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생활-그리스도인과 정치 A
요한복음 1:6-8, 골로새서 3:12-14
찢어진 주님의 몸
1세기의 고린도교회는 몇 가지 이유로 분쟁과 분열을 겪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0–11).”
고린도 사람들은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정도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도자들을 열렬히 추종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지도자들인 바울, 아볼로, 베드로를 따르는 자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도파까지 있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의 미숙함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와 유사한 문제들을 적잖이 안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놓는 정치입니다. 교회가 태극기와 촛불,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신앙보다, 하나님 나라 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보다 더 중요해서,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원수로 만드는 일을 자행합니다. 이런 일은 세상의 광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10년 전 쯤에 일어난 한 사례를 나누겠습니다.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10여명의 교우들이 함께 아침을 먹으러 인근 카페로 갔습니다. 왼편에 앉은 교인들은 얼마 전 별세한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오른편에 앉은 교인들은 특정 전임 대통령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빨갱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새벽을 깨우며 기도했고, 함께 한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신자들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대놓고 비난을 하지는 않았지만, 좌우로 나뉘어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고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적 해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일절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정치 문제는 예민한 문제이므로 적어도 교회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마음대로 떠들어도 괜찮습니까? 성경적인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두 주일에 걸쳐 이 주제를 성경적으로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두 나라 이론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구속 언약에 기초하여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창 12:1~3), 여전히 노아 언약에 기초하여 세워진 일반 나라인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창 9:1~7). 이것은 우리가 교회라는 영역에서는 믿음으로 살고, 교회 밖 세상이라는 영역에 들어가서는 세상 지혜와 이치를 따라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시민이면서, 동시에 일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는 신자의 영적 관할권을 가진다면, 일반나라는 세속적 관할권을 가지고 우리의 외적 행동을 규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속의 나라와 일반 나라, 교회와 세상은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바울 사도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묘사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1–23).”
그리스도는 그냥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으나 그 완성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을 복종시키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5:26). 그리고 그날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한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계 11:15). 일반 나라는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 영원할 것입니다.
아직 완성의 날은 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지만, 두 나라가 존재하는 시대에서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에 대한 생각은 초대교회를 지나 어거스틴을 통과하는 오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변천이 있어왔습니다. 이것을 조금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상고하는 이 주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보여 간단히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역사의 처음 300년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핍박과 박해가 심했던 시대였습니다. 유대교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일반나라인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는 기독교 신앙이 로마 제국에 용인될 수 없다고 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초대교회의 기독교 문헌들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대립과 적대 관계로 설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에 이어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이어지자, 이런 상황의 변화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로마 제국을 역사 속에서 실현된 기독교화된 하나의 실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이후 유세비우스 사후(340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어난 어거스틴(354~430년)은 처음에는 유세비우스의 관점을 공유했지만, 점차 이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어거스틴이 처했던 상황, 로마제국의 약화와 한편으로는 게르만족의 로마제국 침탈과 공격으로 인한 전쟁의 참화를 겪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2001년 911 테러가 미국과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과 같은 사건이 어거스틴이 살던 410년 8월 24일에 일어났습니다. 게르만족인 서고트족이 로마를 사흘 동안 약탈한 일입니다. 800여년 동안 외부 세력에 의해서 침공을 받은 적이 없던 로마가 게르만족에게 사흘간 약탈을 당한 이 사건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대 로마 제국의 지성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대 최고 지성이었던 어거스틴은 15년에 걸쳐 성경적 역사철학서 <신국론>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상 마지막 인간까지 전체 인류는 둘로 나뉜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서로 대립되는 두 도성인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으로 설명되는 소위 두 나라 이론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르는 하나님의 도성에, 비신자들은 육체를 따르는 인간의 도성에 속하였으므로, 서로 중복되거나 이중 회원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도성 사이의 이중시민권은 불가능하지만, 두 도성이 정확하게 지상의 교회와 국가와 완전히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도성에 속한 사람으로서, 다른 도성에 속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어거스틴에게서는 이런 애매함이 완전하게 해소될 수는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두 나라 이론은 사실 이후 신학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후일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어거스틴의 두 나라 이론에 근거하여 말합니다. 루터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자들과 세상 나라에 속한 불신자들로 구분되며, 하나님께서는 두 나라를 위해 두 통치를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영적 통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세속 통치의 목적은 악인과 불신자들을 세속의 칼로 억제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두 나라는 서로 다른 두 백성인 신자와 불신자가 속한 곳이며, 둘 사이에 회원의 자격은 중복되지 않습니다. 즉, 한 나라의 시민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칼의 사용에서 완전히 분리되거나 무관하게 사는 것은 아닌데, 여기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본 것과 같은 애매한 입장을 봅니다.
