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를 넘어 회개로!
< 본문 – 누가복음 3:7-14 >
여러분, 우리는 2022년을 11개월 동안 살아왔습니다. 아직 한 해가 다 지나지 않았지만, 2022년 한 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볼 때 가장 후회스러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후회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연초에 각오했던 것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해 못내 미안한 마음에 ‘그 때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직장인들은 ‘그 때 그 동료에서 이렇게 했으면 서로 힘들지 않았을텐데’하고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 때 이렇게 했으면 좀 더 좋았을 걸, 왜 그 때는 그걸 몰랐지’라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후회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반성할 수 있는 지성과, 달리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지성을 가진 이성적 존재이기에 후회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후회와 회개는 전혀 다른 것이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종종 후회하면서 그것을 회개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에 대해서 참회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을 참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 잘못했고, 이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괜히 했고...’ 그러면서 우리는 후회하고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후회와 회개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들은 것처럼 가룻 유다와 베드로의 모습에서 후회와 회개가 어떻게 다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가롯 유다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어주었습니다.(요한복음 13:2) 여러분,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생각을 하지만 그 생각대로 다 따라하진 않듯이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태복음 26:21)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매우 괴로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제자들이 과연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 할 때에 떡 한 조각을 가져다가 가롯 유다의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떡을 받은 자가 자신을 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배신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 때 가롯 유다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고쳐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한복음 13:30) 예수님께서 건네주신 떡 조각을 받고난 후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산헤드린에 은 30을 받고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때까지도 가롯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군병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올 때에도 양심에 가책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가롯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또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심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마태복음 27:3-4) 예수님께서 정죄되어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롯 유다는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뉘우쳤다는 말씀은 후회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가 자신이 예수님을 판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한 짓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후회의 결과는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땠을까요? 베드로는 가롯 유다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를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3)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공관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한 여종이 그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묻자 자신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4)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때까지도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얼나마 큰 잘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권력자들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잘못이라는 것을 느낄 틈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한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고 난 후에 닭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때서야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게 되어,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누가복음 22:33)고 장담하던 베드로였는데, 그도 세 번이나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마침내 주님을 위해서 순교당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당했다는 것이 다른 것일까요? 그렇게 다른 길을 가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는 후회하는 것에 머물렀고, 베드로는 후회를 넘어 회개에까지 갔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후회에 머무는 것과 후회를 넘어 회개에까지 이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후회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을 하면서 반성한 것을 근거로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잘못을 깨닫는 것이 후회라면, 회개는 잘못한 것을 바로 잡아 선한 행동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요한 믿음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비록 실수하고 잘못했다 허다라도 뉘우치고 회개하여 돌아서면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납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 잘못을 안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잊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베드로는 용납하시는 하나님, 용서하시고 다시금 품어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 믿음의 길을 갑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뼈저린 실수의 길이 아닌, 그 주님을 증언하는 그 제자의 길을 말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분문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장차 올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4절의 말씀처럼,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누가복음 3:4-5)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43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고대에는 왕이 어느 지역에 행차할 경우 선구자가 앞서 가서 왕이 탄 마차가 지나가기 쉽도록 주변의 사람들을 모아 길을 고쳐 평탄케 했습니다. 그래야 왕이 평안히 마치를 타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고대의 풍습을 왕이신 하나님께 비유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조국 유대 땅으로 돌아올 때, 자기들과 함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고 생각하고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아요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자신이 메시아의 선구자가 되어 그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왕이 행차하실 때에는 길을 닦습니다. 돌맹이를 제거하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굴곡진 곳을 다듬고 메워 평탄하게 합니다. 메시아가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이유는 그 세례가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뿌리를 찍듯이 찍혀져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칠 때,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회개를 하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은 아주 구체적인 대답을 해줍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11절) 회개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어떤 계율도 아닙니다. 회개란 삶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없는 자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회개는 아니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마음 가짐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체적인 삶이 회개한 자답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리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 요한이 대답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당시 세리는 백성들에게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 제국을 위해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도 불쾌한데, 로마 제국이 부여한 권한을 악용하여 부과된 세금 이상을 거둬 착복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떳떳하지 못한 세리라는 직업을 때려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전까지 착복했던 것들 다 토해내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주어진 삶에서 정직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군인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 요한이 대답합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은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여기 나오는 군인들은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치안을 유지하거나 세금 징수자를 돕기 위해 징집된 유대인 군인을 말합니다. 그들 역시 세리들과 같이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폭력으로 돈을 갈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받은 급료가 많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주어진 업무에만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회개란 돌아서는 것입니다. 내 욕심대로 살던 사람이 내 욕심을 내려놓고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던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던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한다 하더라도 삶이 변화되는 회개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 후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리들이 정한 세금 외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며 자기 배를 채우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후회했음에도 또다시 자기 욕심에 끌려 더 많이 거둬들여 자기 배를 채운다면 그는 후회했을 뿐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군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가지고 약한 사람을 압제하거나 강탈하는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후회했지만, 그런 악행을 또다시 행한다면 그것은 회개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회개는 삶이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그렇게 회개해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아가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세례 요한이 메시아(그리스도)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누가복음 3:16-17) 자신은 결코 메시야(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뒤에 능력을 가지고 오실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메시아(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은 그분의 길을 준비하러 온 사람일 뿐입니다.
자신의 뒤에 오실 메시아, 그분을 맞을 준비는 다름 아닌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기점으로 교회는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대림절은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을 영어로는 Advent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Adventus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입성할 때 쓰는 말입니다. 황제로 즉위하면서 화려한 말을 타거나 걸어서 로마 시내로 입성할 때, 또는 황제에 즉위한 후 어느 지방을 방문할 때 그 황제가 오신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어떤 도시에서는 황제가 그 도시에 오시면 황제가 오심을 기념하여 기념주화를 발행했는데, 그 주화에 ‘adventus Augusti’라고 새겨넣었습니다. 그만큼 황제가 자기 지방을 방문하는 것을 기뻐하며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그와 같이 우리 가운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세 가지 기다림으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첫 번째는 2천년 전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님으로 임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신 것처럼, 재림의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를 헬라어로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파루시아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은 다시 오실 주님,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음받고 거룩한 신부가 되어 신랑이신 재림의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 임하시는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모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동행하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세리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않는 것처럼, 군인이 강탈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하지 않고 받은 급료로 족한 줄을 아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은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모시고 살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실수투성이인 우리 인간이 후회없는 삶을 사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후회없는 삶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후회에 머물지 않고 회개하며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을 후회 이전으로 리셋(reset)해 줍니다. 그 어떤 죄와 허물, 실수와 과오라 하더라도 깨끗하게 씻겨주어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아하여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후회에 머문다면 우리는 계속 후회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회를 넘어 회개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성장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더욱 온전해져갈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후회에 머물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에게 더욱 후회할 때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될텐데, 그 때 후회를 넘어 회개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 중에 회개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신 분 계십니까? 후회에 머물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함으로 주님의 영접을 받고, 우리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천국을 이루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만 연약한 인간인지라 자주 후회하며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후회에 머물지 말고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늘 회개하는 믿음으로 사십시다. 회개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람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사도행전 2:38)
이번 대림절 기간 동안 이 땅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도록 후회를 넘어 회개에 이르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에 하늘의 평강과 은혜가 가득한 거룩한 절기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고, 만왕의 왕 –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