늘 11절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고... 12절에 보면 사람들이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 13절에 보면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에 꽉 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로 인해 나타난 기적이고 능력입니다. 감사할 때에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없는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부족해도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하십시오. 바로 거기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 들에 나가 이삭을 주워 효도한 사실은 그렇게 큰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룻 2:3). 하지만 그렇게 효도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로 인해 룻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기도 모임이 결국에는 초대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놀라운 부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인의 칭찬도 보면 언제나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 즐거움에 참여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것에서 그런 큰 결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선악 간의 모든 일들이 다 작은 일에서 비롯되어 큰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어쩌면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모든 인류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패배라는 아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이 말씀에 거역한 죄가 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서운 풍랑을 만나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충성하는 작은 일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에 거기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요12:24) 한 알의 씨앗이 옥토... 좋은 땅에 떨어지면 거기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그것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서 가지에 깃들게 된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오늘 예수님처럼 작은 일에도 항상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사했습니다.

 

9절에 보시면 안드레가 예수님께 와서 보고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격하는 분이심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에도 기뻐하셨고,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도 칭찬하셨고, 사렙다 과부의 기름 한 방울 밀가루 한 웅큼의 헌신도 크게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과 큰 일의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는 분이시고,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는 분이시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믿음을 더 좋아하고 기뻐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작은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은 혀가 온몸을 통제한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도 있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소자에게 건네 준 냉수 한 그릇도 마지막 날에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굶주린 자에게 나눠 준 빵 한 조각의 사랑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의미에서도 파수군 한 사람의 태만이 전체 부대의 전멸을 가져올 수도 있고, 작은 담뱃불 하나에 대한 부주의가 큰 산불을 일으킬 수도 있고, 전화 한 통화의 불친절이 상대방의 마음을 하루 종일 나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인류에게 충격을 주었던 첼린지호의 폭발사건의 원인도 지극히 작은 결함 하나가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교통사고의 원인 90%가 운전자의 작은 부주의 때문이라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누가 봐도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떡도 그냥 보리떡이고 물고기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아마 크기도 작고 값싼 생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어떻게 10,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린 꼬마가 먹어도 모자랄 그런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가지고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200데나리온으로 떡을 사서 먹여도 부족할 판에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때에 어떤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 날 빈들에 모인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오히려 12광주리나 남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양을 치는 보잘 것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작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을 내어 드릴 때에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일군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60:22에도 보시면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없고 보잘 것 없는 내 모습이라고 해서 꿈과 희망을 포기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힘이 작게 보여도 결코 작은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라는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설탕을 조금 써도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 써도 몸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 비춰도 새싹이 힘있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 남아도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눅 9:13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열 두 명의 제자가 전부 “오병이어밖에 없으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병이어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인간적인 계산방법으로는 절대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때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장소는 아무 것도 없는 빈들입니다. 또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는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가능이라는 생각에 매여서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눅 9:16에 보시면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그 떡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에 넘치도록 남았다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감사할 때에 할 수 없는 상황이 100% 변하여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에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밖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을 때에도,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에도,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기드온이 300명 용사로 십이만명의 미디안 군대와 싸울 때에도,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에도,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싸울 때에도.... 보시면 모두가 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27에 보시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욥기서 42:2에서도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14:24에서는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려면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마가복음 9:23에 보시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7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감사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과 같은 사람이 있고, 안드레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은 계산에 밝은 사람이고, 안드레는 계산에 어두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믿음을 알아보기 위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5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립이 어떻게 대답할 것을 이미 아시고 시험 문제를 내신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빌립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정확하게 계산을 해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빌립의 대답은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맡겨주실 때에 인간적으로 계산해보면 대부분이 안 된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 안에 불행하게도 빌립처럼 계산에 밝은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계산을 할 줄 몰라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겠습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인간적인 계산은 항상 부정적인 방향으로... 안 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믿음보다 계산을 앞세우게 되면 항상 제자리에 머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보다는 축소시키는 불신앙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면 안드레는 어떻습니까? 안드레는 어린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우리는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도 역시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드레가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지금 안드레는 그런 마음...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겼을 때 무슨 대책이 있었나요?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천사가 다니엘을 도와주었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히스기야도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통첩을 보냅니다. "지금 항복하지 않으면 다 멸망시켜 버리겠다"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럴 때에 히스기야 왕은 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작전을 짜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들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산헤립의 18만 5천 명이나 되는 대군을 하루 아침에 다 송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6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도 시험해보십니다. 작고 부족한데도, 보잘 것 없는데도, 불가능한데도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십니다. 그 시험에 여러분들은 꼭 통과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빌립이나, 안드레나, 열 두 제자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한 무명의 어린 아이로 인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빌립처럼 부족하다고 계산만 한다거나, 안드레처럼 보잘 것 없다고 실망을 한다거나, 열 두 제자들처럼 불가능하다고 불평만 하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어린 아이는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감사의 예물로 예수님께 내어드렸을 때 바로 거기에서 오병이어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믿음으로 만들어진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길 때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드릴 때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도 감사할 때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적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함께 나눌 때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너무 작은 것이라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더 큰 것을 드리겠다고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지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 모습 이대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바로 여러분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지금 바로 감사하십시오. 지금 바로 여러분의 믿음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정성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도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