두 나라 이론은 종교개혁자 존 칼빈에게서 더 성숙한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9장 15절과 4권 20장에서 두 나라 이론을 말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신자는 이중적 통치를 받게 되는데, 각각 영적 관할권과 세속적 관할권을 특징으로 하는 영적인 통치와 국가적 통치입니다. 영적 통치는 영적 삶을 관할하고, 국가적 통치는 외형적 행실의 문제들, 음식, 의복, 질서있는 삶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들을 관할합니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루터의 입장을 극복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의 통치 모두에 속해 있으며, 영적 통치에 속했다고 해서 국가적 통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명확하게 그리스도인이 두 나라 시민권을 가졌음을 밝힘으로써 어거스틴이나 루터에게서 본 애매함의 요소를 제거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4세기 동안 대부분의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칼빈의 두 나라 이론을 인정하고 발전시켜 왔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하나님은 구속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나라인 교회를 다스리시고, 창조주와 보존자로서 국가와 다른 모든 사회제도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착각과 혼동 그리고 한국교회의 현실
조금 장황하다 싶지만, 제가 이 두 나라 이론을 설명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현존하는 두 나라, 두 통치를 혼동하고 착각하는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지요. 본문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약 40일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수시로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행 1:3). 그런데 제자들이 한 가지 오래도록 가슴 속에 쌓아두었던 질문을 주님께 던집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것은 제자들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따를 때, 계속해서 그들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럼 이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가진 생각은 당시 모든 유대인의 생각 속에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서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제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도 드러납니다. 에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뒤, 절망한 두 제자가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a).”
가이사랴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조금 전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했던(마 16:16)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나하리이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마 16:22).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킬 메시아로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 보십시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행 1:3).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 개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막 1:15).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사실은 정치적 개념이 가득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된 정치적 유대 나라로 착각했고 혼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드디어 그 때가 왔나보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행 1:7). 주님께서는 단순히 때와 시기에 관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와 시기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생각하는 유다국의 정치적 독립과 회복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은 이런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전세계, 즉 로마 제국을 넘어 땅끝까지 확장될 것인데, 그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정치적 국가의 회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 나라는 너희에게 임하실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질 영적인 나라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자들과 같은 착각과 혼동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또는 통일한국)을 동일시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원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현상은 성경 지식이 없는 일반 신도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들과 교회를 다니며 강연을 하는 유명 강사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잘못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특정 정당이 정권을 잡도록 기도하거나 특정 정치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주요 정당에는 기독인회라는 일종의 신우회 같은 조직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기도회로 모인다고 합니다. 그곳에 초청받아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면,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정당의 복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정치인들은 정치논리와 진영논리에 휘둘려 잘못 행한 것이 없는지 자신들의 말, 태도, 행동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영예를 드러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정치인들은 정권을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정치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정치인이 참된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된 듯 싶습니다. 이것은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한기총이라는 자칭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 기독교 정치조직을 대표하는 목사들의 발언이나 기도 내용도 제자들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이 해석하고 원하는 정권 창출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화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는데, 허구인지 사실인지는 증명된 바 없지만, 이 주제를 설명하기에 좋은 이야기이기에 나누려고 합니다. 전쟁이 숨가쁘게 치열하게 진행되던 상황에서, 대통령이자 북군의 지도자인 링컨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한 참모가 “하나님도 참 고민이 많으시겠다”고 말했답니다. 왜냐하면 남군 지도자인 리 장군 역시 신실한 신자였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링컨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해본 적이 없소....... 나는 오늘도 기도하기를, 내가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소." 이 일화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태도의 문제-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제 아무리 국회요, 정당에 속한 정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 다워야 하고, 정당, 정책,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정당의 경계, 정치적 입장의 경계를 넘어서게 하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정치적 입장, 자기 정당의 입장이 자신의 신앙보다 더 중요한 가치처럼 보이는 기독교 정치인들을 적잖이 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는 처사이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정치인이라면, 불의에 맞서고 약자를 돌보며 정의와 긍휼 같은 성경적 가치들을 지키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공인일 때, 더욱 더 강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물론 정치인, 혹은 정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앞서 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가 정치적 진영 논리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원치 않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그 누구도,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주장으로 인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혼동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혼동은 악하고 불량하며 천박한 태도를 낳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행동이나 연설이나 논의를 할 때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과 정치를 논할 때에도 태도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언사와 태도가 지나치게 독선적(獨善的)이어서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 안의 형제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된다면, 이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형제 사랑 보다 중요하며,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정치의 문제가 우리 자신 안에서 이 정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 숭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라.
