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의 비결
(빌립보서 4:10-13)
Ⅰ
먼저 본문의 내용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본문의 배경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시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자주장사 루디아와 바울의 치유역사로 점치는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여인과 바울과 실라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구원을 받게 된 감옥의 간수 가족들이 모체가 되어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렇게 바울과 빌립보교회는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빌립보교회를 떠난 뒤에도 자신의 뒤를 이어 목회할 교역자를 빌립보교회에 파송해 주는 등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관계는 보통의 교역자와 신자사이의 관계를 넘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와 같이 끈끈한 정과 따뜻한 사랑으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을 위해 교회를 세워주고 영적으로 양육해주던 바울이 계속해서 2차 선교여행을 위해 빌립보교회를 떠나게 되자 물질로 그의 선교사역을 돕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16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동안 두 번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시와 그리고 이후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의 초기 감옥생활 동안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4세기에 활용한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는 당시 빌립보교회의 경제적 형편이 매우 궁핍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하튼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선교여행을 떠나는 바울에게 그의 선교사역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그 약속을 두 번 정도만 지킨 후 계속해서 지키지 못한 것에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바울에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교회의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십시일반 돈을 모은 다음, 당시 빌립보교회의 교역자였던 에바브로디도에게 그 돈을 가지고 바울에게 가서 바울을 위로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먼 거리를 여행하여 로마에 와서 바울을 만났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사랑의 마음과 함께 그들이 모은 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그 사랑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을 편지에 적게 되었는데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런 본문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는 본문에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내용 중 첫째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을 염려해주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이고, 둘째는 그동안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빌립보교회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배려이며, 그리고 셋째는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으나 그런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살고 있다는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Ⅱ
이런 세 가지 내용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시간에 본문에 나오는 그 세 가지 내용들 가운데 특별히 세 번째 내용인 바울의 신앙 고백에 나오는 자족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소유해야 할 가장 큰 교훈의 말씀이 자족이기 때문입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나, 그래서 비천한 몸이 되었고 배고픔과 궁핍의 생활을 하고 있으나, 자신은 자족할 줄을 아는 까닭에 그 자족이 일체의 비결이 되어 그 모든 것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족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족으로 감옥 안에서도 불평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즉 자족할 줄 알고 자족의 삶을 살았기에 감옥 안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바울이 살았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족이 무엇입니까? 자족이 무엇이기에 감옥 안에서도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까? 자족이란 헬라어로는 아우타르케스(αὐτάρκης)이고, 영어로는 셀프 서피션트(self-sufficient)이며, 한문으로는 스스로 자(自)에 흡족할 또는 넉넉할 족(足)입니다. 그런 단어들의 뜻을 풀이하면 스스로 만족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자족의 뜻을 오늘 읽은 말씀 안에서 찾는다면, 그 뜻은 바울이 11절과 12절에서 말씀한 그대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넉넉히 살 수 있는 일체의 비결’입니다. 11절의 ‘어떠한 형편에든지’는 헬라어 원문으로는 ‘엔 호이스 에이미(ἐν οἷς εἰμι)’이고 영어로는 ‘인 홧 컨디션스 아이 앰(in what Conditions I am)’인데, 그 뜻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말씀한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헬라어 원문으로 ‘엔 판티 카이 엔 파신 메뮈에마이(ἐν παντὶ καὶ ἐν πᾶσιν μεμύημαι)’이고 영어로는 ‘인 에브리씽 앤드 인 올 씽스 아이 해브 빈 이니시에이티드(in everythting and in all things I have been initiated)’인데, 그 뜻은 모든 것의 비결을 배워서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이 11절과 12절 종합해서 자족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넉넉히 살 수 있는 모든 비결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란 어떤 곳입니까? 한마디로 감옥은 궁핍한 곳입니다. 자유가 궁핍한 곳이 감옥이고, 물질이 궁핍한 곳이 감옥이며, 활동의 공간이 궁핍한 곳이 감옥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감옥에 갇혀 있는 형편에서도 넉넉히 살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인 자족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때 감옥 안에서만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는 감옥에서만이 아닌 그 어느 곳에서도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고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있다고 교만하지도 않았고 경견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면서 환경과 자리에 구애받지 않는 감사와 기쁨의 삶을 평생 동안 살았습니다.
이런 바울이 보여준 삶을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이 감사와 기쁨의 삶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자족의 마음대신 욕망을 채우지 못해 생기는 불만족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자입니다. 아내나 남편에 대해 자족할 줄 아는 남편이나 아내가 행복한 남편이고, 아내이며, 자기 조국에 대해 자족할 줄 아는 국민이 행복한 국민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여러 현자들은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족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지만, 불만과 불평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 말입니다.
