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Ⅰ)
(빌립보서 4:20-23)
Ⅰ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 부분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오늘과 다음 두 시간에 걸쳐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저는 빌립보서에 대한 기본적 소개로 빌립보서에 붙어있는 세 가지 별칭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세 가지 별칭중 첫째는 옥중서신이고, 둘째는 사랑과 감사의 편지이며, 셋째는 기쁨의 복음입니다. 이 중 옥중서신이라는 별칭은 빌립보서가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이기에 붙여진 별칭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감사의 편지라는 별칭이 빌립보서에 붙게 된 이유는 우선 사랑과 관계해서 그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나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인 갈라디아서나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그 서신들에는 그 교회들의 잘못된 신앙내용이나 그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된 생활모습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면서 강하게 꾸중하고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반해, 빌립보서에는 빌립보교회에 지적할 만한 잘못이 있었음에도 그 잘못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 지적을 꾸중의 언어로 하는 것 대신 사랑이 가득 담긴 언어로 그것도 암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바울의 빌립보교회를 향한 마음이 빌립보서에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감사와 관계해서 그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그 동안에도 그의 선교여행을 도와주었고 지금도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투옥생활을 도와주고 있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표현하고 있는 바울의 진실한 감사가 빌립보서에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그렇게 빌립보서 안에는 바울의 사랑과 감사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감사의 편지라는 별칭이 빌립보서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를 기쁨의 복음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이유는 전체 4장 104절 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의 책인 빌립보서에 기쁨이라는 단어와 기뻐하라는 단어가 16번이나 나올 정도로, 바울이 복음 때문에 소유하게 된 기쁨에 대해 고백하는 구절들과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자신과 같이 복음으로 기뻐하며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구절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립보서가 감옥에서 쓴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에는 바울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나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내용은 없고, 그저 복음 때문에 기쁨이 충만했던 바울의 고백과 그런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자기와 같이 복음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쁨의 복음이라는 별칭이 빌립보서에 붙여진 것입니다.
Ⅱ
이제 바울은 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옥중서신이면서도 사랑과 감사의 편지이고 기쁨의 복음인 이 빌립보서를 마감하면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마지막 인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20절에 나오는 말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고, 둘째부분은 21절과 22절 말씀에 나오는 바울을 비롯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문안하는 내용이며, 셋째부분은 23절 말씀에 나오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심령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마지막 인사를 통해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 살고 있든지 우리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하고, 또 주변에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늘 관심을 가지고 문안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하며, 그리고 또 함께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이 세 가지 내용 중 첫 번째 내용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내용은 빌립보서 강해 마지막 시간이 되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Ⅲ
방금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20절 말씀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빌립보교회 교인들 모두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리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형편에서 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그 마지막 인사의 첫 번째 내용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 돌리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기원은 바울 자신의 다짐을 담은 기원일 뿐만 아니라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살도록 권면하는 기원이고, 오늘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는 기원입니다. 이 기원을 두 가지 내용, 즉 우리가 영광을 돌려야 할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께 그 영광을 우리가 언제까지 돌려야 하는 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영광을 돌려야 할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우리가 영광을 돌려야 할 분에 대해 바울은 그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울은 그 분을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그렇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우리가 영광을 돌려야 할 분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시길래 우리가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우리와 온 세상의 주인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답게 오늘도 온 세상과 역사를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그 통치와 주관의 원리는 공의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자식을 늘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분이시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자식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며, 바른 길과 선한 길과 복된 길로 자식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고, 자식이 필요로 하는 것을 기쁨으로 자식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마귀의 종이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마귀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권세,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자녀의 권세로 들어가 영생과 복락을 누릴 권세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라는 것이고, 또 자신의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며, 그리고 또 오늘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 간에 복된 자로 살고 있으니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라는,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보호자이시고,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공급을 받고 사는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합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께 언제까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바울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기원했습니다. 이 기원에 나오는 ‘세세 무궁하도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문장은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ῶνων)인데, 이 ‘세세 무궁하도록’이라는 문장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적인 의미입니다. 