신앙은 멀리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어줍니다. 단지 멀리 보는 사람으로서 만이 아닙니다. 멀리 본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신앙을 성품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눈 앞에 있는 것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지혜로울 수 없고 여유롭지도 못하며 천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멀리 보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신앙을 성품과 인격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문화활동을 하거나 정치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합당하게 세워진 일반 나라를 존중하는 합당한 수고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원리를 따라 이 수고를 감당해야 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에 합당하게 활동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수고가 구속의 나라와 연결된 영원한 가치를 지닌 일이 아니며 한시적 가치를 지닌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수고들은 다 지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손으로 만들거나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수고가 헛되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처럼(마 6: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셔서 내 뜻, 내 개인적 정치적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게 하시고 주님 재림의 날에 우리의 선한 수고를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인식은 세상에서 특별히 일반 나라와 관계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게 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아가지만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고 자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앙 성숙의 열매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정치에서 좀 멋있는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나와 다른 견해와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와 다른 당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눈 앞의 정치적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정권욕에 눈이 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뭔가 위대하고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분이구나” 하고 존경심을 품게 하는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을 보고 싶습니다.
19세기 영국에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 정치인이 있었으니,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입니다. 우리나라에서 2008년에 상영되었던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그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신실한 신앙인이자 영국의 하원의원이었던 그는 노예 무역 위에서 경제 번영을 누리던 대영제국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총 11번의 노예무역 폐지법안의 부결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20여년 만인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고, 이후 건강문제로 의원직을 사퇴한 후에도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다가, 결국 죽기 직전 1833년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은, 그리스도인 정치인은 자기가 속한 정당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그리고 때로는 자기가 섬기는 국가의 경제적 이익과 가치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정치인만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어떤 정당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여러분이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는 정당의 정치적 견해보다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이 있습니다. 두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신자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함은 물론입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과 주장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해치고 무시하고 짓밟는 자리로 가는 것은 신자에게는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적용적 권면
말씀을 맺으면서, 간단한 적용적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자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의 정치적 표현이 우리가 한시적이고 일시적 가치에 목숨을 거는 사람임을 드러내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것,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이 땅에서 어떤 정치적 가치를 위해 수고하지만, 우리는 한시적 가치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정치적 입장이 보수이거나 진보일 수 있습니다. 신자는 반드시 보수여야 한다거나 진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으로 승인 받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신자 역시 어느 한 입장에 설 수는 있지만, 그는 늘 그것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비판적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에게는 최고의 가치, 절대의 가치,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관점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자기가 속한 진영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더 높고 더 깊은 가치와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진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가치를 추구하십시오. 노아 언약에 기반하여 세우진 국가의 기능으로서,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피를 흘린 사람에게서 피를 흘리게 하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창 9:5~6). 고아와 과부 같은 약자를 돌보는 긍휼 또한 중요한 성경적 가치입니다. 정의와 긍휼!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이 가치들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언제나 주장만큼이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례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교회 안에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틀렸을지라도, 여러분은 심판자가 아닙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적으로 상대 진영에 있는 지도자들을 희화화하거나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런 대열에 합류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아십시오. 물론 그리스도인도 시위에 참여하여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열되는 정치적 논쟁이나 시위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감당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옷 입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끝으로, 하나 더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입장과 쟁점들을 달리 할 수 있고 때로는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일에는 함께 주님의 상에서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의 상에서 함께 먹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낄 만큼 정치적 이해관계가 영향을 미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치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리고 하나님 보다 중요한 우상이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치적 입장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게 놔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십시오(마 6:33).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정치적 이상, 이념, 목표는 그 다음 자리에 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정치를 하든지,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멘!