어떤 아침잠이 많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남편이 아내를 깨워야 했는데, 얼마나 잠이 많든지 깨워도 또 잡니다. 그로 인해 남편은 매일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아내에 대한 남편의 불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앞집에 사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피곤에 절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 사람의 아내가 심각한 불면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최소 석 달은 입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기 아내가 아침잠은 많지만 늦게라도 일어나서 방도 깨끗이 청소해 놓고 빨래도 해 놓으니, 석 달씩이나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불면증보다야 아침잠이 많은 편이 차라리 낫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불만의 마음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 형편을 스스로 족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행복자로 살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럼 바울이 어떻게 감옥 안에서도 자족하며 살 수 있었습니까? 그의 자족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자족의 비결이 본문에 두 가지가 나옵니다. 그 첫째는 신앙 밖에서도 즉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소유할 수 있는 비결이고, 둘째는 신앙 안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물론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소유할 수 있는 자족의 비결은 자기가 자족의 근원이 되는 까닭에 변할 수 있는 불완전한 비결이고,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비결은 변하지 않는 신앙이 자족의 근원이 되는 까닭에 완전한 비결입니다. 그런 까닭에 변하지 않고 완전한 신앙 안에서의 비결을 소유한 사람은 자연히 신앙 밖에서의 비결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Ⅲ
먼저 두 가지 비결가운데 불완전하지만 신앙 밖에서도 소유할 수 있는 자족의 비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 밖에서도 소유할 수 있는 자족의 비결이 10절 말씀에 나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관계는 혈연관계와 같은 관계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빌립보교회를 세운 다음 다시 선교여행을 떠나는 바울을 돕기로 약속했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차 선교여행을 마치기까지 두 번에 걸쳐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시에나 로마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던 초기에는 바울을 돕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늦게나마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내며 미안한 마음도 전하고 그를 위로하면서 위로금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10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너희들이 그 동안 나를 돕지 못한 것은 너희가 나를 도울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녔던 까닭이다 그렇게 너희에게 나를 도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을 내가 안다. 그러니 그동안 나를 돕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지 마라. 그런데 이제 내가 로마감옥에 갇혀 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도우려고 했던 그 생각을 이제 너희가 실천할 수 있게 되어 나는 지금 너희의 사랑을 받으며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우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쉽게 그래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고는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빌립보감옥에 갇혀 매를 맞으며 세웠던 교회, 그리고 늘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었던 교회, 그리고 자신의 선교여행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교회, 그런데 그런 교회가 두 번 정도 돕고 난 이후 소식을 딱 끊습니다. 야속한 마음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정말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자신을 돕지 못했지만 그것을 이해해주려 하였고, 자신을 돕지 못해 미안해하는 그들의 마음을 덮어주며 그들을 배려해 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와 배려의 마음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궁핍했고 힘든 형편이었지만 그 형편에 자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신앙 밖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이해의 마음과 상대방을 배려해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에 대해 자족할 수 있습니다. 분명 남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내는 남편에게 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남편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디 사람만 그렇습니까? 가정도 회사도 나라도 내가 이해하고 배려하면 내가 가정과 회사와 나라에 감사하며 살 수 있고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감옥 안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한 바울의 자족 비결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우리의 불만과 불평은 그 원인에 있어서 우리의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있지만 무슨 사정이 있기에 못하고 있을 거야!’, ‘그렇게 해 주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사람이나 가정이나 회사나 나라를 꾸려가는 가족이나 근로자나 경영주나 정부를 이해해주고 배려해 준다면 우리에게 무슨 원망과 불평이 있겠습니까?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 원망과 불평이 없는 자족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Ⅳ
다음으로 두 가지 비결 가운데 신앙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완전한 자족의 비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2절과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비결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통해 행복의 비결도 찾으려하고, 합격의 비결도 찾으려하며, 성공의 비결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세속적이고 단편적인 비결이 아닌 신령하고 종합적인 비결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성공의 자리에서도 교만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비결과 실패의 자리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비결, 그리고 평안한 자리에서도 나태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비결과 고난의 자리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비결,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과 이 세상에서의 영광이 아닌 영원히 누릴 영광을 소유할 비결을 자신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입니다. 그럼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인 자족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삶을 자신이 살고 있기에 어떤 형편과 자리에서도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족의 비결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족의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에 나오는 그대로 바울에게 있어서 자족의 근원은 자기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바울은 천사가 아닌 육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소욕에 따라 육신을 가진 사람인 그도 편한 것을 좋아하고, 배부른 것을 좋아하고, 소유가 많은 것을 좋아하고,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재의 형편은 그런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따라서 자족의 근원이 자기였다면 그는 자족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자족의 근원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의 자족의 근원이 되셨기에 그가 어떤 형편과 자리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다 그 말입니다.
그럼 왜 바울이 예수님을 가족의 근원이라 했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씀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씀은 내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실패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병든 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감옥 밖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감옥 안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의 사람은 형편과 상관없이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건들 속에는 반드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뜻이 있음을 믿고 그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내게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신다고 믿는 믿음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자족은 인간의 수양이나 결심으로 완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약하기에 수양이나 결심가지고 원망의 마음과 불평의 마음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밖에서 자족을 이루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틀러(C. F. Butle)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세상 살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예수님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어려운 세상살이도 이길 힘을 주시고, 그래서 그 어려운 세상살이를 천국살이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게 살았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족의 능력으로 그는 그 어떤 형편과 자리에서도 자족하면서 가난과 위험과 고독과 슬픔과 실패와 죽음을 극복한 승리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 어떤 문제와 환경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당할 능력을 주셨음을 믿고, 그 어떤 문제와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며 사기기 바랍니다.
이렇게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씀에는 내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라는 의미와 예수님께서 내게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셨다고 믿는 믿음으로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족의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자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신앙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자족의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 안에서 사는 분들이 되어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자족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Ⅴ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기쁨을 누리게 하고 감사하며 살게 하는 일체의 비결인 자족의 삶을 살기 위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자족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고 완전한 자족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모든 삶의 현장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믿음과 예수님께서 그 어떤 형편과 상황도 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것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분명 예수님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는 일체의 비결인 자족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