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엘리가 아닌 사무엘일까요?
< 본문 – 사무엘상 3:7-9 >
여러분, 미국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튀르키예(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Ben-Gurion),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이들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그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 또는 초대 수상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 남다른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사람들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명예스러운 호칭과 함께, 지금도 그 나라에서는 굉장한 존경을 받고 있는 분들입니다.
반면 ‘건국의 아버지’라는 명예스러운 호칭과 함께 존경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런 존경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입니다. 사울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인기도 높았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조건에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짱짱했습니다. 그는 좋은 배경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외모에서도 남들보다 뛰어났습니다. 키도 컸고, 외모도 수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집안이 힘이 있다고 그걸 뻐기거나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하며 많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자였던 사무엘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왕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런 힘으로 그는 왕이 된 후 오합지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결시켜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남다른 지도력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울을 평가할 수 있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9:2절에서는 그런 사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사울을 ‘준수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 ‘준수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טֹוב)입니다. 토브(טֹוב)라는 말은 보기 좋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으로 보여지는 면에서만 좋고 아름다움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외모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겸손한 사람임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왕이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는 많은 면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자격과 조건을 갖추고 왕이 되었다면 분명 사울은 성공한 왕이 되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초대 왕이라는 타이틀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나라다운 구색을 갖춤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존경받는 왕, 성공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실패한 왕, 버림받은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갖추고 초대 왕이 된 사울이 실패한 왕이 되고 말았을까요? 초대 왕으로서 ‘건국의 아버지’와 같은 명예로운 호칭으로 칭찬을 받을만한데 왜 그는 버림받고 말았을까요?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실패한 왕이 된 결정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가벼이 여기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자신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늦게서 전장에 나타난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사울 왕을 책망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사무엘상 13:13-14)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된 이후에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왕이 된 것처럼 교만해지기 시작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왕이라고 해서 자신이 최고의 권력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왕 위에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 자신이 최고의 권력자라는 의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위에 계신, 사울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이 충분히 거부해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하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조건을 붙이십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3) 아말렉의 소유는 그 어떤 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사무엘상 15:9)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사울 왕은 하찮은 것은 진멸했으나, 좋은 것들은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3)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분명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존경받을만한 자격과 조건과 환경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왕, 하나님께 버린 받은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한 말씀대로 사울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산다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져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인간 내면에서 소리치는 욕망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에 유혹하는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여 따라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아래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3: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상(vision)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들려지지 않고, 이상도 보이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뜻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사사기의 말씀을 통해 본다면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는 말씀과 같은 상황입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이 말씀은 사사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입니다. 사사 시대의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보여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이상이 보여지지 않는 영적으로 암울함 시대에 어린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아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정확하게 어떻게 부르셨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10절을 통해 우리는 뭐라고 부르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을 부르시는 그 소리를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는 엘리 제사장에게로 갈려갑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신이 부르지 않았노라’며, ‘가서 잠을 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데도 사무엘은 그게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아직 사무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말은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아직 한 번도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 그게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된 후에야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을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부르시는 음성이 들리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니다.”라고 말하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후인 10절 이하의 말씀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을까요? 엘리 제사장을 부르시고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왜 엘리가 아닌 사무엘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9절)고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은 어떨까요?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사무엘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주의 종, 여호와의 종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인 사무엘상 2:2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엘리의 아들들은 망나니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기들 마음껏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강탈했습니다. 그럼에도 엘리는 그런 아들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엘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말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신분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다면 주인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기 자식들을 가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자기 아들들도 하나님의 종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 앞에 종임을 잊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말씀을 듣고 전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종임을 분명하게 고백하십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그 말씀을 내 생각대로 판단합니다. ‘이건 이래서 지키면 안 돼고, 이건 이래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 안 맞고...’ 여러분, 종은 주인의 말씀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니까 우리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도 순종하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엘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 이후에 그의 삶을 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 대신에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의 순수한 믿음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오랜 기간 제사장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그리고 제사드리는 법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를 때, 엘리는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사무엘에게 다시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은 비록 아직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사무엘상 3:3절에 말씀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엘리처럼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기에 교회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압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잘 압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익숙하게 잘 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무리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을 읽더라도 너무 익숙하게 읽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어도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건 내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아무개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목사의 설교를 잘 하느니 못 하느니 평가는 하면서,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못합니다. 성경으로 다른 사람과 토론을 할 순 있어도, 그 말씀이 오늘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되지 못합니다.
때로는 처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경청하는 것을 봅니다. 어쩌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더 정성을 들여 들으려 하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말씀으로 들으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는 비결은 이것입니다.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또 설교를 들을 때에도 그런 마음이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셔도 그게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무엘상 2:27-36절의 말씀이 엘리 제사장에게 주신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책망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엘리 제사장이 회개했다거나,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냥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들려준 그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무런 마음에 동요도 없이 말입니다. 그저 어떤 사람이 해 준 말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한 여인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당신 같이 훌륭한 분을 태어나신 분은 분명 복 있는 분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태어나게 하신 분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탄생시킨 마리아를 예수님 다음으로 추앙하고 마리아를 통해서 기도도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마리아보다 더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이나 성경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든, 교회생활이나 설교에 대해서 얼마만큼 익숙하든 그것은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또 교회생활에 대해서 익숙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도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고, 사모하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 그리고 설교를 들으실 때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혹 설교를 들으실 때 목사의 말로 들리시진 않습니까? 목사의 말로 들린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 익숙하던 생각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 때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복된 삶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모든 면에서 성공한 왕-존경받는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실패한 왕-버림받은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이기에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길이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