이 가운데 시간적인 의미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리고 이 땅을 떠나 영원가운데 거하게 될 때에도의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인 상황적인 의미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존재하고 있다 할지라도의 의미입니다. 즉 세세 무궁하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 땅에 있을 때나 이 땅을 떠나 영원가운데 거할 때나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고, 어떤 형편이나 환경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기원 그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 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태평교회 교우들은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보여주셨던 귀한 어른과 함께 했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귀한 어른은 우리교회 초대 담임목사이셨던 우해 김용칠 목사님이십니다. 여러분! 그 어른의 목회철학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어른이 죽음 직전 무의식의 상태에서 잠시 눈을 뜨시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 어른의 목회철학은 ‘첫째, 모든 공은 신자에게 둘째, 모든 책임은 목사가 셋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였습니다. 그리고 열두시간정도 의식을 잃고 계시다가 죽음 직전 잠시 눈을 뜨시고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그리고 우해 김용칠 목사님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Ⅳ
이렇게 바울은 자신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 그리고 오늘에 같은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세세 무궁하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온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는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철저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고, 욕심 속에서 원망이나 하고 불평이나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감사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 때문에 하나님이 욕을 먹고 교회가 비난을 받는다는 기가 막힌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불의한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교회가 불의한 집단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교회에 출입을 하는 신앙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에 합당한 삶,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잘 몰랐지만 당신의 사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고, 그래서 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진실을 추구하고, 단호하게 죄를 거부하고, 누구 앞에서나 겸손하고, 낙심할 만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언제나 넉넉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죽음을 넘어 천국을 바라보며 영생과 복락을 누릴 소망으로 죽음을 이기는, 그렇게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넷째, 깨끗하고 열심있는 삶을 살아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승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죄악과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그 죄악과 유혹에 승리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과연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열심히 땀을 흘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학에도 성공하고 사업에도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지난 리우올림픽 양궁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장혜진 선수는 우승 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활을 쏠 때 자기는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을 반드시 암송한 다음 쏜다고 하면서, 자기가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때문이라며 그 승리를 통해 자기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깨끗하고 열심있는 삶의 내용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성공과 승리를 이룬 뒤에 그 성공과 승리의 영광을 자기나 다른 것이 차지하는 것은 그 성공과 승리의 진정한 능력과 근원이 되어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저는 몇 년 전 어느 유명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정된 공연을 마친 그 가수는 관객들의 앵콜을 받아 다시 무대에 나왔습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한 목소리로 아버지라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뜨겁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 요청을 받은 그 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관객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시듯이 생부를 모릅니다.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분은 혼혈아인 나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를 이렇게 성공한 가수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노래 아버지는 아니지만 이 시간 나는 내 삶에 은혜를 주신 그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를 때 나는 감히 그 노래를 서서 부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그녀는 무대 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반주도 없이 그 아버지께 노래를 불러드렸습니다. ‘Amag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이 그녀의 입을 통해 들려질 때, 그 곳은 세속의 문화가 주는 즐거움의 자리가 아닌 거룩한 감동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공을 통해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Ⅴ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바울의 기원 끝에 나오는 아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아멘에 대해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멘은 동사로는 확실하다, 그리고 명사로는 진리, 그리고 부사로는 참으로, 그리고 맺는말로 사용할 때는 그렇게 될지어다 또는 그렇게 해 주옵소서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그렇게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내용에 동의합니다’, ‘확실히 믿습니다’는 뜻을 가진 아멘은 오늘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글씨는 자기 나라 글씨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지만 소리는 히브리어 발음 그대로 아멘으로 소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도 히브리어 발음 그대로를 헬라어 알파벳을 가지고 아멘(ἀμήν)으로 표기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기원의 끝에 아멘을 붙였을까요? 그 이유를 유추해보면 첫째로는 자신이 한 기원에 대해 먼저 자신이 순종하고 복종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표현하려 했기 때문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편지의 수신인인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자신의 기원에 동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원에 자신이 아멘함을 통해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되기를 표현한 것이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비롯한 오늘에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자신의 기원에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강하게 권면 한 것입니다. 아멘에 담겨있는 의미 그대로 세세 무궁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Ⅵ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의 권고 그대로 우리를 존재케 하시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세상살이에서 승리하며, 늘 하나님을 자랑하고 증거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축복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저 천국에서 영원토록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