------------------------------------------------------------------------------------------------------------------------------------------------
신자의 사회생활-그리스도인과 정치B(마 6:33)
지난 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요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정치적 이슈로 나뉘거나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정치적 진영 논리로 나뉨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는데 기인한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의 문제였으며, 지난 교회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답습해온 잘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지만 세상 나라는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로 정치 이슈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지만,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열정도 없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정 거듭난 신자라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정치에 관여를 하더라도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관여하게 하며,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이 ‘적당한 거리감’은 불성실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구별을 명확히 할 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리까지 또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놓는 자리까지 정치가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말했습니다. 정치가 우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직업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관점과 태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직업이 그리스도인됨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자리까지 가는 것은 어떤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가치를 이 세상 속에 구현하면서 살아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시민으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이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주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시다”라는 명제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9년 전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미국의 공화당원을 의미하는 Republican과 민주당원을 가리키는 Democrat의 합성어인 Republocrat 입니다. 우리 말로는 『진보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공화당원이거나 민주당원이 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점에서 보수적이거나 모든 면에서 진보적일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족, 공동체, 생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에서는 보수적이면서도, 가난, 인종, 차별 문제 등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정치적 입장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개념 조차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신자로서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직업 정치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이념이나 지지하는 정당, 즉 자신이 취하는 정치적 입장이 기독교이 취해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서 지나쳐 나간 그릇된 태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의 정치적 성향은 부모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적 그룹에도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회적 그룹이라는 것은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규정된 그룹을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역사와 지역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귀족이 진보적 정치관을 가지고 노동 운동에 뛰어들거나 노동자 계층이 보수적 정치관을 가지고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부모의 영향, 자신이 속한 사회적 그룹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기 중심성은 결국 자기가 속한 진영,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강력한 확신으로 투쟁하듯이 싸우게 만듭니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이 인생에서 자신이 지키고 살아온 가치관과 정치관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신이 취해왔던 입장과는 정반대의 새로운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과 정치적인 입장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변화를 겪을 수 있다면, 신앙은 과연 사람의 정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진보적 정치관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보수적 정치관으로 선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점에서 저는 “하나님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시다”라는 명제를 먼저 여러분 앞에 꺼낸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보수주의자일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혹은 진보주의자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선지자적 관점
그것은, 사람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음 안에서 자라가게 될 때, 그가 보수나 진보를 넘어 제3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이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죄인의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참된 신자라면, 전과 같이 자신이 속한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된 사고와 태도에 자신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적 성향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는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 동기로 모든 사안을 바라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보적 성향의 정치관을 가졌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낙태와 동성애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슈입니다.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기독교적 입장은 분명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이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통해 세워진 일반 나라에게 요구하시는 기능적 가치는 정의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시행하는 것과 함께, 성경이 가르치는 약자들을 향한 긍휼도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배려는 모세 율법의 곳곳에서 넘쳐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 생명의 존엄함은 경제, 지식, 권력 그 어떤 요인과 이유에 의해서도 억압되거나 박탈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이런 이슈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고 이것은 보수, 진보를 떠나 그리스도인이 취해야할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모르게 한쪽 집단, 혹은 진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무의식적으로 자기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정치적 행위를 행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가를 늘 자기 비판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의 참 뜻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요 17:14).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는 여전히 이 땅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만,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언제나 신자의 삶에 긴장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신자는 제3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살며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때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의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땅에서 소위 ‘왕따’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제3의 관점을 다른 말로, 선지자적 시각, 선지자적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언제나 선지자적이어야 하지만,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신정 사회였음에도 왕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하지 않을 때, 왕과 권력자들을 향해 준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꾸짖었습니다. 신자들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진 그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편에 섬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그 방식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가 아니라, 자연법과 양심에 근거한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정치적 이슈들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자기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정신을 잃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거듭난 신자들이 취하는 근본적인 입장이며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인구 대비 1/10만 된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어떻게 이렇게 총체적으로 부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어떻게 이 사회가 이렇게 건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의 이익, 자기 집단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추구했던 것은 아닌지, 신자라고 하면서 이 세상의 진영 싸움에 더 깊이 말려 들어가서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 정치적 입장에서 자기 편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쓰고 살아갔던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정치의 논리를 교회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과 논리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하고 살아갈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과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신자는 언제나 선지자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서 숨겨지지 않고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중하고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이런 선지자적 관점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정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 자신의 생각, 전제, 편견, 주장이 늘 교정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우리는 무지함의 기초 위에서 미숙하고 성급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공부하는 태도는 언제나 시편 139편에서 보는 다윗의 태도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정통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주장에 담긴 사상적 실체를 더 잘 분별하고 상대화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본주의는 우파, 우파는 기독교이고, 사회주의는 좌파, 좌파는 무신론 빨갱이 하는 식의 세상의 단순논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가 우리 삶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여 만들어내는 허구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사회주의가 가진 이념상의 허구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물질의 축적에 뿌리내린 인생관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피할 수 없고, 이것이 영적으로는 번영신학이 자라나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번영은 복음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세상의 정치와 이념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칼 바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대로, “한 손에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가짜 뉴스’의 이슈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짜 뉴스를 만들거나 그것에 속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의 역사가가 완전한 역사적 사실만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없듯이, 뉴스 매체들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완전한 객관성으로 일어난 사실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의도를 가졌건 아니건, 일정한 관점으로 해석하며 보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신중한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진리는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빛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뉴스들을 보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분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신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견해에 관하여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 진영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면, 서로 외국어로 소통하는 것만큼이나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국회와 정치의 현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땅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범시민인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주장이나 가치 또는 정치적 진영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할 줄 알 뿐 아니라,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이땅에서 어느 한 진영이나 주장이 절대선일 수 없고 반대로 절대악이지도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만이 온전하게 취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온전한 성인(聖人)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바른 성도라면, 영적이든 정치적이든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고 해도 사람을 무분별하게 높이거나 따르는 자리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주장이나 단체, 집단도 완전한 선이나 완전한 악이라고 보지 않은 이 입장이 성도로 하여금 보다 신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며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형제들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눌 형제로 대하는 바탕이 됩니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중한 그리고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입니까? 신중하고 지혜로운 신자는 세상에서 극단적 이념주의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정치적 쟁점들에 관한 분명한 기독교적 입장은 존재하는가?
가끔 이런 말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참된 신자가 과연 이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이런 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다소 위험한 말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야 하지만, 그 진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지,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 집단과 완전히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는 바벨론에서 정치에 참여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를 생각할 수 있고,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는 페르시아에서 정치에 참여했던 모르드개나 에스더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합과 같이 악한 왕이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궁중에서 대신으로 일했던 오바댜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중하고 지혜로운 신자라면, 이런 극단적 흑백 논리에 빠져들어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령, 동성애와 관련해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차별금지법은 일반적으로 성별, 연령, 인종, 장애, 종교적 성적 지향, 학력 등의 이유로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입니다. 이 차별금지법 제정의 시도는 번번이 보수기독교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가 되지 못해왔습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무조건 반대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어떤 조건과 이유로 차별을 당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우리가 바벨론에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고 있으며, 바벨론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법안이 담고 있는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동성애 이슈와 차별 금지를 이유로 전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항들은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동성애 이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차별 자체를 긍정하거나 찬양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땅의 교회는 고아와 과부처럼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이웃으로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들에게 동성애 이슈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적 입장을 신자들이 분명하게 가지더라고,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또 명백히 성경이 금하는 문제를 우리가 반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반대를 표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제가 이 복잡한 문제를 꺼낸 이유는 이것입니다. 과연 이런 다양한 정치적 쟁점마다 뚜렷하게 성경적 혹은 기독교적 입장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동성애는 죄라고 말씀하고 신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한편 신자들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사회가 도덕적으로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후 보루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세밀한 차원까지 들어가게 될 때, 이것이 성경적 입장이고 기독교적 주장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아주 기본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서있으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세상에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며 그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는 일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역사 속에서 아주 극단적 상황이 벌어질 때에는, 정부나 위정자에 대한 성경적 판단과 입장이 분명하게 주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가 처했던 16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그런 극단적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참된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매리 여왕과 그 정권을 향해서 저항할 권리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는가? 이 문제는 당시 존 녹스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또는 20세기 중반 아돌프 히틀러가 주눅이 든 독일 국민을 호도하여 독재적 권력을 확보하고 유럽에서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대량 학살하는 일을 했을 때도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천재적 신학자요 경건한 신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 남아 연구하고 가르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보장된 개인적 안정을 뒤로 하고 조국으로 돌아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히틀러가 자살하기 얼마 전인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정부와 위정자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그리고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경과 함께, 우리의 많은 신앙고백서들이나 교리문답서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은 많은 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또한 여러 입장과 견해들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 생명 존중, 가족, 공동체, 정직, 약자들을 돌봄과 같은 가치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성경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지혜롭게 그 가치를 잘 구현해내는 정책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이 다루는 윤리적 주제들을 다룰 수 있으나 현실 정치의 쟁점이나 공공 정책의 차원에서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비성경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이라고 쉽게 판단을 내리거나 그것을 개인 신자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 고려 사항들
정치는 정치입니다. 일반 나라의 정치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다. 국가와 정부가 제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도하며 시민으로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일반 국가를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위로부터 주어질 나라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민감하면서도 사소할 수도 있는 실제적인 권면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교제의 자리에서 혹은 SNS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표현합니다. 이때,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거나 그 양심이 불편하게 느끼도록 표현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언젠가 선거철에 어떤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선거운동을 하던 분들이 저녁 집회에 참석하면서 선거운동원들이 입는 조끼를 걸치고 여기 저기 앉아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것도 교회에서는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형제 사랑을 희생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경청하십시오.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들의 말을 경청하되, 형제 사랑과 진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정치를 우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친교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금지된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할 때, 다툼으로 가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을 형제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무례하지 마십시오. 전도를 할 때에도 신앙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무례함을 피해야 하듯이, 정치에 있어서도 신자는 그런 무례함을 나타내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여쭙고 하나님의 뜻을 물을 줄 아는 신자는 겸손한 태도를 지닐 것입니다. 직업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진영 논리, 자기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효과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세상 나라와 세상 정치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 오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하십시오. 정치가 여러분의 우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존재 때문에, 이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정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